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송이 장미 21 유리

목성 그 자체였지.

by 류인환

새벽. 달이 지면 아래로 성큼 주저앉은 시간.


황급히 찾아온 화훼 빌딩의 백색 밀실은 그대로야. 어제 저녁, 목성이 부리나케 뛰어나간 흔적 그대로. 파쇄기 아래 떨어진 장미 꽃잎 조각. 식어버린 유리 수조. 백색 유기체가 담긴 알루미늄 캔. 그럼에도 예전과 달랐어.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그와 장미를 바라보는 것 같아서. 그래서 목성은 그녀를 품에서 내려놓을 수 없었어. 장미는 그에게 안긴 채 백색 천장을 바라보고 있어. 그르렁거리며 숨을 고르고 있지. 찢어진 벨벳 잠옷 사이 드러났던 휑한 구멍은 하얀 살결로 메워졌어. 목성은 밀실 벽을 돌며 외쳤어. “할아버지, 어디 있나요!”


목성의 메아리가 멎을 때 즈음, 밀실을 뒤덮은 백색 타일 틈으로 거미줄 빛이 번뜩였어. “나는 백색 밀실이 되었단다.” 할아버지의 목소리야.


목성은 힘이 풀려 그대로 무릎을 꿇었어. “장난칠 기분이 아니야. 백색 밀실. 할아버지는 병원에서 죽었어.” “육체가 타버렸을 뿐이란다. 내 기억과 생각은 화훼 빌딩에 남아 있단다. 사회가 잠들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병원에서 널 구한 것도 이 할아버지란다.”


목성은 장미의 고개를 제 무릎에 가지런히 올려두었어. 장미는 게슴츠레 그를 마주 보았지. 그는 장미 동공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말했어. “난 믿을 수 없어. 백색 밀실이 장난치는 거야.”


“그 아이는 미지의 마지막 복제품이구나.” 백색밀실의 말에 장미가 눈을 부릅떴어. 그리고 힘겹게 입을 열었지. “당신은 미지를 아나요?” 밀실은 호흡하듯 조명을 깊게 낮췄어. 그리고 대답했지. “아가야. 나 역시 누군가의 복제품이란다. 목성에겐 한 번도 얘기한 적이 없었지.” 목성이 허공을 바라보며 외쳤어. “복제품이라니! 할아버지는 젊음마저 거부했어. 순수한 사람이길 원한다고 말했어!”


밀실의 조명이 일순간 깊게 꺼졌다 들어찼지. 마치 긴 한숨을 쉬듯. 그 모습은 가끔 할아버지가 내뱉는 특유의 한숨과 같아서, 목성은 더욱 혼란스러웠어.




무릎 꿇은 목성의 눈 앞으로, 거대한 화면이 펼쳐졌어! 외딴 도시를 걷는 할아버지의 영상이었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곳이야. 흙과 풀 가지로 덮인 지저분한 도시. 하늘을 전선으로 가린 곳. 마치 장미가 살던 구역 같았지. 목성은 직감했어. 지금보다 수십 년 전 도시란 걸. 영상 속 할아버지는 며칠 전 병원에서 보았던 것보다 더 늙은 모습이야. 걷는 걸음걸이마저 할아버지의 것이 아니야. 외모는 같지만, 분명 다른 누군가였지. 다른 영상들이 그 위로 펼쳐졌어. 할아버지는, 아니 할아버지를 닮은 그의 모습은 점점 더 젊어졌지. 흐릿한 화질 속 그의 머리카락이 흰색에서 잿빛으로, 그리고 검은색이 될 때, 두려움이 차올랐어.


눈 앞에 환각이 겹쳐. 지난 꿈, 그가 보았던 백색 밀실의 도플갱어. 그의 서린 눈빛이 떠올랐어. 식은땀이 흘러. 그럼에도 흐릿한 화질 속 그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어.


어느 옛날의 이름 모를 사거리.


그 중심에 검은 머리의 남자가 서 있어. 주변으로는 수십 대의 고풍스러운 차들이 뒤엉켜 경적을 울리고 있었지. 남자는 귀가 멎은 듯 주변의 혼돈에 개의치 않아. 쪼그리고 앉아 자신을 촬영하고 있는 카메라를 주시하고 있어. 화면이 확대되자 흐릿했던 얼굴이 또렷하게 드러났어. 게슴츠레 웃고 있는 앳된 얼굴의 남자.


목성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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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복제품이라고?” 목성의 입가가 떨리고 있어. 두 팔로 자신을 감싸 안았지. 제 몸을 확인하려는 듯. 손바닥에 닿는 살결이 자신인지, 아니면 화면 속의 유리라는 남자인지 말이야. 장미라는 이름을 그녀에게 지어주었을 때 그녀가 두 팔로 스스로를 감싸던 모습이 떠올라.


“너만이 복제품이 아니란다. 나도 그의 복제품이란다. 장미가 그녀의 복제품인 것처럼.” 백색 밀실이 제 몸을 울리며 대답했어.


장미는 빠르게 목성의 표정을 주시했어. 그가 어떤 기분을 느끼는지 알고 싶었거든. 목성은 서둘러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어. 지금 자신의 기분.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아. 목성은 손가락 사이로 나즈막히 뱉었어. “유리가 누구인데.”


미지를 갈구했던 사람. 그것이 전부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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