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송이 장미 24 두 개의 장미

지금 여기는 진회색 아스팔트의 바다. 무채색의 파도가 잔잔하게 치는 곳.

by 류인환

샛별은 화훼 빌딩에 도착했어.


밤. 대낮처럼 밝은 도시. 유일하게 불 꺼진 건물. 그녀는 길고양이처럼 느릿하게 걸으며 주위 사람들의 얘기를 엿들었어. ‘이 도시의 유일한 꽃가게가 문을 닫았다. 사회가 말했어. 바이러스를 일으킨 범인이 화훼 빌딩이라고. 지금 빌딩은 문을 걸어 잠그고 사회의 접근을 막아내는 중.’


빌딩 주위. 반경 10미터 정도를 비워둔 채 온갖 날 선 기계들이 빌딩을 포위하고 있어. 간간이 보이지 않는 선을 넘어선 기계들은 제 몸을 바스러뜨리고는 숨 멎었어. 샛별이 보기에 화훼 빌딩은 공기가 사라진 구역 같았지. 철의 피부를 가진 생물은 질식의 고통에 몸부림치다 죽어간 거야. 그 누구도 다가갈 수 없는 곳. 구경하는 사람들도 함부로 다가가지 못했어. 소문이 퍼졌지. 선을 넘어가면 젊음이 망가질지 모른다고.


샛별은 두터운 백색 코트 깃에 얼굴을 반쯤 파묻고는 빌딩을 향해 걸어갔어. 사람들은 황급히 그녀를 말리려 했어. 하지만 찰랑이는 검은 머릿결을 보고 이내 고개를 돌렸지. 유독 사람들은 젊은 아이들을 멸시했어. 영원처럼 느껴지는 순수한 젊음과 통제받지 않는 몸짓. 백발의 사람들이 유일하게 가지지 못한 것이면서 두렵기도 했어. 검은 머리의 사람들은 어떤 행동을 저질러도 벌을 받지 않으니까. 그들은 자연 그대로의 짐승과 다를 바 없었지. 마치 다른 생물처럼.


그녀는 기계들 사이를 비집고 지나치며 보이지 않는 선을 넘었어. 사람들은 조용히 그녀를 지켜보았지. 텅 빈 공간. 또각 또각. 붉은 하이힐이 지면을 치는 소리만 울려 퍼져. 정문에 다다르자 너무도 쉽게 화훼 빌딩의 현관이 열려! 문에 박힌 화면에는 ‘미지’라는 이름과 그녀 얼굴이 나타났지.


샛별은 화면 속 얼굴을 쓰다듬고는 건물 안으로 들어갔어.


로비 내부. 거대한 공간에는 결이 풍성한 잔디가 카펫처럼 덮였어. 그 위로 수많은 기계들이 줄 섰지. 빌딩을 사수하는 군인처럼. 그녀가 병원에서 보았던 백 개의 눈을 가진 거인. 뱀의 다리를 가진 괴물도 몇 있었지. 그들은 샛별이 다가오자 정성스레 길을 비켜주었어. 엘리베이터를 향한 길이 생겨났지. 그녀는 곧장 2층으로 올라갔어.


습기를 먹은 진회색 타일이 뒤덮은 공간.

정사각형의 지면 수십 개가 공중을 떠다니고 있어.


각각의 지면에는 각각의 꽃들이 같은 자태로 줄지어 피어나 있었지. 불쾌했어. 꽃들이 마치 자신과 어머니 꼴 같았거든. 그녀는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 4층 그렇게 8층까지 올라섰어. 반복되는 진회색의 공간. 내리기 싫었어. 닫힘 버튼을 눌렀지.


문이 닫히려는 순간. 저 멀리서 움직이는 형체가 보여!


서둘러 엘리베이터 문을 붙잡고는 조심스럽게 한 걸음씩 다가갔어. 손아귀에 잔뜩 힘을 준 채로. 조금씩 뚜렷해지는 보랏빛의 형체. 어떤 여자가 풀밭에 쪼그려 앉아 바구니에 꽃을 담고 있어. 평온해 보이는 그녀의 얼굴. 샛별과 같았지.




처음에, 샛별은 그녀가 누구일지 가늠할 수 없었어.


