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도 유리의 헌신, 집착을 알아주지 않았지.
유리는 여러 인격을 가지고 있던 남자였단다.
어릴 때부터 늘 몸을 빼앗기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어. 숨은 존재들에게서부터 말이야. 매일 밤 꿈마다 나타나 달려드는 그들과 몸을 걸고 사투를 벌이곤 했단다. 어느 날, 유리가 더는 자신을 지켜낼 수 없었을 때. 차들이 달리는 사거리에 몸을 던졌어. 몸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거든. 차라리 죽음을 택했지.
그때, 신호등이 고장나고 많은 사람들이 목성을 뒤따라 횡단보도로 달려든 기적. 그는 살아남았지. 아수라장이 된 사거리 속 눈앞에 어떤 여자가 서 있었어. 유리는 직감했지. 기적의 중점에 선 그 여자가 자신을 악몽으로부터 구원해 줄 것이란 걸. 그 이후 일어난 기묘한 일과 꿈속에 나타난 그녀와의 이야기들. 전생부터 이어졌던 자신과 그녀의 인연을 일깨워 주었다고.
수소문을 통해 간신히 그녀를 찾아갔지만 그때의 사고로 식물인간이 되어있었어. 그녀를 돌보아줄 사람도 없었지. 마치 유리를 만나기 위해 다른 세계에서 홀연히 나타난 사람처럼. 유리는 이번 세계가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어. 가진 모든 걸 쏟아 미지를 보살폈지. 평생을. 그 오랜 세월 동안, 유리는 외롭지 않다고 했어. 매일 밤 꿈마다 그녀가 찾아와 주었다고.
해가 지날수록 세상은 변해갔어. 불치병은 사라졌어. 이제는 치유 받을권리가 있느냐의 문제였지. 마침 그는 보험회사 직원이었어. 보험사의 권위는 신과도 같았지. 모든 데이터를 수집해 환자를 감시하고 생명을 선별할 권리를 가진 거야. 유리는 병적으로 일에 매달렸네. 자신이 그곳에서 권력을 쟁취하는 것이 미지를 다시 눈뜨게 할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수십 년이 지나 백발의 노인이 되어서야 유리는 미지를 복제할 수 있었네. 당시에는 그것이 생명연장의 유일한 방법이었거든. 사회가 나타나기 전 시대 말이야. 유리는 자신도 복제했어. 젊은 몸으로 태어난 그녀에게 늙은이는 어울리지 않다며 나를 만들었어. 내가 성년의 몸으로 태어났을 때 유리가 말했어. ‘너는 나란다’라고.
나는 거부했단다. 나는 유리가 아니었거든. 처음 본 순간부터 알 수 있었지. 그와 나는 다른 존재란 걸. 같은 얼굴과 같은 추억을 안고 있지만, 그녀에 대한 갈망 같은 건 없었어. 노망 든 사내의 말은 내게 의미 없었지. 꿈이라니, 다른 세계라던지 하는 것 말이야. 유리에게 물었어. 정말 저 식물인간과 얘기해 본 적이 있느냐고.
저 여자가 눈을 뜨면, 당신을 기억할 것 같냐고. 이름은 커녕 당신의 얼굴조차 본 적 없을지 모른다고. 더군다나 저 여자의 복제품이 미지 자체인 것이냐고. 그저 같은 몸을 한 다른 존재일 뿐, 깨어나면 당신을 떠날 것이라고. 나 역시 당신을 떠날 거야. 태어나게 했지만, 내 의지와 삶을 조정할 순 없다고. 아버지들이 자식에게 으레 할 수 없는 일처럼 말이야. 늙은 유리는 더는 어떤 권력도, 재산도, 근력도 남지 않았어. 실의에 빠진 그는 급격히 노쇠해지고는 곧 숨을 거뒀지.
나는 미지를 폐기했어.
어차피 의미 없는 삶의 연장일 뿐이었으니까.
그렇게 이곳을 떠났었단다. 누구도 유리의 헌신, 집착을 알아주지 않았지. 곧 사회가 탄생하고 그가 인간의 젊음을 관장하게 되었을 때, 어찌나 비웃음이 나오던지! 그저 몇 달만 더 살았더라면 나라는 존재를 만들지 않았어도 되었을 텐데 말이야. 미지 역시 조금만 더 기다렸다면 제 몸 그대로 눈을 뜰 수 있었지.
사회는 도시를 방랑하던 내게도 계약을 제안했단다. 집어 든 제비뽑기에 적힌 글귀는 ‘백만 개의 사랑’이였지. 수십 년 동안 나는 젊음을 대가로 여러 사람을 만나 사랑과 이별을 반복했지. 행복했던 날도, 지옥 같은 날도 있었어. 그래도 나는 임무가 싫지 않았어. 스스로 삶의 질문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 나는 누구를 위해 태어났는가. 언젠가 하나의 운명을 만나면, 내 임무와 젊음을 포기하고 그 누군가와 함께 늙어가다 영원한 죽음을 맞길 바랬어.
