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위위 ouioui Sep 04. 2020

바람에 실려오는 치킨 냄새에

치킨 하나의 추억과 치킨 하나의 사랑, 그 향수병...

 7월의 한여름. 동네 산책 중 가을바람같이 선선하고 산뜻한 바람에 문득 치킨 냄새가 실려왔다.

시장이나 골목길에서 한 번쯤은 맡아봤을, 우리 한국인에게 익숙한 그 향이다. 갓 튀겨낸 치킨의 냄새를 완벽히 재현한 향수가 있다면 선주문하여 구매할 의사도 있는 나에게 갑자기 왜 이러시나요. 어라. 코 끝이 시큰해져 온다.

치킨 냄새에 눈물 바람이라니..

튀긴 닭요리는 세계 어느 곳을 가도 다양한 조리법의 변주만 있을 뿐 흔하디 흔한 것인데, 한국인에게서만 포착될 수 있는 고유한 한국의 프라이드치킨 향이 분명 있다. 그 정겨운 고향의 냄새를 시카고 도심 한복판에서 맡고선 코를 킁킁, 벌름거리며 눈물을 글썽이는 사람이 된 것이다.


향수병이란 이런 것인가 보다. 잘만 살고 있는 것 같은데 갑자기 익숙한 냄새 하나에도 눈물을 툭, 하고 떨굴 수 있는 것. 결혼하고 미국에서 살게 되기 전에는 '향수'라는 예쁜 이름에 '병'이 붙은 이 단어를, 이 ‘병명’을 내가 너무 얕게 보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서울에서 아등바등 살아가던 나에게는 해외에 사는 한국인들의 모든 얘기들이 너무 멀어서 환상이 조금 첨가되어 들렸던 이유도 있다.

대학생 시절 읽었던, 1세대 조기유학생 홍정욱의 유학 성공 스토리를 담은 베스트셀러 <7막 7장>이 생각난다. ‘케네디 대통령’이니 ‘초우트 로즈마리 홀 사립고등학교’니 ‘하버드’나 ‘보스턴’ 같은, 이국의 폼나는 고유명사들의 위엄에 그의 고통스러운 노력이 가려진 것도 모자라 후광까지 얹혀 보이기만 했다. 또한 미국 이민 1세대들의 찐한 해외 정착기는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찬란한 이름에 희석되어 ‘대단한 분들이시네.. 나도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을 뿐 그이면의 절절한 피눈물까지는 보지 못했다. 그 이민 1세대들의 자녀들은 유창한 영어실력과 자유분방한 분위기에 ‘2세’라는, 뭔가 귀족적인 느낌을 주는 타이틀, 게다가 ‘교포’라는 칭호까지 더해져 왠지 가까이 갈 수 없는 다른 세상의 사람들 같기도 했다. 압구정 로데오의 상권이 아직 살아있던 시절, 방학이 되어 한국에 온 십 대 여자 아이들이 영어로 대화하며 지나가는 것을 보고 왠지 모르게 주눅이 들었던 적도 있다. 그만큼 나에게 있어 해외생활을 하는 한국인들이 입 모아 말하는 향수병은 나에게 너무 멀리 있어서 그 어감만큼이나 가볍고, 때론 폼나는 것이기까지 했다.

한 번 출국하면 6일간은 해외를 돌아다녀야 했던 승무원이 되고서는 간헐적으로 느끼는 그리움을 향수병이라 착각하여 그 깊이를 제대로 몰랐던 것도 있다. 쉬고 싶으면 쉬고, 나가고 싶으면 나가서 관광하고.. 외롭지만 자유로웠다.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들과 따뜻한 엄마 밥이 기다리는 서울 집에 반드시 돌아간다는 것을 알았던 점에서 그때 느꼈던 외로움이나 고독은 어쩌면 감미롭기까지 한 것이었다.

길 가다 소나무 향을 맡고서 눈가가 촉촉해진 적이 있나요? 나는 있다. (치킨 냄새보다는 그래도 좀 괜찮아 뵌다.) 아이와 개를 데리고 산책하던 어느 아침, 불현듯 익숙한 소나무 향이 나서 놀라 멈춰 섰다. 이십 대 중반에 집 근처 작은 카페에서 천 원짜리 커피를 사서 그 길 건너 선정릉에 천 원을 내고 들어가 숲 길을 걸으며 힘든 시기를 이겨내던 때가 갑자기 소환되었다. 시카고 도심에서는 웬만해선 소나무를 찾기 힘든데, 어느 돈 많은 건축 회사가 정원에 두어 그루 심은 소나무였다. 안타깝게도 반쯤 죽어있는 상태였는데, 그럼에도 고고하고 은은한 향을 내뿜어 주었다.


한국에서는 위용 있게 사시사철 푸르기만 한 너였다. 그런데 여기서 본 너는 여러 방향으로 뻗은 가지들 중 왼쪽 윗부분은 아직 살아있으나 나머지 잎들은 회갈색이 된 채 바싹 말라 땅에 흩뿌려져 있었다. 아픈 몸으로 눈치 보며 다른 나무들 뒤에 서있는 느낌. 백두산의 호랑이가 미국 동물원에 갇혀 힘 없이 축 늘어진 채로 관람객을 쳐다보는 느낌.


타지에서 뿌리내리며 산다는 건 반은 살아 있고 반은 죽은 채로 그러나 괜찮은 척, 아니 실제로 꽤나 괜찮게 살더라도 그저 살아있는 반쪽의 힘만으로 삶을 이어가는 것일까. 그러니까 어린 시절부터 타지에서 살게 되었거나 아예 이곳에서 태어난 한국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지만. 아무튼 소나무야, 버티렴. 시린 겨울이 오고 다른 나무의 잎들이 다 떨어졌을 때에도 너의 푸른 반쪽은 여전히 남아있을 테니.


나는 가끔 내가 한국에서 살 때의 사진들을 보거나, 친구들의 근황을 SNS에서 보게 되면 꼭 죽은 사람이 살아있는 사람들을 보는 것같은 눈을 하게 된다. 아이러니하다. 지금 난 충분히 행복한데. 서울에서의 나도 그리 행복하지는 않았는데. 고통과 회한으로 가슴을 치며 밤을 하얗게 새우던 날들도 많았는데.. 유명한 성경 구절이 떠올랐다.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the old has gone, the new has come

옛사람은 죽고, 새 사람이 태어난다ㅡ 이 말은 나에게는 기적처럼 들린다. 나에게도 기적이 일어날까? 서울에서의 나는 성실한 직업인이자 시민이었지만, 엄마도 포기한 망나니였던 적도 많았다. 옛 사람의 내가 심연 밑으로, 밑으로, 더 밑으로 침잠하여 마침내 새 사람으로 다시 태어날 수만 있다면 향수병이 쏘아올린 기적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바람에 실려온 치킨 냄새에 문득 느끼는 향수의 무게, 이쯤이면 더 이상 가볍게 느껴지지 않는다. 향수병을 앓는다는 것은 타국에서 살아있는 내가 고향땅에서 살던 나를 애도하고 추모하는 이상하고 묘한 체험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어두운 바다 밑바닥의 슬픔을 딛고 다시 수면 위로 올라오면 그땐 예전의 나와는 조금 다른 모습일 것이다. 바라건대, 새 버전의 나는 조금 더 성숙하고 나다운 인간이길.







난 지금 치킨이.. 땡긴다.


이전 01화 내가 사는 동네에는 비둘기가 없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