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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나B May 04. 2024

바람이 동력, 세일보트에서의 첫 항해

거짓말을 살짝 보태서 12개월 중 9개월은 비가 온다는 밴쿠버. 레인쿠버라 불릴 정도로 비가 많이 오는 밴쿠버에서 화창한 날씨는 몹시 소중하다. 나 또한 날씨가 좋으면 겨울에도 민소매 스웨터를 입고 해가 가장 잘 드는 길가에 앉아 점심을 먹거나 햇살을 따라다니며 산책을 한다. 때로는 어떻게, 얼마나 햇볕을 잘 즐기는지가 가장 중요한 의무사항이 된다.


구름이 잔뜩 낀 하늘 개고 비가 그치자 "유레카!"를 외쳤다. 마침 월요일까지 휴일이라 3일의 짧은 휴가를 얻은 우리는 자주 오지 않을 이 기회를 놓치지 않기로 했다.


"보웬 아일랜드에 가봤어? 거긴 밴쿠버에서 아주 가까워. 이번 주말에 보트 타고 거기로 갈까?"

"어! 너무 가보고 싶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T의 제안에 흔쾌히 응했다. 보트를 타고 섬으로 이동한다니. 보트에서 햇살을 즐기겠구나! 시작도 하지 않은 여행이었지만 이미 내 머릿속에서 파란 하늘 밑에서 하늘하늘 스치는 바람을 타고 항해를 시작하였다.  


따갑게 내려쬘 햇살에 나는 반바지와 민소매 탑을 챙겨 입고 보트에 올랐다. 밴쿠버에서 보웬 아일랜드를 가는 거리를 찾아보니 15Km. 페리로 가면 단 20분이면 도착한다고 적혀있었다. 넉넉히 잡아 30분 걸린다고 치면, 이거 너무 짧은 항해가 되는 거 아니야?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아쉬워하는 나에게 T는 2시간 정도 걸릴 거라고 말했다.


아니, 15km가 두 시간 걸린다고?


반은 농담이겠지 하는 생각으로 자리에 앉았다.


'덜덜 덜덜' 엔진 소리가 들리고, T는 보웬 아일랜드를 향해 보트를 출발시켰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나에게 T는 윌(운전대)을 잡고 보트를 조정해 보라 했다. 그리고 속도계, 수심측정기, 풍향 측정기, GPS와 나침반을 보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서서히 보트를 조정하는 법에 익숙해지고, 긴장이 풀리면서 주위가 눈에 들어왔다. 자주 가던 해변이 보였다. 해변에 앉아 보던 풍경과 보트에서 해변과 바다를 바라보는 전망은 확연히 달랐다. 사람과 개로 북적거리는 해변과 달리, 우리 둘만이 존재하는 보트 위에서 바라보는 바다는 더 평화롭고 더 아늑해 보였다.



앞을 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운전해 나가는 곳이 길이 되고, 닻을 내리는 곳이 집이 되는 마법 같은 현실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속도계를 보니 속도가 4노트라고 적혀있었다. 4노트라면 시속이 몇 인 거지? 처음 보는 수치였지만 뒤로 물러나는 주변을 바라보며 시속 30km는 되겠구나 짐작했다. 너무 빨리 도착하는 거 아니야? 하고 인터넷으로 속도를 검색해 보니 4노트는 무려 시속 7.41km! 빠르게 걷는 속도와 맞먹는다. 나도 모르게 '허허'하고 헛웃음이 났다.


주변에 다른 보트들이 보이지 않자, 캡틴 T가 나에게 바람이 부는 방향으로 보트를 조정하라고 지시했다. 무엇을 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시키는 대로만 하던 나는 잠시 후 그가 왜 바람이 부는 쪽으로 배를 돌리라고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세일보트의 가장 큰 매력은 연료 소모하지 않고 바람의 힘으로 움직인다는 것. 바람의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해 뱃머리가 바람이 부는 곳으로 향하자, T는 메인 세일(마스트/돛대에 부착된 돛)을 올리기 시작했다. 15미터에 달하는 메인 세일이 끝까지 올라가자 나도 모르게 아, 탄성이 나왔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재빠른 동작으로 집세일(뱃머리에 부착된 돛)을 펼친 T는 바람을 따라 보트를 조정한 후, 엔진을 껐다.


메인 세일이 푸른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쏴아아...... 쏴아아......



순식간에 정적이 찾아오고, 남은 건 오로지 얼굴을 스치는 바람과 보트가 가르는 물살 소리였다. 거대한 보트가 마치 바다에 사는 생명체처럼 물 위로 미끄러져 나아가고, 보트의 미세한 흔들거림이 나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나는 그녀의 일부가 되어 함께 항해를 시작했다.



* 전통적으로 보트는 여성 명사입니다. 일반적으로 보트를 말할 때는 'She/그녀'라고 표기합니다. 하지만 ‘He/그’라고 칭해도 무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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