그런데 내가 모르는 것이 있었어. 사람들은 그 누구도 젊음을 빼앗기려 들지 않는다는 것 말이야. 내 임무를 거절하고, 시민의 권리와 젊음을 모두 포기할 테니, 당신의 젊음도 포기해 달라는 내 깊은 고백. 그녀들에겐 별안간 닥친 버거운 짐이란 걸. 모두 떠났어. 그들은 내게 말했어. 지금은 사랑하지만, 늙어가는 세월 동안 나를 증오하게 될 거라고. 그렇게 나는 나름의 결론을 내렸지.
자기의 생명까지 모두 다 준 그런 사랑. 이미 유리가 한 것이라고. 미지가 알든 모르든. 부질없는 짓이라 손가락질 받든 유리는 상관이 없었어. 그리고 어쩌면, 나는 그의 길을 쫓던 중인지 모른다고. 그래서 나 역시 유리 일지 모른다고.
그때부터 꿈속에 유리와 미지가 나타나곤 했어.
평화로운 빛이 구름처럼 퍼지는 공간. 그들은 거대한 백색 의자에 앉아 나를 내려다보고 있어. 둘이서 손을 꼭 잡은 채. 그 모습은 마치 신 같았지. 나는 검은 생쥐처럼 작은 몸으로 무릎 꿇은 채 고개 들어 그들 발끝을 바라볼 뿐이야. 내 몸에서 연거푸 흘러내리는 검은 잉크는 백색 지면을 더럽힐 수 없었어. 바닥을 짚은 내 손바닥에서부터 고이는 잉크는 제 무게 때문에 백색 표면 아래로 침잠해버렸으니까. 곧 내 몸뚱이도 우윳빛 수면 속으로 내려앉고 말았지.
어느 날 홀린 듯 미지의 집을 찾아 나섰어. 권총을 든 채.
더는 꿈에 시달리고 싶지 않았으니까.
매번 꿈에서의 죽음이 싫은 건 아니었어.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 나는 백색 수면 아래로의 침잠을 즐기기도 했어. 살결을 파고드는 따뜻한 물결의 촉감은 안식 같았으니까. 내가 혐오했던 건 그들의 눈길! 이해한다는 듯, 혹은 가엽다는 듯 쳐다보던 그 눈. 우월감이 느껴졌지. 동시에 내 속에서 차오르는 열등감. 그런 것이 견딜 수 없었지.
풀숲에 덮인 그녀들의 집을 몇 번이나 지켜보았어. 그들의 삶을 정의하고 싶었지. 권총을 휘두른 다음에도 후회하지 않게 말이야. 그곳 지하실에서 본 것. 그녀들이 스스로를 끝없이 복제하며 죽은 유리에 대한 얘기를 나누는 모습. 아니, 복제품인 나를 상상하며 희망이라 일컫는 모습. 다리를 저는 자신을 실패작이라며 소각하려는 그녀. 그녀들의 인생의 목적은 단 하나였어.
나를 만나는 것. 또 하나의 실패작인 나를. 늘 버림받는 나를 말이야! 그들에게 다가가 말을 걸어야 할까. 아니면 무의미한 헌신의 굴레를 멈춰주어야 할까. 나는 후자를 선택했네. 사실 부담스러웠네. 이미 유리를 버린 내가, 그들의 억척스런 희생을 포용할 수 있을까. 난 못하겠어. 차라리 그들에게 안식을 주기로 했지. 그녀들 중 하나에게 총을 쏘자 내게 이리처럼 달려들었어. 내가 쓴 헬멧을 내리치는 괴력보다 무서웠던 건 그녀의 집념이었어. 딸을 살려내야 한다고 외쳤었지. 부릅뜬 그녀 이마에 총을 쏘았을 때부터 죄책감에 시달리게 되었지. 장미를 살려둔 이유란다.
인간 대 인간의 감정이 아니야.
같은 운명을 쥐고 태어난 복제품에 대한 죄책감이었지. 유리의 아집 때문에 태어나 방황하는 우리들의 존재! 문득 깨달았어. 오래전, 늙은 유리가 아이처럼 무릎 꿇고 기어와 눈물 콧물 흘리며 손을 싹싹 비는 모습마저 뿌리쳤던 이유. 그와 미지의 인연에 대한 의구심 때문이 아니었어. 단지 날 탄생시키고 이용하려 한 그에 대한 미움. 그리고 내 존재에 대한 의문. 결국 분노였단 걸.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어. 만약 내가 그때 유리의 헌신을 이어받았다면, 그녀와 나는 영원히 행복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것. 십 수년을 소파에 앉아 나를 기다릴 필요도, 늙어버린 자신을 대신할 딸을 만들 필요도, 쓸모없는 자신을 소각할 이유도 없었지. 그래. 결국 내가 망쳐버렸을지도 몰라.
오랜 시간 고민했네.
그리고 목성을 만들었지. 사회는 말했어. 이것으로 계약과 젊음은 끝이 났다고. 상관없어. 꿈 없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내 목숨을 대가로, 그녀들에게 선택권을 주기로 했네. 유리와 미지의 인연을 이어받을지, 포기할지 말이야. 장미. 네게 물으마.
너의 몸속에 미지가 존재하니?
미지는 유리를 기억하니?
유리가 저지른 백 년 간의 일들. 그의 헌신과 집착이 조금이라도 그녀에게 의미가 있었니. 아니면 너도 나처럼 그저 그가 미운 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