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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l Jun 17. 2016

아무것도 하기 싫음

어쩌다 꼭 그런 날엔 커다란 컵에 녹차 가득

해야 할 것이 산더미인데 꼭 이럴 때 한 번씩 찾아오는 병이 있다. 아무것도하기싫음 병. 심심한 것은 딱 질색이고, 늘 먹고 싶은 것과 놀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게 꼭 있거나, 해야 할 일을 얼른 끝내버려야 속이 후련한 인간이니 할 것을 쌓아두고 멍하니 있는다거나 눈에 초점이 잘 잡히지 않을 때란 일 년에 한 번도 드물다. 


아무리 그래도 할 일은 해야 하니 모니터 앞에 앉아 타자기를 한참 두드려본다. 썼다 지웠다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고 그나마 자가 검열에 통과한 일도 다시 살펴보니 영 마음에 들질 않는다. 그저 마음이 복잡한 때였다면 잠시 숨을 돌릴 겸 침대 아래 구석구석까지 말끔하게 정리하고 마법 같은 매직블록으로 싱크대, 가스레인지, 주방 타일 사이사이 묵은 얼룩을 깨끗이 지우고, 화장실 청소에 창고 정리까지 먼지 한 톨 없이 하고서 쓰레기 분리수거를 마치고, 새 쓰레기 봉지를 깨끗이 씻어 말린 휴지통에 씌운 후 뜨거운 커피를 한 잔 내려 마시면, 여기에 마음이 정리되는 바흐의 협주곡 하나를 곁들이면 말끔히 정리되곤 했다. 아무것도 하기 싫음 병은 다르다. 답답하니 설거지부터! 결심하 고전 투 적인 앞치마를 둘러도 영 힘이 나질 않는다. 어지러운 책상을 정리해볼까 스스로에게 말을 건네 봐도 대답은 도리도리다. 다 싫다.


아무것도 하기 싫개 / Mai Chau, Vietnam


돌아가는 선풍기 앞에서 소리 내어 아~~ 소리 내어 본다. 하기싫음병은 복식 호흡으로 내뱉는 ‘아~~’ 증상을 동반한다. 모든 말 앞에 아~~가 붙는다. 아~~ 싫어. 아~~ 해야 하는데, 아~귀찮다. 아~ 할 거 많은데, 아~ 괴롭다, 아~ 어쩌지. 아~ 몰라. 아~~


아~~ 앉기도 눕기도 싫다 두 다리를 주욱 뻗으니 엉덩이가 스르륵내려가 의자 끝에 걸터앉고서 나는 앉은 것도 누운 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로 한참을 눈을 감았다, 떴다, 감았다 다시 뜬다. 포기하듯 자리를 옮겨 이번엔 등받이가 뒤로 넘어가 있는 안락의자로 자리를 옮긴다. 전화기를 뒤적거리다 엄마에게 전화를 건다. 평생 나를 보아 온 나의 어른 엄마는 하기싫음병을 어떻게 극복할지 알고 있을지 모른다. 


“엄마아~~, 하기싫음병에 걸렸어.” 

“왜.”

”몰라”

”하지 마”

”할 거 많아”

”잠깐 쉬어, 그럼”

”쉬기도 싫어”

”그럼 뭐 먹어. 매코옴 한 걸 먹어.”



빙고. 역시 그녀는 정답을 안다. 그냥 매콤한 것이 아니라 코가 비뚤리듯 나는 그 소리 매코~~옴. 이런 날은 낙지볶음, 아귀찜처럼 몇 번이고 코를 풀어가며 먹어야 하는 그런 음식들이 잘 어울린다. 양푼에 가득한 밥 위에 김가루를 솔솔 뿌려내고서 이 매운 요리를 한 젓가락 올려 쓱쓱 비벼 마구 퍼먹기 좋다. 불타는 혓바닥에 찬바람을 넣어주는 ‘스읍. 하아.’를 반복하며 뜨겁고 매운 입 안의 음식을 달래가며, 먹는 것에 집중하는 그런 순간이 필요하다. 


