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에 곁들이는 이야기
결혼식이 2달 앞으로 다가왔다. 친구들 결혼식이야 기꺼운 마음으로 가서 박수 실컷 쳤지, 일 벌이는 게 평생 질색인 내가 잔치를 벌이자니 못할 짓이다. 특히나 돈 나갈 일은 어쩜 끝이 없는지. 수십 수백만 원이 왔다갔다하니 ‘그 정도 추가금이야’ 허허 웃다가 ‘피땀눈물 내 돈’ 엉엉 울다가 정신줄을 놓기 십상이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돈을 아끼는 선택이 옳은 것이었다. 하지만 후회 없이 즐겁게 쓰는 돈도 있다. 최측근(=새신랑)과 외갓집을 처음 찾아뵐 때 드릴 선물 값이다.
어린 시절 우리 집은 가난했었다. IMF때 크게 망했다는 뻔한 이야기다. 마당에 푸세식 화장실이 있는, 밤에는 오줌을 참는 게 당연했던 집에 살았다. 그야말로 먹고 죽을래도 없는 수준의 가난이었다. 그럼에도 굶을 걱정 하지 않았던 건 집에서 10분 거리인 외갓집의 도움 덕분이다. 성실함의 표본인 외삼촌, 손이 크고 살가운 외숙모, 계절마다 직접 키운 햇과일과 곡식을 한가득 전해주시던 분들. 설이며 추석마다, 새로운 학교에 진학할 때마다 챙겨주신 두둑한 용돈도 기억난다.
그런 도움이 평범하지 않았다는 건 내가 돈을 벌고서야 알게 되었다. 나 한 몸 먹고 사는 것도 이렇게 힘든데. 부모님을 모시며 자식들을 키우던 외삼촌네는 돌려받을 가망 없는 것들을 어떤 마음으로 나눠주었을까. 이따금 천장에 쥐가 들어와 쿵쾅거렸지만 빚쟁이들만큼은 들어올 틈이 없던 시골 집. 빚을 지고 도시에서 쫓겨나온 우리에게 그 집을 내어준 것도 그분들이었다는 건 몇 년 전에야 알았다. 그걸 다 빚으로 달아둔다면 나는 평생 갚지 못할 것이다.
나이를 먹고서야 알게 되는 빚이 있다. 갚기엔 너무 큰 빚, 마음으로 갚아야 할 빚.
박완서 작가의 에세이집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를 읽었다. 2002년 출간된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가 새로운 옷을 입은 것이다. 몇 달 전 나온 책을 표지만 바꿔 생색 내는 건 질색이지만, 이렇게 오래 읽혀야 할 책이 세월의 무게를 덜어내고 다시 나오는 건 갈채를 보낼 일이다. 심지어는 미출간 원고 한 편도 더해졌다.
한국문학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박완서라는 이름이 마음에 울릴 것이다. 나는 그의 작품에서 시대와 재미를 함께 읽어 왔다. 어디 소설 뿐인가. 에세이에서는 인생의 묘미를 알려 준 선생님이기도 하다.
이 에세이집에 실린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는 나의 인생 에세이 중 하나다. ‘가끔 별난 충동을 느낄 때가 있다. 목청껏 소리를 지르고 손뼉을 치고 싶은 충동 같은 것 말이다.’ 로 시작하는 이 에세이는 장면장면이 내 마음 속에 깊이 자리잡혀 있다.
(…) 나는 그런 표정을 생전 처음 보는 것처럼 느꼈다. 여직껏 그렇게 정직하게 고통스러운 얼굴을, 그렇게 정직하게 고독한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가슴이 뭉클하더니 심하게 두근거렸다. 그는 20등, 30등을 초월해서 위대해 보였다. 지금 모든 환호와 영광은 우승자에게 있고 그는 환호 없이 달릴 수 있기에 위대해 보였다. 나는 그를 위해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내가 좀 전에 그의 20등, 30등을 우습고 불쌍하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그도 자기의 20등, 30등을 우습고 불쌍하다고 생각하면서 옛다 모르겠다 하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리면 어쩌나, 그래서 내가 그걸 보게 되면 어쩌나 싶어서였다.
어떡하든 그가 그의 20등, 30등을 우습고 불쌍하다고 느끼지 말아야지 느끼기만 하면 그는 당장 주저앉게 돼 있었다. 그는 지금 그가 괴롭고 고독하지만 위대하다는 걸 알아야 했다.
나는 용감하게 인도에서 차도로 뛰어내리며 그를 향해 열렬한 박수를 보내며 환성을 질렀다.
- 박완서,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에 수록된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중
나는 한 줄 자기소개가 필요할 때마다 ‘크게 박수 치는 사람’이라고 쓴다. 2022년, 광화문 광장에서 멋진 태권도 시범을 보고 실컷 박수를 친 다음부터였다. 크고 벅찬 마음을 담아 멋진 사람들을 응원하고 싶다, 따뜻한 마음을 가장 마지막까지 뜨겁게 전하고 싶다, 그런 마음으로 박수를 치며 떠오른 문장이었다. 그런데 그 박수의 씨앗은 아주 오래 전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를 읽었을 때 심어진 게 아니었을까.
갚지 못할 빚을 지며 살고 있다. 백화점 과일 선물세트, 감사를 담은 글 한 편으론 어림도 없는 마음의 빚. 그 빚에 이자라도 조금 갚고 싶어 명절을 챙긴다. 몇 번이고 글을 고쳐 올린다.
*출판사에서 소정의 원고료를 제공받았지만, 일체의 수정 없이 솔직히 작성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