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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l Dec 18. 2019

저기 벤치에 잠깐 앉아 가자

쉬면서 계속 나아가는 것이 어쩌면 삶의 지혜일지도

지난봄 이사를 했다. 한참 전에 살던 두 동네의 중간 즈음이라, 낯설긴 해도 조금 걸어 나서면 전에 알던 길과 이어지다 보니 금세 익숙해졌다. 이렇게 아는 곳이 많아질 때엔 내 땅이 아님에도 나의 영토가 넓어지는 것 같고 흑백의 도시가 조금씩 색을 입는 것 같기도 하다. 눈으로 본 지도는 쉬이 잊힐지 몰라도 직접, 특히 혼자 걸어본 거리는 머리가 아닌 두 다리에 새겨져 오래 기억하는 법. 이런 점에선 걷기 좋아하는 사람이 낯선 곳을 여행하거나 사는 터를 옮겨 적응해야 할 때 유리할 수도 있겠다.



운이 좋게도 직전에는 걷고 싶은 길이 풍성한 곳에 살았다. 이미 그 동네에 살기 전부터 오랫동안 좋아해 온 길들이 사방으로 펼쳐져 있던 것. 집을 나서서 그 날의 기분에 따라 발걸음을 아무 데로나 옮겨도 걷다 보면 예쁜 길에 도착해 있는 건 얼마나 큰 기쁨인지 모른다.



오래된 붉은 벽돌 건물 사이를 그냥 걷다 보면 500살이 훌쩍 넘은 회화나무를 만나게 되는 정동길은 내가 마치 개화기의 신여성이라도 된 것처럼 주체적인 생각을 떠오르게 하고, 경복궁을 비잉 네모로 둘러 은행나무 가로수와 단정한 기와가 얹어진 담 사이를 걷는 건 머릿속이 복잡할 때 마음을 가지런히 정리할 수 있어 좋다. 대사관저와 청와대 덕분에 24시간 언제라도 안전하게 걸을 수 있는 건 보너스. 속상한 일로 잠을 이루기 어려울 땐 새벽 두시고 세시고 자리를 박차로 일어나 나서도 걱정이 없었다. 가로등 아래 드문 드문 작은 나무처럼 서 있는 경찰 청년들을 지나 텅 빈 골목을 걸으면, 가슴이 한결 상쾌해지곤 했다. 역시 머리가 복잡한 땐 돌아가지 않는 머리 써서 고민할 게 아니라 몸을 써야 되는 거다.



2019.2.10

 


온통 아파트뿐인 주거 밀집지역으로 이사 온 뒤로는 이렇다 할 산책 코스를 찾지 못해 매일 이 골목 저 골목을 기웃거렸다. 옛 철길을 따라 만든 도심의 기다란 공원이 인근에 있긴 하지만 이런 길은 꽃피는 계절이나 단풍이 예쁜 계절에 잠깐의 재미가 있을 뿐 평상시엔 그리 흥미롭지 않다. 동네 사람, 일부러 놀러 온 사람, 그저 지나는 사람이 다양하게 어우러진 그냥 길이 좋은데 맘먹고 조성된 길은 ‘자, 여길 산책하세요!’ 크게 써놓고 강요하는 것 같아서 괜한 반항심이 든다. 산책은 주변을 둘러보다 나만 알 것 같은 무언가, 그러니까 이 동네 사는 길고양이의 활동반경이나 독특한 나뭇가지, 길바닥에 박혀있는 하트 모양 돌 같은 일상적이지만 특별한 걸 발견하는 맛인데 이토록 목적 지향적인 길만 걷는 건 싫다.



일부러 공원을 등지고 반대편으로 걸어보던 날에는 있는 줄 몰랐던 한강공원 진입로를 발견했다. 집에서 나와 사거리를 두 번 지나고 횡단보도를 세 번 건너 강변북로 아래 어둑한 길이다. 썩 쾌적한 입장은 아니어도 일단 들어서고 나면 걷는 사람에겐 딱이다 싶은 게 이 곳이다. 강 건너 여의도 한강공원은 여럿이 모여 돗자리 깔고 텐트 치고 치킨을 배달해서 맥주도 먹을 수 있는 머무름의 공간임에 비하면 강 북쪽의 공원은 이동하는 경로다. 보행로와 자전거 도로를 가운데 두고 양옆에 초록이 자리하는데 오는 사람도 가는 사람도 한 줄로, 오는 자전거와 가는 자전거도 각각 한 줄로 다녀야 한다. 여럿이 오면 함께 걷기 불편하고,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아 있기엔 초록의 공간이 넓지 않아 이 곳의 사람들은 대게 혼자나 둘이 와서 걷거나 뛴다. 놀러 온 사람은 없어도 머리 위 강변북로에 가득한 차들처럼 어딘가의 목적지로 가는 중인 사람들이 있는 곳, 건물로 치자면 공간들 사이의 복도 혹은 계단 같달까.


