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 더 여유롭게 외로운 성인이 되고 싶다
나는 만화를 보지 않는 어린이였다. 사람이 아닌 그림에 몰입하지 못했고, 그래서 집 앞 비디오 가게에서도 후레시맨, 바이오맨 혹은 아기공룡 쭈쭈 등의 실제 사람이 등장하는 류나 빌려다 볼 뿐, 만화영화라면 시작한 지 10분이 채 지나지 않아 잠들어버렸다. TV에서 하는 만화도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지 전까진 좀처럼 보지 않았다. 일요일 아침 일찍 깨어난 아이들을 위한 디즈니 만화 시리즈도 그저 그랬고, 그나마 보기 시작한 건 10살이 넘어섰을 때쯤여섯시 내고향 이전에 하던 웨딩 천사 피치, 세일러문 시리즈부터였던 것 같다.
대신, 드라마를 즐겨봤다. 진짜 사람이 나오고, 변신도 하지 않은 채 벌어지는 진짜 이야기들이 좋았다. 방학에는 9시를 전후해 시작하는 아침드라마를 보기 위해 일찍 일어나 식사를 마치고 TV 앞에 앉았고, 저녁 8시부터 시작하는 일일드라마를 채널을 바꿔가며 보고 밤 10시 이후의 미니시리즈, 주말드라마를 섭렵했다. TV소설이라는 타이틀을 단 아침 드라마에서 6,70년대 시대상에 울고, 주말드라마에서 본 개천에서 난 용들의 고충에 사회가 썩 아름답지는 않음을 배웠다.
드라마에서 보는 또 다른 즐거움은 우리 집에 없는 도시 어른들의 세련된 삶이었다. 나는 해외에 가본 적은 없지만 비행기에서는 밥도 주고 주스도 준다는 것을 승무원들이 나오는 드라마를 통해 알 수 있었고, 정원이 있는 담 높은 이층 집 어른들은 남산이 보이는 높은 층의 통유리 인테리어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라는 음식에 와인이라는 음료수를 마신다는 걸 알게 됐다.
어린 입맛에 양념 가득이 아닌 생고기 스테이크가 썩 맛이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와인이라는 음료수는 아주 그럴싸했다. 우리 집에는 술을 마시는 어른이 한 명이 없었고, 할아버지는 농촌에 사시니 매실주, 더덕주, 막걸리, 소주, 명절의 정종을 즐기시니 와인이라는 존재가 술인지 음료수인지 알 턱이 없었다. 그것이 술이라는 것을 나중에 학교 친구를 통해 알게 됐지만, 이미 화면 속의 빨갛고 투명한 액체, 그리고 그를 담는 목이 기다란 유리잔에 나는 매료되어 있었다.
술과 관련되었으니 어린이나 청소년이 탐해서는 안될 말이라는 생각이 들어 한동안 잊었다가, 고등학교 2학년 어느 날, 왠지 ‘이제는 요구해도 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느 때처럼 엄마와 마트에 들렀다가 나는 그릇 코너에서 와인잔 하나를 슬그머니 카트에 넣었고, 엄마도 흔쾌히 승낙했다. 그리고 그 잔에 매일 아침 포도즙을 챙겨 먹었다. 드라마에서 본 것처럼 괜히 뱅글뱅글 돌려 코를 살짝 대고 호흡을 짧게 ‘훕’ 들이마시고선, 호흡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감은 눈이 연출한 어둠 속에서, 방금 들이마신 공기 속 포도 입자는 두 눈 쪽으로 퍼져 올라오는 듯했고, 심장을 타고 온 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 같기도 했다.
성인이 되어 하우스 와인 한 잔을 제대로 주문할 수 있게 되니 무척 기뻤다. 법적으로 술을 살 수 있는 나이가 아니라, 어릴 때 보던 드라마에서처럼 좋아하는 와인의 종류가 있다는 것이 좋았다. 법적인 어른이 아니라 진짜 어른이 된 그 느낌은 그럴싸했다. 스물세 살쯤이 되고 나서야 설탕과 시럽이 없는 쓴 커피의 맛을 알게 되었었는데, 탄닌이 느껴지는 떫은 와인을 좋아하게 된 것은 서른이 넘어서였다. 내가 나 스스로를 성인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이 그즈음부터였던 것 같다. 뜨거운 국물을 마시면서 시원하다는 탄성이 절로 나는 것을 처음 느끼던 때처럼, 나는 안주 없이 말백의 레드와인 한 잔을 혼자서도 조용히 마실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이제는 진짜 성숙한 어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꼭 남산이 보이는 레스토랑이 아니어도 즐기는 것이 와인임을, 떫은 와인에는 단 맛에서는 없는 진한 담백함이 있다는 것을 느낄 때, 와인은 여럿이 모여 왁자지껄할 때보다 조용히 책이나 영화를 보며 홀로 즐길 때가 더 좋아질 때 가슴 저 깊은 곳으로부터 나는 진짜 성인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즈음 들인 또 다른 와인잔이 샴페인 잔이다. 샴페인은 일반적인 와인잔에 즐기기엔 아쉬움이 너무 많았다. 청량감 가득한 기포는 넓은 와인잔 주둥이로 쉽게 빠져나가고, 산뜻한 기분도 좀처럼 내기 어려웠다. 와인은 혼자 마실 때가 더 좋으니, 집에 여러 사람이 모인 때면 샴페인이 더 좋은 선택이었다. 그러려면 얄상하고 길쭉한 샴페인 잔이 꼭 필요했다. 이솝우화 ‘여우와 학’ 이야기에서 학이 기다란 주둥이로 수프를 먹는 병처럼, 입구는 좁고 길이는 기다란 투명한 잔이 샴페인에는 제격이었다. 수면 위를 향하는 기포들도 구경하고, 건배할 때 맑고 높은 소리가 나는 것도 즐겁다.