혹시 이곳 빌딩에서 복제된 또 다른 미지일지 몰라서. 그런데, 그녀가 샛별을 보고 화들짝 놀라 일어섰어. 그리고 그녀를 향해 “엄마”라고 말했을 때. 샛별의 기분은 반가움. 동시에 치밀어 오르는 분노. 그래서 다가가지 못했어. 저 멀리 선 딸을 보며 어떻게 대해야 할지, 머뭇거렸지. 그녀 등 뒤로 한 남자가 보여! 그러자 귓가에 웅성거리는 환청이 들리기 시작해. 샛별이 눈을 지그시 감자, 머릿속에 떠오르는 검은 소파. 누군가 앉아있었지. 뒤틀린 다리를 가진 불에 그을린 여자. 그녀가 말했어. ‘저 자식이 엄마들의 희생을 망쳐버렸어’ 지하실 안 바스러진 헬멧이 떠올라. 유리 파편 아래 일그러진 얼굴. 저 남자였지. 검은 얼굴의 그녀가 샛별에게 말했어. ‘엄마를 위해 강도를 막아줄 수 있겠니?’


샛별은 자신도 모르게 그를 향해 달려가고 있어.

날 선 손아귀를 허공에 휘두르며.






백색 밀실은 장미와의 만남 이후 어떤 말도 하지 않았어. 마치 다른 곳으로 사라진 것처럼. 빌딩에 남겨진 목성과 장미는 몸을 추스를 겸 이곳에서 지냈어. 둘은 씨앗을 뿌리고 흙을 덮으며 하루하루를 보내곤 했지. 장미의 몸은 금세 나았지만, 그날의 사고 이후로는 조그만 생채기도 잘 아물지 않았지. 지금 목성은 가시에 찔린 그녀 손가락에 정성껏 붕대를 감아주는 중이야.


그때, 엘리베이터가 열렸어.


진회색의 공간 중심. 일직선의 백색 빛을 뿜어대는 문 틈으로 백색 코트를 걸친 여자가 걸어 나왔어. 장미와 같은 얼굴이야! 하지만 분명 다른 사람이었지. 또각. 또각. 걸음마다 울려 퍼지는 분위기는 황량했고 쌀쌀맞아. 매서운 눈초리. 닫힌 붉은 입술. 그녀를 본 목성의 감정은 급격하게 무거워졌고 아려왔지. 숨이 막혀와. 목성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어. 그녀는 목성을 바라보고는 질끈 눈 감았어. 닫힌 눈꺼풀 살결 위로 얇은 각막 자국이 흔들거리는 게 보여. 눈을 뗄 수 없어. 그녀의 존재는 마치 주술을 부리듯 목성을 옭아매었어. 바로 옆에서 둘을 바라보는 장미의 존재마저 잊어버렸지.


목성의 시야에 들어차는 광경은 급격히 느려졌어. 회전목마를 탄 기분이야. 그녀는 손바닥을 펼친 채 그를 향해 뛰어오고 있어. 아니, 목성이 보기에 그 몸짓은 물속처럼 느리고 무용처럼 의미심장했지. 귓가에 웅성이는 환청이 끓어오르기 시작해.


누군가 그에게 속삭여!


“지금 여기는 진회색 아스팔트의 바다. 무채색의 파도가 잔잔하게 치는 곳. 바다 위에는 등이 축제를 기념하듯 펼쳐졌다. 등은 느리게 흔들거리고 번쩍인다. 주위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움- 하는 입 닫은 소리처럼. 들리지만, 지각할 수 있는 소리가 아니다. 나는 응시하는 그 행동 만을 쫓고 있어서, 내 몸이 보내는 어떤 신호도 지각할 수 없다. 그래서 다리가 어떤 자세를 하고 있는지, 팔은 어디에 두었는지 알 수 없다. 공기는 정신이 환기될 정도로 차갑지만 춥지는 않다.”


목성은 자동응답기처럼 말을 내뱉고는 고개를 푹 숙였어.

조금 뒤 환희의 미소를 지었지.


평소보다 낮은 목소리로 다가오는 그녀에게 말했어.

“미지. 드디어 만났-“


유리는 말을 잇지 못했어. 샛별의 가는 손이 그의 심장을 관통했으니까. 유리는 여전히 따사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어. 그러다 눈꺼풀이 떨려오고 서서히 눈을 감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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