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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l Jul 19. 2016

삐딱해도 넘어지지 않는다

찻잔으로 발견하는 자아의 소중함

4월, 한국은 벚꽃이 피기 시작한 봄이었지만 헬싱키는 여전히 오리와 거위의 도움을 빌려 다운점퍼를 입어야만 하는 날씨다. 겨울도 봄도 아닌 날씨, 직장인의 휴가철이나 아이들의 방학도 아닌 비성수기라 어느 때보다 저렴한 항공권과 숙박에 부담 없이 여행할 수 있는 때가 이 때다. 추운 날씨, 흐린 하늘, 어디 한 곳에도 없는 초록, 그 어디서 사진을 찍어도 흉하다는 것만 감안하면 고요함을 고요히 느끼다 조용히 돌아오기 좋다. 


으슬으슬 몸살에 걸린듯한 4월의 헬싱키


취사 시설이 갖추어진 아파트에 묵으니, 맞춰야 할 조식 시간 같은 것도 없어 좋았다. 적당한 때 눈을 뜨고서 아침을 챙겨 먹고 커피까지 마시고서 슬슬 시내로 걸어 나가본다. 영업을 오후에 시작하는 집이 대부분이라 오전의 시내는 커피와 간단한 식사를 할 수 있는 카페, 부지런한 이민자가 할 법한 케밥집, 미국식 피자집 만이 문을 열었다. 


자선 단체에서 운영하는 일부 세컨핸드 매장이 간간히 문을 열어 구경하는데, 북유럽 물가가 비싼 탓인지 다른 나라들만큼 저렴하지는 않다. 대신 물건은 무척 깨끗하다. 한 번 들인 물건은 오래도록 깨끗하게 관리하는 것이 이 나라 사람들인데, 오래된 빈티지 그릇에서 느꼈던 것을 빼곡한 옷가지와 스카프 더미에서도 느낀다.


중고로 나온 코스츔이 장난스러웠던 자선단체 세컨핸드숍


북유럽 사람들이야 기골장대 하기로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으니, 옷가지는 애초에 사이즈도 없어 구경할 것이 마땅치 않았다. 예전에는 이런 가게들에 꽤나 저렴한 그릇들이 많았는데, 일본과 한국, 요즘에는 대만과 중국에서도 이 지역의 빈티지 그릇을 찾는 사람들이 늘다 보니 쓸만한 것들, 마음에 드는 그릇이 없다. 다시 밖으로 나와 이 골목, 저 골목, 발길이 닿는 대로 다니다 보니 세컨핸드 그릇을 취급하는 길 가의 가게가 있다.


가게로 들어서니 콘셉트는 없지만 예상보다 훨씬 다양한 제품들이 매장에 가득하다. 주인은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인데, 궁금한 것이 있거든 물으라며 자신의 책상에서 신문을 읽는다. 간섭받지 않는 편안함이 좋다. 밖에서 미리 찜 해둔 접시 몇 장을 손에 들고서 좀 더 구경했다. 정갈한 그릇들 사이에 삐딱선을 탄 하얀 찻잔이 하나 보인다. 꽤나 우아한 그릇들 사이에 놓여 있으니 잘 나가는 친척들 사이에 불편한 식사를 하는 뮤지션 같다. 턱시도 정장 사이에 찢어진 청바지처럼, 2대 8로 넘긴 포마드 헤어 사이의 폭탄머리처럼, 그 삐딱함이 도드라진다.


삐딱함, 불균형이 매력인 Ego 찻잔


이 찻잔의 이름은 Ego, 즉 자아다. 스칸디나비아 포스트 모더니즘 디자인을 대표하는 스테판 린드포스(Stefan Lindfors)의 디자인인데, 그는 누가 한 번 했을법한 디자인이라고는 절대 시작하지 않는 작가로 유명하다. 친근함보다는 신선함을 추구하는 그가 1998년 선보인 이 디자인은 꽤나 오랫동안 사랑받다 2014년 단종됐다. 잘 알지 못하더라도 음악이라면 클래식이 좋고, 그중에서도 정석대로라는 바흐의 선율을 좋아하는 것이 나다. 미술도 회화적인 옛날 그림들이 좋지, 실험적이고 개념적인 현대미술을 선호하지는 않는다. 현대미술의 시초라는 마르셀 뒤샹(Marcel Duchamp)의 샘(Fountain)도 내 눈에는 미술관의 변기로만 보이고, 현시대 가장 비싼 작가라는 데미안 허스트 (Damian Hurst) 등의 작품 세계는 나는 잘 모르겠다. 


