씁쓸한 커피에 쓰디 쓴 고민을 더해도 될만큼 우리는 강해졌다.
바닷가가 고향이라 좋은 점은 낭만을 품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특히 마음이 말랑말랑한 여고생에겐 더 그랬다. 하교길에 바다 너머로 지는 해를 보면 알 수 없게 마음이 뭉클해졌고, 소풍으로 해수욕장에 가면 귀퉁이에 떨어진 유리병을 보며 혹시 안에 편지가 들어 있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이 앞섰다. 얕은 바다로 들어올 수 없는 커다란 배들은 저 멀리 대기한 채로 바지선이 왔다 갔다 하는데, 늘 멈춰 있는 듯한 배 안의 사람들은 무얼 하며 지낼까 궁금했다. 하멜표류기의 하멜이 일본으로 탈출했다는 조류를 가만히 서서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 자리에서 종이배라도 하나 띄워 먼 나라에 쪽지를 남기고 싶었다. 바다의 회오리, 밀물과 썰물, 날씨에 따라 달라지는 빛깔 등을 빛의 파장이나 달의 인력에 대해 알기 훨씬 전에 경험으로 알고 있는 소녀들은 마치 전설의 고향처럼 말도 안될 수많은 스토리들을 만들어낸다. 초등학교 때 나의 짝꿍은 밀물과 썰물의 원리를 이렇게 설명했다. “슬퍼서 그래. 슬퍼서 눈물이 가득 찼다가 꾹 참으니 다시 쑥 들어가는 거야.”
창 밖으로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 앉으면 고등학생인 나는 분위기에 심취했다. 날씨가 좋은 날, 엄마와 특별 외식을 하고 바닷가를 주욱 따라 드라이브를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어김없이 나의 메뉴는 파르페다. 칵테일후르츠와 시럽이 깔리고 그 위로 아이스크림과 생크림을 층층이 쌓은 후 장식용 미니 우산을 꽂아 주던 파르페는달콤함과 부드러움의 결정체다.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 경치를 감상하며, 당시 내가 상상하는 아가씨의 모습처럼 작게 한 입씩 떠 넣고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당분을 음미했다. 그러다 보면 아무리 예쁘게 먹으려 노력해도 초코 아이스크림과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서로 녹아 섞이며 예쁜 것과의 거리는 매우 멀어져 아쉬웠다.
친구들끼리 카페에 간 것은 수능시험을 마친 뒤다. 그것은 마치 보호자 없이 처음으로 시내버스에 올랐던 기분과 같았다. 긴장되고 어색한 어른놀이의 일환이다. 커피를 마시면 멍청해진다는 어른들의 말씀을 받잡아 그 때까지는 정식으로커피를 마셔본 적이 없었다. 간혹 집에 손님이 다녀간 뒤 상을 치우며 남은 커피 한 모금을 입에 털어 넣어본 게 전부였다. 카페 하면 파르페지만, 용돈으로 먹기엔꽤 비싼 메뉴인지라 우리의 메뉴는 핫초코였다. 추운 날씨에 좋은 선택이기도 했다. 핫초코 위로 생크림을 말아 올리는 것은 필수다. “생크림 올려드려요?” “네! 가득이요. 많이주세요.”
대학생이 되자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커피를 마셨다. 커피를 마실 지언정 카페에서 달콤한 크림을 섭취하는 즐거움은 여전히 포기할 수가 없다. 자주 가던 학교 앞 카페에서 크림이 올라간 커피는 무엇인지 물으니 카페모카란다. 초코맛이 나는 커피라니 첫 시작으로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조금 쓴 맛의 핫초코 같기도 하고, 손님상에서 눈치껏 먹었던 모카골드 커피믹스와도 비슷한 맛이 좋았다. 이것이 커피로구나. 이후부터는 나는 늘 카페모카였다. 크림은 가득, 많을수록 좋다. 혹시라도 뚜껑을 덮으면 크림을 덜 줄까봐 걱정되어 주문할 때 미리 뚜껑은 필요 없다 이야기했다. 뚜껑이야 필요한때 달라고 해서 쓰면 그만이었다.
미팅, 소개팅을 즐기며 연애도 하고, 클럽을 쏘다니며 춤도 좀 추고 놀아도 보고 해야 할 스무살, 나는 그 흔한 동아리 하나를 들지 않았다. 딱히 관심이 있는 것도 없었고 선후배 관계에도 크게 정이 가질 않았다. 오로지 하나,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 친해졌던 몇몇의 친구들과 매일같이 벌인 카페수다가 대학 생활의 전부였다. 카페 활동에 그 누구보다 적극적인 우리는 공강 시간에도, 수업이 끝난 뒤에도 매일같이 수다를 떨다 막차를 타고서집에 가는 일이 잦았다. 여섯의 무리 중에 그나마 활발한 한 아이는 연애를 시작하고, 또 다른 아이는 교외 활동을 시작하는 등 무리 중 몇몇이 들락날락하는 동안 나와 함께 늘 자리를 지켰던 멤버가 있었다. 친구와 나는 사는 동네도 가까웠는데, 우리는 주말에도 만나 카페모카를마시며 한 이야기 또 하고, 또 하고 시간을 보냈다. 수다는 역시 커피 맛, 커피는 역시 크림 맛이다.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들은 주로 진로고민이었다. 국영수를 중심으로 지방에서 착실하게 공부해 수능점수만으로 적당히 점수에 맞춰 정정당당 정시 입학, 하고 싶은 것이 없으니 1학년 내내 수능을 다시 보아야 할까 하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학만 가면 끝인 줄 알았는데 진짜 고민은 그 때 부터 시작인 셈이었다. 졸업할 때까지도 진로고민 카페모카 회담은 이어졌다.
