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년 시절 학대를 당한 적은 없다. 정서적 학대를 아주 넓게 해석하면 또 뭐 혹시 모르겠지만 최소한 2000년 기준 이전의 상식으로는 모두 상식선에서의, 여느 성장기에는 대부분 겪을 그런 일들만 있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아버지에 대한 공포는 매우 뚜렷이 있다. 맞은 적도 없는데 아버지는 매우 무서운 존재였다. 그저 부자 관계의 특수성에서 나오는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 실제 강인한 성격, 힘과 체격, 무겁고 강한 언행 등이 그랬다. '인자강'이라는 말에 빗대자면 인자무 정도랄까.
내가 성인이 된 후 은퇴하신 아버지는 몇 년의 기간을 알콜중독 상태로 빠져들어가서 최악의 모습을 유지했는데, 그 몇 년은 폭력의 시간들로 폭발할 것 같은 긴장감들이 항상 집안에 가득했다. 낮도 밤도, 주말도 평일도 없었다. 그 기간의 반은 부모님과 같이 살았고 반은 따로 살았는데, 따로 살았을 때마저도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면 그 공포의 굴에 불려와 아버지의 분노를 겪어야 했다.
아버지는 말도 안 되는 상황들을 만들었다. 아랫집에 문 앞에서 취한 채 자거나, 뭘 어떻게 했는지 당했는지 모르게 어디가 찢어져서 외상을 입고 들어오기도 했고, 술집이나 포장마차 문 닫을 시간까지 술 마시다 쓰러지듯 잠에 들어 연락이 오기도 했다. 그렇지만 오해는 하지 말자. 아버지는 그렇고 그런 놈팽이나 시정잡배가 아니라 소위 엘리트, 실제로 자수성가한 지성인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술 취한 아버지는 가끔은 형과 죽일듯이 싸웠다. 한 번은 엄마의 연락을 받고 극한의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혀 과속해서 집에 갔는데 집 바닥엔 깨진 술병에 거실과 주방 여기저기 피가 흥건했고, 피 흘리는 형이 취해 행패를 부리는 아버지의 팔을 꺾어 냉장고에 처박듯 몰아붙여 겨우 제압하고 있기도 했다. 그 때 아버지는 계속 형에게 '저 놈 새끼 죽여버리겠다'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잊고 싶은 기억이지만, 몇 년의 고생 끝에 결국엔 모두 해결되었다. 갑자기 없었던 일처럼.
그런데......
문제는 그로부터 몇 년의 기간이 지나고 사작되었다.
희로애락, 성공 열매와 실패의 쓴맛을 여러 차례 반복적으로 겪는 어른의 시간이 10년, 15년, 20년이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내가 큰 불안에 휩싸이거나 매우 힘든 시간을 보낼 때, 내가 좌절의 문턱에서 아둥바둥 하고 있을 때면 꼭 악몽을 꿨다.
그 악몽은, 형이 나를 위협하고 공격하고 아버지는 나를 죽이려고 달려드는 악몽이다.
형과 아버지.
그렇다. 전에 글을 쓴 적도 있지만 나의 유년기는 형의 물리적 학대 기간이었다.
그 꿈은 너무나도 현실적이어서, 어떨 때는 소리를 지르며 깨고, 어떨 때는 큰 소리로 욕을 하며 벌떡 일어나고, 어떨 때는 심한 식은땀에 젖은 채 눈을 뜬다.
매번 먼저 형이, 나중엔 아버지가 나를 죽이려고 달려든다. 꿈은 항상 나중이 더 잔상이 짙게 남는지라 형은 아버지에 가린다.
실제로 아버지에게 맞은 적은 없지만 그런 흉폭한 얼굴은 꽤 보았고, 성인 된 후 딱 한 번 '마동석 펀치'가 눈앞에서 휭 하고 지나간 적이 있는데 그 순간의 아버지 얼굴, 표정은 잊히지 않는다.(그 펀치에 맞지 않았던 건 역시 아버지가 취해서 달려들며 날렸는데 내가 뒤로 피했기 때문이었다.)
성인이 된 후의 일이었고 딱 한 번이었지만, 직접적이 아니더라도 간접적, 정서적 학대는 10년 20년이 되어서도 문득문득 나타나서 아버지를 심정적으로 멀리하게 만든다.
사실 그 이후로도 내가 인생의 최악의 시기를 겪을 때면 아버지는 맨정신에도 항상 그런 벼랑 끝에 겨우 서 있는 나에게 어마어마한 분노를 쏟아냈다. 그저 딱 한 마디가 필요한 순간에도 한 번도 공감 속 응원이나 위로를 받아보지 못했다. 어쩌면 이게 더 큰 트라우마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 쉽게 이민이란 걸 했는지도 모른다. 성인이 되고 자립한 이래 가족이 실제로 의지가 되는 일은 없었으니까.
하여튼, 마흔 넘은 자식의 이 악몽 얘기를 들으면 어쩌면 이제 여든을 앞둔 아버지는, 나를 한 대도 때린 적이 없는 아버지 당신은 억울하실지도 모르겠다. 나의 공포의 기억들 속의 당신 모습은 어쩌면 다 잊으셨거나 기억도 못하실테니.
극복은 나의 몫이다.
불안에 빠지는 시기를 겪지 않을만큼 인생을 잘 헤쳐나가거나, 그런 불안에 잠식되더라도 악몽을 꾸지 않을 수 있게 트라우마를 극복해내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