‘샴페인을 터뜨리다’라는 표현이 대변하듯, 샴페인은 기분 좋은 날 마시게 된다. 슬픔, 기쁨, 짜증과 우울을 모두 담는 찻잔이나 접시와는 다르다. 기쁨만이 담기는 샴페인 잔에는 순수한 아름다움이 있다. 이 그릇만이 가지는 특수성이다. 또한 샴페인 잔은 왁자지껄한 잔이다. 두고 마셔도 좋을 와인과 달리 샴페인은 기포가 빠지면 맛이 없어지므로 한 번 따면 끝까지 다 마시는 게 좋고, 그래서 적어도 둘 이상이 모일 때 이 길쭉이 잔을 꺼낸다. 이때의 수다는 필수 안주다. 즐거운 화제, 즐거운 사람, 맑은 날씨 혹은 밝은 조명 아래라는 조건이 갖추어질 때에만 샴페인 잔은 찬장 밖으로 나온다.
그래서 혼자 사는 내가 가장 안 쓰는 그릇도 샴페인 잔이다. 내가 내 공간에서 누군가와 샴페인을 기울이는 일은 일 년에 한 번이 채 될까 말까다. 축하할 일이 생기면 밖에서 즐기는 날이 많고, 혼자 살다 보면 축하가 필요한 날에도 혼자인 날들이 꼭 생기기 때문에 굳이 샴페인 잔을 꺼낼 일이 없다. 만날 사람이 없어서이기도 하고, 꼭 그렇지 않을 때도 많다. 생일이지만 요란한 파티가 싫다거나, 중요한 업무가 훌륭한 성과를 내며 마무리되니 기쁘긴 해도 피곤해 집에 가고 싶다거나, 십만 원 내외의 로또에 당첨되거나 하는 날들 말이다. 나갈까 말까 고민하고, 핸드폰 연락처 목록을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하다 결국 귀찮아 집에 돌아와 버린 그런 날, 나름의 만찬을 즐겨야지 하며 상을 차리다 샴페인 잔을 꺼내 가만히 바라본다. 에잇. 그를 집어넣고 다시 꺼내는 건 와인잔이다. 샴페인 잔 두 개를 들여놓고도 자리만 차지할 뿐 좀처럼 꺼내보지 못한다. 순수하게 즐거움만 담긴 이 잔은 그래서 가장 외로운 잔이기도 하다. 혼자 쓸 일이 없다.
쓸 일이 없으니 그럼 버려야 할까. 한 동안은 이삿짐을 정리하며 고민했다. 원룸의 찬장은 늘 좁고, 쓰지 않는 물건은 처분하는 게 정답이긴 하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버리지 못했다. 일 년에 한번일 지언정, 그 한 번에는 다른 어떤 그릇도 대체할 수 없는 특수함이 있다. 언제든이고 누군가 집으로 초대해 함께 축하의 건배를 할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잔을 쉽사리 버릴 수는 없었다.
혼자 밥을 먹는 혼밥, 혼자 술도 먹는 혼술의 트렌드에 비추면 나는 이 샴페인 잔에 그냥 혼자서도 씩씩하게 혼자서 샴페인을 마셔야겠지만, 혼자서 제대로 즐기기 어려운 메뉴 메뉴, 혼자서는 떠오르지 않는 생각과 정서라는 것이 있다. 이럴 때 굳이 씩씩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그저 외로움을 외로움으로 받아들이고 외로운 감정대로 느끼는 것도 홀로의 삶에서는 꽤나 중요한 부분이다. 집에 누가 온다고 아무 때나 샴페인 잔을 꺼내 들 수 없는 것처럼, 누군가와 함께라고 해서 외로움이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적절한 순간에 꺼냈다가 다시 넣어두고 오랜 시간 기다리듯, 외로움도 늘 그렇게 간직해야 할 감정이다. 쓰지 않은 샴페인 잔을 바라보듯, 조금은 여유롭게 외로울 수 있는 것. 이것 역시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