무교동 낙지, 신사동 아귀찜이 무척 당기지만 나가기는 또 귀찮다. 아쉬운 대로 동네의 돼지국밥집으로 향했다. 청양고추를 뚝배기 가득 부어 넣고 매콤한 향의 다진 양념도 고봉으로 두 스푼 더, 그래도 조금 싱겁다 싶어 새우젓을 조금 더 넣어본다. 딱 좋다. 오늘 같은 날은 짭짤하게 매운 것이 제일이다. 국밥 역시 마구 퍼 먹기로서는 버금가는 메뉴니 적절한 선택이다. 특히 이 돼지국밥은 국물 반, 고기 반 씹는 맛이 좋다. 불만을 씹어 삼키듯, 국밥 안의 돼지고기를 잘근잘근 씹어 넘기다 보면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다. 옆 자리에는 혼자씩 들어와 합석을 한 두 아저씨가 마주 보지만 보지 않은 채로 국밥에 소주를 주문한다. 참OO 클래식이요.’ 클래식이라는 단어가 왠지 어색하다. 참 참OO, 진 참OO. 좀 더 한국적인 말과 곁들였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아닐까, 이 역시도 아무것도하기싫음병에 걸린 누군가의 작품일까. 귀찮아. 그냥 클래식 해. 뭘 굳이 바꿔. 그냥 해.


아무것도 하기 싫냥 / jiufen, Taiwan


평소보다 많은 양, 배가 터지도록 먹고서 동네 한 바퀴를 걸었다. 그래도 배가 불러 집에서 가까운 옷가게에 들렀다. 매대에 귀여운 곰돌이 푸 티셔츠가 단돈 오천 원, 비닐 포장 안에 들어있는 녀석을 한 번 꺼내 살펴볼까 생각하지만, 왠지 이렇게 포장되어 있는 건 뜯어보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닐까 소심한 마음에 노란 곰돌이 푸를 한참 바라보다 매장에서 나왔다. 열어보지 말라는 경고문구가 없으니 슬쩍 열어 보고 다시 넣어봐도 될 걸, 그래도 혹시 몰라 하는 마음이 앞선다. 꽃이라도 한 다발 사볼까, 길거리의 꽃집을 스윽 둘러보니 마음에 드는 게 없다. 유칼립투스 같은 향기 좋은 초록 풀이 갖고 싶다. 


집에 돌아와 따뜻한 물에 씻고 나와 안락한 의자로 다시 들어갔다. 앉은 것도 누운 것도 아닌 늘어진 자세로 드라마를 몰아 본다. 텔레비전을 바보상자라고 했던가. 맞다. 멍하니 보고 있으면 시간은 간다. 그러나 이 바보상자가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도 하고 있는 것도 아닌 편안함이 있다. 손 하나 까딱 하기 싫으면서도 내가 왜 이러나 원망이 생기는 날, 아무것도 하기 싫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스스로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날, 드라마라도 이렇게 보고 있으면 죄책감이 덜어진달까. 적어도 뭔가의 행위를 한다는 것에 마음이 편안하다. 


짭조름한 국물을 한껏 들이키고 와 그런지 목이 마르다. 야금야금 주워 먹은 과자 부스러기도 한몫한다. 뜨겁게 차를 한 잔 마셔야겠다. 움직이기 귀찮은 이런 날에는 그저 예쁘고 자시고가 필요 없다. 그저, 내가 가진 가장 큰 컵에, 혹은 짐승 용량의 텀블러에 뜨거운 차를 가득 우려내는 것이 최고다. 뜨거운 대로 식은 대로 쉽게 들이키기 좋은 녹차 티백을 한 개 넣는다. 짜고 기름지게 먹은 데 대한 또 다른 형태의 위안이다. 괜찮아. 녹차가 도와줄 거야. 나트륨 배출과 붓기 완화, 지방 배출에 도움을 줄 거야. 격식 따윈 개나 줘버려. 컵받침이 있는 찻잔세트는 이런 날 별 도움이 안 된다. 코스터도 필요 없다. 그냥 잡지 위에 턱 놓으면 그걸로 끝이다. 완결이 되도록 미친 듯이 드라마를 보다 한 번씩 홀짝홀짝. 이거면 족하다.



