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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Mar 15. 2024

흙수저 퀘스트 ~세계수의 끝을 찾아서~

여기 한 용사가 있다. 귀속 아이템은 내구도 1짜리 흙으로 만든 수저. 천장에 쥐가 뛰어다니고 하수구에서 지네가 튀어나오는 곳에서 자란 그에게 어울리는 것이었다. 다행히 그에게는 이곳에서 벗어나겠다는 투지가 있었다. 17살에 집을 나와 하급 용사 양성소에 들어갔고, 요원해 보이던 수능 퀘스트를 턱걸이로 달성하며 20살에 뒤앙민크 수도 소울에 자리잡게 된다. 자신의 흙수저를 대지의 기운이 깃든 가문의 골동품이라며 허세를 부린 것이 잘도 먹혀든 덕일까. 눈 감으면 코 베어 간다던 그 도시에서 용사는 어떻게든 살아남았다. 지금부터 많은 용사들이 등장하니, 오늘의 주인공인 이 용사를 과거에 용맹을 떨친 자, 줄여서 전 용사라고 하자.


전 용사는 영혼이 깊은 용사를 만나 성혼의 맹세를 하게 되었다. 성혼식을 앞두고 과거에 함께 했던 길드원들을 만나 소식을 알렸다. 만나서 식사 대접하고 초대장 줄게. 중급 용사 양성소부터 스타트업 던전까지, 크고 작은 여러 길드를 거친 덕에 만날 사람이 많았다. 전 용사는 자신의 주위 용사들이 뛰어난 자라는 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저마다의 퀘스트를 달성하는 데 충실하면서도, 동료 용사가 뛰어드는 퀘스트 또한 존중하는 선 성향 용사들. 오랜만에 만나는 용사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들에 대한 평가는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딘가 달랐다. 이제 수십 명의 용사들은 저마다 세계수의 다른 부분을 보고 있었다. 누군가는 하늘로 끝없이 뻗어나간 가지의 끝을 찾고, 누군가는 지하로 뻗어나간 뿌리에 발이 걸리지 않는 것으로도 벅차했다. 가문의 선대 용사들 덕에 명망 있는 다른 나라에서 유학한 어떤 용사는 "나도 곧 성혼식을 치르고 여러 용사를 양성하려 하는데, 내가 흙수저 출신이라 유학은 보내주기 어려워 걱정”이라고 했다. 그 말에 빠직, 이마에 핏줄이 섰다. 내구도 100짜리 금으로 만든 방패를 가지고 태어나 지금은 1년에 억 단위의 골드를 벌어들이는 사람인데. 내 흙수저로서의 자부심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때로는 삐질, 이마에 땀이 흐를 때도 있었다. 비싼 월세가 싫어 뒤앙민크의 수도를 벗어난 용사들을 만날 때였다. 그들에겐 영혼이 깊은 용사가 소환해낸 집의 좌표를 알리기 껄끄러웠다. 소울의 부촌과는 거리가 먼 곳임에도 그랬다. 내년에도 여기에 살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웃어넘기면, 그 상냥한 용사들은 신혼용사 특별공급을 알아보라는 말을 전해주곤 했다. 당연히 알아봤지. 하지만 어떤 스크롤을 읽어보아도 우리가 쓸 수 있는 주문은 없더라. 물론 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우리같은 흙수저들이 먹고살 만한 급여를 받은 건 일이 년밖에 되지 않았는데. 어찌 우릴 위한 주문이 없냐며. 이래서 뒤앙민크는 글러먹은 곳이라는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자는 영혼이 깊은 용사 뿐이었다.


전 용사는 이제야 알게 되었다. 자신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용사들이 한 길드 소속이었던 건 과거의 짧은 순간뿐이었단 걸. 모두들 그때와는 다른 곳에서 저마다의 퀘스트를 달성하고 있다는 걸. 어떤 용사에게는 눈 감고도 해치울 퀘스트가 다른 용사에게는 전생 이후에야 노려볼 만한 퀘스트라는 것도. 나는 세계수의 어느 곳을 향해야 할까. 존경하는 용사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그들에게 지나가는 말로 생채기를 내고 싶지도, 그들이 의미 없이 던진 말에 신경을 긁히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그들과 만나지 않고 대화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가느다란 결속은 끊어지고 말 것이다.


그것이 흙수저 퀘스트.

세계수의 가지와 뿌리 끝을 오가며 살아남아야 하는 용사의 운명이다.



* 제목은 좋아하는 게임에서, '뒤앙민크 소울'이라는 표현은 좋아하는 웹툰에서 가져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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