쓰디 쓴 인생의 이야기를 달디 단 음료와 함께 나누다 보면 중화가 되어 0점을 찾는 것인지, 이야기는 늘 제자리걸음에 가까워도 딱히 지치지 않았다. 심지어는, 우리가 취미로 고민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말까지 나누었다. 말수가 적은 친구는 여럿이 있을 때야 몇 마디만 해도 될 것을 나처럼 말이 많은 아이와 단 둘이 만났을 때는 맞장구만 쳐도 평소보다 많이 말하게 되니, 만날 때마다 칼칼해진 목을 쥐고서 집으로 향했다. “나 또 목이 쉬었어.” 그러고선 다음날, 그 다음날, 매일같이 만났다.
생크림을 가득 올린 핫초코에 더블초코케이크를 시켜 맛있다고 먹던 나는 이제 단 것을 그렇게 즐기지는 않는다. 절대 믿지 않던 말, ‘어른이되면 단 것을 덜 먹는다’는 것은 참말이었다. 언제부턴가 커피라면 카페인이 많고 풍미로운 드립커피, 혹은 깔끔한 아메리카노가 좋고 여기에 뭘 넣고 섞고 갈아낸 것들은 어쩌다 한 번으로 족하다.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여름이면 스타벅스의 푸라푸치노와 카페모카, 캬라멜마끼아또 등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요즘은 다르다. 여럿이 카페에 가도 뜨거운, 혹은 차가운 아메리카노 뿐이다.
2년 전 겨울, 베를린을 여행할 때였다. 아직은 춥고 해가 짧은 때라 기대했던 플리마켓은 크게 열지 않았다. 심지어 그 날은 옷 젖는 줄 모를 가랑비가 흩뿌렸고, 공원의 땅은 질척했다. 이리 저리 웅덩이를 피해 점프하며 그나마 문을 연 가게들을 기웃거려보지만 과거 공산권 국가 특유의 어두운 정서가 묻어 있는 브라스 소재의 옛 동독 조형물들과 전쟁 당시의 나침반, 훈장 등이 대부분이니 나의 취향은 아니었다. 독일어라고는 한 마디도 할 줄을 모르니 고서를 파는 가게도 패스, 기골장대한 독일 여성의 반지나 팔찌는 내겐 너무 크니 또 패스, 지나치는 가게가 하나 둘 늘어갔다.
온 김에 소시지나 먹고 가려는 심산으로 코너를 도니, 그나마 작은 매대 위에 찻잔이 몇 개 올라가 있었고 내 눈은 그 중 하나에 꽂혔다. 모양이 무척 독특했다. 특별한 상표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가볍고 두께가 적당하며 깨진 틈이 하나 없이 보관이 잘 되어 있는 본차이나 제품이다. 둥글게 떠 낸 아이스크림한 스쿱 위에 원뿔 모양의 뾰족한 콘을 꽂은 듯한 외형은 그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던 형태다.
단번에 떠오르는것은 10년 전 즐기던 카페모카다. 진한 커피에 초코파우더를 섞어 둥근 부분에 먼저 넣고 그 위를 크림으로 채워 올린 모습이 그려졌다. 틀림없이 카페모카, 혹은 비엔나 커피를 위한 잔이다. 이제는 더 이상 크림이 들어간커피를 즐기지도 않으면서 옛 생각이 나 빨간 것, 파란 것을 세트도 들였다. 그 즈음에도 나는 뜬금없이 로스쿨 시험 준비를 하지 않나, 업종을 바꿔야 하지 않을까 이직을 고민하질 않나 나의 진로를 고민하고 있었다. 일을 하면서도 아무런 보람도 즐거움도 없는 것에 고민, 또 다른 재미있는 것을 찾아 가면 어떨까 하는 상상, 다른 길을 찾아야겠다는 다짐을 거듭하는 동안 친구 역시도 오랜 고시생활에 지쳐 얼마나 더 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다. 10년이 지나 강산이 바뀌도록 진로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10년뒤에도 이러고 있으면 어쩌나.” 스무살의 우리는 이야기 했다. 그때 말한 10년 뒤가 이렇게나 빨리 와버렸다.
식성이 달라졌으니 애지중지 포장해 가져온 그 잔에 카페모카를 채우는일은없었다. 그저 현재의 식성대로 향이 좋은 드립커피를 채워 천천히 음미할 뿐이다. 우리의 10년 동안 고민은 달라지지 않은 것 같지만, 그러고 보니 식성 하나는 바뀌었다. 쓴 커피에 쓰디 쓴 고민을 곁들여도 버틸 수 있을 만큼 우리는 강해진 것 같기도 하다. 또 10년 뒤, 우리가 여전히 진로 고민을 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너 한 잔 나 한 잔 이렇게 마주하면 ‘고민이 취미인 것 같아’라며 목이 쉬도록 떠들 수 있지 않을까. 영원히 없어지지 않을 고민 앞에 중요한 건 이런 너와 나, 우리들 서로가 함께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