다음날 아침 비가 왔다. 언제부턴가 이런 날은 바디로션을 바르지 않아도 몸이 건조하지 않아 좋다. 얼굴에 크림을 한 겹 더 바르지 않아도 당기지 않는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먼지 없이 상쾌한 습기에 기분이 좋다. 창밖의 건물 색이 선명하다. 습기를 머금은 콘크리트 건물들은 운치 있다.


지난날 엄마가 보내준 키위가 마치 먹기 좋게 숙성됐다. 키위는 하루에 두 개, 제철인 참외도 한 개, 하얀 접시에 줄 맞춰 잘라내고삶아둔 달걀도 하나, 차가운 우유에 시리얼도 한 접시 곁들인다. 정갈하게 차려 먹으며 뉴스를 보고, 다 먹은 뒤 정리해두고 커피를 내려 아침 업무를 위해 책상에 앉아 모니터를 켠다. 오늘은 유칼립투스를 사야지. 아무래도 그래야겠어. 곰돌이 푸는 너무 노란 것 같으니 그냥 내버려둬야지. 참, 저녁에 친구들 만나면 뭐 먹으러 가지. 가스계량기 숫자 적어야 되는구나. 내일이 월세 날이네, 아, 친구들 모임에 회비 몇 달치 밀렸더라. 닭가슴살 삶아둔 걸 샐러드를 해 먹을까, 토르티야에 말아 치킨랩을 해 먹을까, 그냥 초계국수를 할까. 어제 돼지국밥 참 맛있던데, 다음에 아빠 오면 같이 가야지. 그 옆 동치미국수 가게는 새콤해서 엄마가 좋아할 거야. 나는 돌아왔다. 아무것도 하기 싫음 병이 돼지국밥과 드라마와 녹차 한-컵으로 치료되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소 / Mai Chau, Vietnam


이렇게 될 것, 그냥 어제 하루 마음 편히 쉬어야지 했으면 좋았을걸 싶다. 뭐, 이럴 줄 알았나. 불편한 마음을 편하게 달래려 노력할 필요도 없다. 불편할 때는 불편한대로 멍해 지자. 삐뚤어지자. 건강한 음식 따윈 아무짝에 쓸모가 없다. 싱싱 샐러드를 먹어봐야 허기진 마음이 차오르질 않는다. 게다가 우리에겐 녹차가 있다. 마무리 녹차면 충분히 다시 건강해진다(고믿어진다). 실컷 울어도 실컷 웃어도 감성의 늪에 흠뻑 빠져 실컷 허우적거려도 좋다. 의식의 흐름대로 모든 걸 그저 내버려두자. 걱정하지 말자. 사람은 그렇게 쉽게 망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하기 싫음 병에 빠진 날, 그냥 하루 앓아눕자. 실컷 앓고 다음날 햇살을 마주하자. 싱싱한 과일도 먹고 싶고, 유칼립투스도 사고 싶고, 점심을 뭐 먹을까 고민도 된다. 소중한 사람들과 하고 싶은 것도 불현듯 떠오른다. 자동 방어기제 작동 완료. 감기를 앓고 나야 면역력이 생겨나듯, 아무것도하기싫음병도 한 번 앓고 나야 한동안 같은 증상이 없다. 기꺼이 앓아누워도 좋다. 하루여도, 이틀이어도, 삼일이어도 좋다. 앉지도 눕지도, 무언가 하지도 하지 않지도 않은 그런 날, 그에 적절한 무언가 하면 된다. 영원히 계속될 것만 같은 날, 그런 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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