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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학 Nov 18. 2015

그 사람, 순자

순자는 전국칠웅戰國七雄 중 조趙나라(BC 403-BC 228) 사람이다. 이름은 황况이고 자字는 경卿으로 손경孫卿으로 불리기도 한다.

순자의 생몰 연대는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그의 생이 기록된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와 유향劉向의 <손경신서孫卿新書>, 후한後漢의 응소應劭가 지은 <풍속통의風俗通義>를 참고하면 대략 BC 323년 경에 출생한 것으로 전해진다.

순자의 사망 연도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나 <순자>에 등장하는 인물인 초楚나라 춘신군春申君(?-BC 238)의 사망 후에도 활동했기 때문에 대략 90세 전후까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긴 학문 연마, 짧은 공직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에서는 순자가 만학을 하여 50세가 다 되어서야 제나라 직하稷下에 가서 자신의 학문을 강연하기 시작했다고 기록된다.

하지만 전목錢穆(1895-1990)이 <선진제자계년先秦諸子繫年>에서  <풍속통의>에 따라 활동 개시 시기에 대해 사마천의 <사기>에서 말하는 50세는 15세를 잘못 기록한 것으로 밝히고 있다.

순자는 20세를 전후로 하여 연나라로 벼슬을 하러 갔지만 등용되지 못하고 35세 쯤되어 직하로 돌아와서 20여 년간 머무른다.

52세가 되어서야 춘신군의 간청으로 초나라 난릉령蘭陵令에 임명이 되었다. 하지만 춘신군의 죽음과 함께 면직되어 다시 직하로 돌아온다.




직하학궁 역사상 '최고의 학자'

57세쯤 직하로 돌아온 순자는 제양왕齊襄王의 직하 회복과 동시에 가장 뛰어난 학자로 인정을 받았다.  

그의 나이 60세 가까이 되어 직하학궁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학자인 동시에 지금의 대학 총장에 해당하는 직하학궁의 좨주祭酒를 3번 역임하게 된다.

좨주를 3번 역임했던 기록은 직하학궁의 설립 이후 최초이자 마지막이다. 직하에 머물렀던 기간에 그를 능가할만한 학자가 없었음을 의미한다.




한비, 이사, 부구백

그에게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유명한 제자들이 있는데 한비韓非, 이사李斯, 부구백浮丘伯이 그들이다.

한비는 후에 저서인 <한비자韓非子>를 남김으로 법가法家를 완성하게 된다. 하지만 순자의 지도 하에 함께 학문을 하였던 이사의 모함으로 진시황秦始皇은 그를 옥에 가두고 사약을 내림과 동시에 자살하여 생을 마감한다.

이사는 순자의 학문에 매료되어 수제자 중 한 명이 되었지만 야망가로서 후에 순자를 떠나 진秦나라로 가게 된다. 그에 대한 많은 비판이 있지만 진나라를  통일시킨 역사상 가장 뛰어난 전략가 중 한 사람 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도리어 자신의 야망에 걸려 넘어져 죽음을 맞게 된다.

부구백 역시 순자의 뛰어난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순자의 동생이라는 사료도 있으나 정확하지는 않다. <춘추곡량전春秋穀梁傳>과 <시경詩經>에 밝았으며, 순자의 학문을 계승하는데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였다.




직하稷下는 '성벽 아래' 라는 의미로 도읍의 서벽, 즉 직벽 앞에 제환공齊桓公에 의해 세워진 캠퍼스와 같은 학문의 마을이다. 직하는 후에 제자백가諸子百家라고 불리는 선진先秦시대 학문들의 보금자리로서 직하학궁稷下學宮이라 부르기도 한다.
직하에 들어오는 학자에게는 제齊나라에서 큰 집과 생활비까지 해결해 주었기 때문에 중국 내의 수많은 학자들이 몰려들어 가장 융성하였던 시기에는 1만 명에 이를 정도였다.


* 위 내용의 일부는 채인후蔡仁厚의 저서인 <순자의 철학>(천병돈 역,예문서원, 2009)을 인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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