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송이 장미 23 유리

지금 장미 하나만이 삶의 이유가 되었다고.

by 류인환

한동안 침묵이 흘렀어. 백색 밀실을 채운 빛은 가쁜 숨을 몰아치듯 잔잔히 떨렸어. 목성과 장미의 대답을 숨죽여 기다리는 듯. 장미가 입을 열었어. “결국 유리. 그 남자 때문에 모든 일이 벌어진 것이군요. 엄마들의 삶과 죽음. 그리고 당신의 탄생 말이에요.”


태연한 그녀를 바라보는 목성의 동공은 계속 흔들려. 그러다 백색 밀실을 향해 외쳤어. “할아버지도 결국 날 도구로 만든 거야! 유리가 할아버지를 만든 것처럼. 단지 당신 질문의 답을 얻기 위해서.” 백색 밀실은 침묵했어.


목성은 장미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을 이었어. “나는 유리를 몰라. 내 속에 유리가 담겨 있냐고? 유리는 없어. 그런 것들에 휘둘리고 싶지 않아. 나도 사람이잖아. 내가 생각하는 것, 살아가는 것 모두 내 것이야. 그들의 의지를 따르지 않을 거야. 하지만, 장미. 너를 잃고 싶지도 않아.”


장미는 살가운 눈 웃음으로 그에게 대답했어. “나는 장미잖아요. 미지가 아니에요. 나는 그 집을 나왔어요. 우리는 그들과 별개예요. 그들을 위해 태어났지만, 더는 그들은 존재하지 않잖아요. 있잖아요. 목성. 나는 당신을 잘 몰라요. 당신도 날 잘 몰라요. 어쩌면 스스로도 잘 알지 못할 거예요. 우리는 몸에 비해 짧은 삶을 살았잖아요.”


그녀의 대답에 목성은 아무 말 하지 못하고 그저 장미의 피 묻은 옷깃을 덮어줬어. “나 좀 쉬고 싶어요.” 장미는 몸을 추스르고 일어났어. 목성은 그녀를 부축한 채 욕실로 데려다주었어. 백색 밀실을 벗어나기 직전, 문득 장미가 고개를 돌리고 말해. “내 속에 미지가 있냐고 물어보았죠? 유리의 헌신이 의미가 있냐고도 물어보았었죠. 대답하지 않을 거예요. 그것으로 엄마들을 대신해서 당신에게 복수한 셈 칠 거예요.” 백색 밀실은 대답이 없어. 대신 그들이 백색 밀실을 완전히 떠났을 때, 힘없이 가라앉듯 모든 조명이 꺼졌어.




장미는 두터운 백색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고는 목성이 건네준 옷으로 갈아입었어. 보라 빛 낡은 원피스였지. “빌딩 안에 있는 여자 옷이라곤 이것밖에 없어.” “누구의 옷인가요?” “몰라. 할아버지가 만났던 누군가의 옷이겠지. 불편하면 내 옷을 줄게.” 미지는 옷깃을 만지작거리며 말했어.“붉은 잠옷만 아니라면 괜찮아요. 예쁜 옷이네요” “내 방을 보여줄게.” 목성은 얼굴을 붉히며 방문을 열었어. 진회색의 벽으로 이루어진 방. 중심에는 작은 원형 테이블이 있었지. 유리잔 하나와 낡은 커피포트가 놓여 있어.


“따뜻한 차라도 마셔.” 목성이 버튼을 누르자 딸깍 소리와 함께 커피포트의 푸른 램프가 켜졌어. 금세 끓어오르는 포트 물결에 방안은 푸른빛의 수면으로 일렁거렸지. 장미는 벽을 두리번거리며 말했어. “바다 같네요.” 목성은 백색 이불이 덮인 침대 머리맡에 걸터앉으며 물었어. “바다를 가본 적 있어?” 그리곤 금세 입을 가리고 말해. “가본 적이 없겠지. 미안해.”


장미는 목성이 앉은 침대로 다가와 끝단에 걸터앉고는 말했어. “가본 적은 없지만, 기억은 있어요.” 그녀는 눈을 지그시 감고 이어 말했어. “내겐 백 년 전의 기억이 있어요. 물개들이 있는 섬. 그 아래 바다가 있어요. 한 밤에 깊은 바다로 들어가서 하늘을 보아요. 수많은 별빛이 보이죠. 머리를 돌려 수면 아래로 내려가면 그 별빛은 유성처럼 회전했다가 바닷속의 작은 생물이 되어요, 여전히 빛을 내는 별처럼 말이에요. 나는 그걸 씹어보았어요. 바삭하는 소리와 함께 작은 폭죽이 터져요. 미량의 단맛. 입맛을 다시게 되죠. 심해. 더 깊숙이 들어가도 무섭지 않아요. 이곳에는 부글-부글 하는 물방울 소리가 들리거든요. 그 작은 외침은 내게 뭐라고 속삭이는 듯해요.”


목성은 턱을 괸 채 말하고 있는 그녀를 지긋이 바라보았어. 보랏빛 원피스를 입은 그녀. 무척이나 아름다웠지. 여신. 그런 단어가 떠올랐어. 그러자 어느 늦은 오후. 어느 사거리에서 지는 태양의 얼굴이 떠올랐지. 어느 밤. 거대한 신전 중앙에 놓인 여신의 석상도 떠올랐지. 목성도 눈을 감았어.


“나도 바다는 가본 적이 없어. 너보다 늦게 태어났으니까. 대신 나도 백 년 전 기억이 있어. 이렇게 눈을 감으면 어느 해안이 떠올라. 바다에 빠졌어. 허우적거릴수록 몸은 가라앉았지. 팔다리엔 해초가 가득 엉겼어. 해초는 물뱀이 되어 내게 말을 걸어. 물론 무슨 말을 하는지는 기억나지 않아.”


“그건 누구의 기억인가요?”장미는 빤히 목성의 얼굴을 쳐다보며 물었어. 목성은 한참 대답하지 못했어. 여전히 장미는 그의 대답을 기다렸지. 결국 목성은 고백하듯 말을 뱉었어. “유리의 기억일 거야. 가끔 떠오르는 환각도, 꿈속 이야기도 모두 유리의 것일 거야. 어쩌면 나는 말 그대로 유리의 복제품 일지 몰라. 부정하고 싶지만 내가 가진 기억은 거진 유리 것이니까. 나도 밉다면, 이해할게.”


장미는 목성 곁으로 다가와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는 말했어. “내게 그 말을 숨겼다면, 당신도 할아버지와 다를 바 없었을 거예요. 내 기억도 미지의 것이에요. 그리고 어쩌면 정말로 당신과 내 기억 사이에는 접점이 있을지 몰라요. 미지와 유리가 세계를 초월한 인연이라면 말이에요. 하지만 우리에겐 의미 없는 일들이잖아요. 나는 장미이고 당신은 목성이니까. 우리, 같은 영화를 보았다고 생각해요. 그러면 가끔 같은 꿈에 대한 얘기를 나누어도 좋을 거예요.”


목성은 장미를 껴안았어. 그리고 애써 헐떡거리는 숨을 참고 있었지. 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그녀는 눈을 감고 목성이 숨을 고를 때까지 기다려주다가 이내 잠들었어. 목성은 잠든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는 테이블에 턱을 괸 채 그녀를 바라보며 생각했어. 만난 지 단 하루밖에 되지 않은 여자. 하지만 백 년 동안 누군가 준비한 그 하루. 유리와 할아버지의 지독한 의지. 복제품이라는 자신의 정체.


그 모든 걸 뿌리치더라도 지금.

장미 하나만이 삶의 이유가 되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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