  

2019.6.30
2019.8.20
2019.9.9



무엇보다 나는 이 공원에 강을 향해 조용히 놓인 벤치가 좋다. 한참 걷다가 해가 잘 드는 잔디 위에, 단풍이 물든 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 잠시 텀블러에 담아온 차 한 잔을 즐겨도 좋고 그냥 강물이 흘러가는 걸 가만히 보고 있어도 좋다. 아니, 꼭 앉지 않아도 괜찮다. 빨리 걷는 게 운동이 된다니,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바람처럼 걷다가 힐긋 바라보기만 할 때에도 그것이 그 자리에 있음을 알게 되는 것만으로도 좋다. 이따 돌아오는 길에 힘들면 저기서 잠깐 쉬어가야지. 바로 저기 등을 기대고 앉아 멀리 저물어가는 해가 세상을 주홍빛으로 물들이는 걸, 빛을 머금은 강물이 반짝이는 걸 지켜봐야지. 머릿속에 저기서 쉬는 장면을 그려보는 것만으로도 훈훈해진다.








가을의 하루는 서울에 온 엄마 아빠와 서촌을 걸었었다. 어쩐지 바빠서 단풍구경을 못했다기에 아쉬운 대로 통인시장을 지나 청와대 앞으로, 경복궁 옆길로 빙 둘러 나무를 보며 걷다 국립현대미술관에 들렀다. 예술은 잘 모르지만 미술관에서 작품을 들여다보는 건 마치 고요한 우주에서 푸르게 빛나는 지구를 바라보는 것 같은 경이로움이 있어 좋아하는 일. 그런데 어느 그림 앞에선 조금 오래 있었나 싶어 둘러보면, 어느 순간부터 자꾸만 아빠가 없어졌다. 관람관이 여러 개라 헷갈릴 텐데 어딜 간 거지, 순간 목을 길게 빼고 두리번거리며 찾으면 오디오나 비디오를 감상하는 코너 혹은 복도 어딘가 놓인 벤치에서 아빠가 날 보고 눈을 맞췄다. 이럴 수가. 성격은 급하고 행동은 둔한 아빠가, 길눈이 어두운 나의 아빠가 이토록 빠르고 정확하게 곳곳에 놓인 벤치를 찾아낸다는 게 놀라웠다.



벌써 세 시간 가까이 쉼 없이 걸었으니 다리가 무거울 게 뻔한데, 그걸 알면서도 섭섭했다. 기껏 데려왔더니 그림은 안 보고 앉을자리만 찾는 것 같았다. 솔직하게 힘들다, 쉬어 가자 했음 나을 텐데 물어보면 괜찮다고만 하는 것도 짜증이 났다. 고향집에는 없는 미술관, 내가 좋아하는 이 곳에 부모님 서울 오시면 꼭 같이 와야지 했던 건 내 욕심이지 역시 어른들 취향은 아니구나, 내 다신 같이 오는가 봐라 하는 마음이 욱 하고 솟았다.



주말이 지나 엄마 아빠가 내려가고 손님용 이불을 정리하는데, 마음이 영 불편했다. 나는 왜 아빠가 앉을 자릴 찾아다니는 게 그렇게 싫었을까. 그냥 좀 같이 쉬었다 가도 좋고 다 둘러보지 않아도 괜찮은데, 마음은 왜 배배 꼬이고 퉁퉁 불었던 건가. 시간이 지나 기억에 남는 건 어제 어떤 작품을 보았는지가 아니라 부모님과 미술관을 구경한 날의 잔상일 텐데 나는 왜 또 그랬을까.





마음이 복잡해져 한강을 걸었다. 내 앞에 하얀 강아지를 산책시키던 아저씨가 방향을 틀어 ‘OO야, 여기 앉았다 가자’하더니 강가의 벤치에 앉았다. ‘아구구’ 어느 나이 때가 되면 앉고 설 때 모두가 갖게 된다는 효과음이 들렸다. 강아지처럼 솜털이 소복한 갈대가 부드러운 바람을 따라 고개를 흔들었다.


 곳을 걸을 때처럼, 쉼이 필요한 때를 알고  곳을 찾아 쉬면서 계속 나아가는  삶의 지혜일까. 젊고 어리석은 나의 열정보단 틈틈이 벤치를 찾는 아빠의 지혜가 세상을  많이 경험하게 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다음번엔 더 잘해줄 수 있을 것 같다. 추상화라는 감상평을 수십 번 했던 것 같은 그 날과 같은 날이 또 와도, 어딘가 알 수 없는 벤치에 숨은 그림 찾기 하듯 자꾸만 앉아 있어도, 혹은 더 자주 쉬고 더 하품을 하고 더 빨리 배부르고 더 빨리 배고파져도 우리는 또 미술관에 함께 갈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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