그릇도 가장 전통적인 디자인을 좋아한다. 납작한 접시, 동그스름한 컵받침에 패인 홈, 그 홈 위에 꼭 맞게 올라가는 둥근 찻잔이 좋다. 그래선지 일부러 찌그러뜨렸다거나 기울였다거나 하는 실험적인 그릇에는 눈길이 가질 않았고 이 그릇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단종이 되어 이제 빈티지 그릇 사이에 끼어 있으니 느낌이 또 달랐다. 오른손으로 밥을 먹을 것을 종용당하는 왼손잡이 아이 같달까. 그렇게 혼자 있는 것이 안됐기에 마지막 하나 남은 컵과 컵받침을 함께 계산했다.



그런데 요즘은 이 컵에 가장 애정이 깊다. 삐딱하긴 해도 흐트러진 컵의 중심을 바닥까지 닿는 손잡이가 함께 잡아주니 불안하지 않고, 사이즈도 커서 꼭 티타임이 아니라 요구르트를 먹을 때도, 깍둑 썰기한 과일을 먹기에도, 간단히 수프를 먹기에도 좋다. 뜨거운 차를 부었을 때는 다섯 손가락 모두로 컵을 쥐니 안정감 있고, 뜨거운 컵에 닿기 쉬운 세 번째, 네 번째 손가락의 두 번째 마디도 비뚤어진 컵 덕분에 데일 염려가 덜하다. 소서에도 홈이 없어 일반 접시처럼 쓰기 좋다. 이런 기특한 생각을 어떻게 했을까. 언제 만나면 이 반항아의 엉덩이라도 토닥토닥, 뒤통수를 쓰담 쓰담하고 싶다. 쓰면 쓸수록 마음에 든다. “조금 삐뚤면 어때, 조금 다르면 어때, 네 중심은 네가 잡는 거란다. 그저 설 수 있다는 걸 입증하면 끝이야.” 하며 작가가 말을 건네는 것만 같다. 


사람 머리 꼭대기에 오른 불경한 핀란드 갈매기


겸손의 미덕이 내재된 탓인지 남이 하는 칭찬을 우리는 곧이듣질 않는다. 누군가 예쁘다 칭찬해도 ‘아니에요. 제가 뭘요. 저는 모공이 무척 넓은걸요.; 하며 손사래를 치고, 일을 잘 한다 해도 ‘아닙니다. 다 도와주신 덕분이지요. 저는 한 것이 없습니다.’라는 말이 자동으로 나간다. 해외에서 역시 칭찬 앞에 땡큐를 먼저 내세우는 것이 무척 어려웠다. 입으로는 영어여도 머리로는 한국어이니 겸손의 미덕은 계속됐다. 예쁜 옷을 챙겨 입은 나를 보고서 친구가 “멋있다 (Awesome)!”라 해도 “아냐, 나는 이거 너무 딱 붙는 거 같아 (No. This is too tight I think.).” 하며 무조건 ‘노’가 앞섰다. 전혀 예상치 못한 답에 친구도 구구절절 충분히 예쁘다며 진지한 설명을 늘어놓게 되고, 그러다 어색한 마무리를 지어야만 했다. 남이 하는 일은 다 위대해 보이고, 내가 하는 일은 다 미개해 보이는 것이 겸손의 미덕이 가진 허점이다. 


미운오리새끼들이 가득했던 헬싱키 캄피(Kamppi) 센터 레스토랑


칭찬을 해도 그런 것을 하물며, 단점을 말할 때는 얼마나 민감하겠는가. “다른 애들은 안 그런데, 너는 왜 그러니” 이 말이 어른이라고 다를 것 같지만, 그 말의 파급효과는 아이일 때와 다를 바 없다. 내가 잘못했구나, 죄책감이 생긴다. 죄가 생겼으니 죄를 탓하는 사람은 밉기는 해도 그럴 수 있겠다 이해가 되고, 죄를 감싸주는 사람에게는 고맙고 미안하다. 결국 또 죄책감이다. 누가 잘못했다고 해도 내 죄, 괜찮다고 해도 내 죄, 마음은 무겁기만 하다.


그렇지만 그 짐을 내려놓아야 한다. 스스로 자신의 자아를 잘 파악하고 아껴야 한다. 일반에 못 미치는 나도, 지극히 일반적인 나도, 일반에서 벗어나려는 나도 결국은 나 자신의 모습이다. 어떤 모습이건 적어도 나만은 나의 그 자체를 존중해야 한다. 칭찬은 칭찬으로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저 좋은 점을 발견해 준 상대방에 고마움을 표해야 한다. 그것이 아름답다. 조금 달라도 스스로 중심을 잘 잡고 설 수 있다면 어떻게 서든 상관없다. 컵의 엉덩이로 사뿐히 앉든, 삐딱한 자세로 손을 짚고 있건, 내가 내 중심을 잡으면 그만이다. 손을 들거나 말을 걸지 않아도, 굳이 웃어 보이고 꾸미지 않아도 되는 헬싱키의 그 거리를 걷듯, 나 자신의 모습 그대로 길을 걸을 수 있으면 그걸로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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