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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위 ouioui Oct 29. 2022

내가 사는 동네에는 비둘기가 없다

평범한 서울 여자가 이방인이 되는 과정

가장 오래된 기억이 존재하는 시점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한 동네에서만 자란 사람에게 이방인이 된다는 것은, 멀쩡하게 잘 쓰던 팔다리를 갑자기 못 움직이게 된 걸 깨달은 자의 혼란스러움과 고통을 동반한다는 것을 꽃들이 만발하던 결혼식 날에는 몰랐다.



끔 내가 고국을 떠나 멀리멀리 날아온 비둘기 같다는 생각을 한다. 같은 비둘기가 아닌 철새들 중 하나와 사랑에 빠졌고, 그의 무리들을 따라 열심히 날아가 정착한 낯선 곳에서 나는 철새가 아니라는 이유로 덩그러니 남겨진 기분이 드는 것이다. 사랑을 찾아 도착한 곳에서 다행히 사랑은 찾았으나 그 대신 이방인이 되었다.


   미국으로 떠난 후 3년 만에 한국에 들어갔다. '귀국'이 아닌 '짧은 여행'이 목적이었다. 다시 나를 만난 모든 사람들이 친절했다. 마치 철새 따라 간 비둘기가 잊지 않고 돌아와 주었다는 듯이. 심지어 전 세계 똑같은 매뉴얼의 서비스인데도 한국 스타벅스의 직원들이 더 상냥하다고 느꼈는데, 그건 아마 '같은 인종'의 사람에게 '모국어'로 응대를 받아 그랬던 것일 테다.


  많은 것들이 그대로였다. 그러나 대리였던 친구는 과장이 되었고, 사내 디자이너로 일하던 친구는 작은 디자인 회사를 차려 사장이 되었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더 큰 사옥으로 옮겨 입이 딱 벌어지는 퀄리티의 구내식당을 자랑했다. 승무원 친구들은 여전히 하늘을 날며 높은 연봉을 받았고, 아줌마가 된 내가 보기에 그녀들은 너무 화려한 생활을 하는 것 같았다. 몇 년 전까지 나도 그렇게 살았던가. 예쁜 그녀들이 쉴 새 없이 웃고 떠드는 술자리에서 나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 꿈인 듯, 전생인 듯했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김중식, <이탈한 자가 문득> 중에서.  문학과지성사


 나는 궤도를 이탈한 것이었다. 그것을 결혼 후 3년이 지난 후에야 뼈저리게 깨달았다. 그들이 정해놓은 어떤 사회적 기준 안에 더 이상 속하지 않는 나에게 사람들은 아무런 경쟁의식도 위기의식도 느끼지 않았다. 그때는 그저 반가움에서 오는 다정함이라고만 생각했다. 물론 그들 입장에선 그랬을 테지만, 서식환경이 변해 내면세계가 흔들리던 나는 한국 여행 후 몇 개월이나 지난 시점에서 패배의식 같은 게 올라오는 걸 느꼈다.


  20대에 꿈과 사랑을 좇아 내 방식대로 치열하게 살아낸 것은 그저 열심히 한 삽질이었다, 고 생각되었다. 오랜 무명시절을 견뎌 결국 성공한 미스터 트롯의 우승자들이나, 노동량에 비해 짠 월급을 받으면서도 꿋꿋이 회사생활을 견디며 사회적 직함을 유지하고 있는 직장인이나, 작가가 된 언더그라운드의 뮤지션이나,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투잡 쓰리잡을 해가며 꾸준히 책 읽고 글 쓰다 '무언가가 된'사람들이 부러워졌다. 버티고 버텨 음지에 핫플레이스를 구축한 이들이다.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는 제쳐두고 그저 양지에서 부모님께 걱정 안 끼치고 살고 싶었고, 머리를 굴려 나름대로 그때그때 최선의 선택을 했다.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더니 내가 딱 그 모양이었다. 결과적으로 커리어를 만들고 전문가로서의 인생을 쌓아 올리는 데 실패했다.


 15 , 10 , 5 , 3 전에  총알들이 이제야 한꺼번에 날아와 박힌  '현타' 왔고, 마음 소란한 날들이 계속되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내가  얼마나 잘못한 걸까. 물론 나의 현재 삶은 감사할 부분이  많기 때문에 누군가 보면 한심하다 여길 수도 있었다. 엄살처럼 보일까 남에게 말도  하는 것이 '보이지 않는 실패' 대한 몸살이었다. 그러나 모든 실패가 그러하듯 그것은 새로운 국면을 제공했다.


   고장 난 물건도 고쳐 쓰지 않는 나와 달리 남편은 나를 고쳐 쓰려는 노력을 했다. 퇴근 후 직접 장을 봐서 맛있는 음식을 해주었고, 운동 PT쌤이 되어주었고, 몇 시간이고 얘기를 들어주었고, 자기 전에 진심 어린 기도를 해주었다. 모태신앙임에도 한 번도 만나주지 않으시던 신은 몇 권의 책을 통해 반복적으로 같은 메시지를 주면서 내게 말을 걸어 주었고, 기도의 응답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두운 터널 속에서 글쓰기라는 출구가 열렸다. 한국에서도 일기 정도는 썼었지만 읽고 쓰는 것 말고도 재밌는 게 너무 많았다. 잘 시간을 쪼개서 글을 쓸 만큼 열심히 사는 타입도 아니었고, 별로 할 얘기도 없었다. 그런데 이젠 어쭙잖은 문장이나마 써 내려가며 나라는 인간을 해체/ 재조립 중이다. 그 과정에서 나는 조금씩 치유되며 진짜 나를 만나가고 있다.


  궤도를 이탈한 자의 정신승리라고 하거나, 니가 힘들었다니 그것 참 쌤통이라고 해도 할 말 없다. 하지만 나는 어쨌든 성공과 실패가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있어 얄궂은 삶의 이면들을 돌아보며 '쓰는 연습을 하고' '살아가고' 있다.


 내가 사는 동네에는 비둘기가 없다. 가끔 발코니에서 갈매기 두어 마리가 빌딩 사이를 위용 있게 나는 모습을 보거나, 산책할 때 참새들이 짹짹거리며 버려진 빵조각 따위를 쪼아 먹는 것을 보는 정도다. 대도시인데도 조류 도감에서나 볼법한 새들도 가끔 보인다. 그러다 얼마 전 딱 한번, 길에서 윤기 나는 비둘기 한 마리를 목격하고서 그제야 그들이 이곳에선 좀처럼 보이지 않았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반가웠다. 어릴 때 쌀집 앞을 걷다가 날아가는 비둘기에게 뺨을 맞은 이후 트라우마까지 생겼던 나는 때아닌 반가움에 당혹스럽기까지 했다.


  한국 비둘기들은 개체 수가 너무 많아 당돌해 보일 때도 있었는데, 녀석은 홀로였고 처음엔 좀 외로워 보였다. 그러나 계속 노려 보자니 그 비둘기는 차라리 고고해 보였고, 당당해 보이기까지 했다.

무리를 떠나 무려 혼자서 대륙을 건너고 건너 여기까지 왔다는 듯이. 너는 이제 또 다른 궤도를 형성하며 너만의 우주를 만들면 될 일이라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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