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는 죽었지만, 그의 분신이 화훼 빌딩에 있다네.
샛별은 일어섰어. 삐그덕. 그녀 종아리가 밀어낸 의자 다리가 비명을 질렀지. 날카로운 소리는 응접실 내부를 울리고는 옅어졌어. 질끈 눈 감았어. 머릿속 존재들을 찾아보았지. 한 명이 사라졌어! 또 다른 샛별. 아마 그녀는 끝없이 자신을 저주하다가 이내 못 견뎌 사라진 거야.
눈을 감으면 보이는 상상의 공간.
그녀 집 거실. 어머니는 여전히 검은 소파를 지키고 앉아있어. 침묵하며 벽에 걸린 그녀들의 초상화를 바라보는 중이야. 샛별은 어머니가 눈에 걸렸지. 그녀의 표정을 뚫어져라 바라보았지만 어떤 감정도 느낄 수 없었어. 어머니는 골똘히 생각하는 중이야. 고운 손톱을 깨물며. 어머니마저 머릿속 그녀들의 집을 떠날까 두려워졌어.
얼른 눈을 떴지. 이제 다시 금빛의 응접실이 보여. 응접실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아. 의자에 앉아 그녀를 쳐다보는 신사 또한 움직임이 없어. 마치 작동을 멈춘 기계처럼. 소음 없는 공간은 그녀의 숨을 조여오기 시작해. 그녀가 입가로 숨을 삼키자 신사는 단숨에 표정을 읽어냈어. 곧 어디선가 바람이 이는 소리. 그리고 책상 위에 떠 있는 늙은 여자의 미세한 숨소리가 들려왔지. 샛별의 어깨가 느슨히 풀어질 때, 신사가 입을 열었어.
“길고양이는 저 미지라는 여자의 복제품이란다. 당신에게 알맞게 설명하자면, 당신이 태어난 인큐베이터는 거푸집이라고 할 수 있지. 그리고 길고양이는 그 거푸집이 찍어낸 많은 제품 중 하나란다. 사실이네.”
그녀는 신사에게서 눈길을 거두고는 두툼한 백색 모피코트 속으로 손을 숨기며 말했어. “마리나는 그저 한낱 병든 여자에 불과했군요.” 신사는 잠깐 동작을 멈췄어. 그리고 대답했지. “당신들은 미지를 마리나라고 불렀군. 바다의 여신. 그건 사실이 아니야. 그녀는 인간일 뿐이야. 그녀와 같은 해에 태어난 인간들도 이 도시에서 여전히 숨을 쉬고 있네. 사회와 계약을 치르고 길고양이보다 앳된 얼굴을 가졌지.”
샛별은 테이블에 가까이 다가갔어. 테이블 모서리에 걸터앉아 손을 뻗어 홀로그램 속 늙은 그녀 머릿결을 쓰다듬었지. 갈대같이 성긴 회색 머리카락은 손가락에 밀려 바스락거렸어. 그녀는 손을 내리고 신사를 쳐다보았어. “마리나는 왜 자신을 복제했나요?”
샛별의 몸짓을 세밀히 훑어보던 신사는 즉각 대답했어. “그녀가 원한 것이 아니란다. 그녀는 길고양이만큼 어렸을 때부터 오랜 세월 침대에 누워있었지.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네. 누군가 강제로 복제했단다. 그 결과 수많은 복제품이 태어나고, 또 복제품에게 죽임을 당했지. 그들 스스로의 의지로 말이야.”
그 말을 들은 샛별의 붉은 입가는 파도처럼 넘실거려. 그 위로 일렁이는 양쪽의 동공. 왼쪽에는 태양처럼 붉은 분노. 오른쪽엔 달처럼 시린 슬픔이 보였지. 신사의 동공이 재빨리 움직여. 샛별의 눈짓과 함께 춤추듯이. 그 모습은 마치 신사 또한 샛별과 어머니들의 오랜 세월을 이해한다 말하는 듯했어. 신사는 어느새 눈물 맺힌 눈가를 내보이며 낮은 목소리를 내었지.
“사회는 젊음을 대가로 인간과 계약할 때 늘 한 가지 조건을 내건단다. 조건은 각기 사람마다 다르지. 기준도 알 수 없어. 누구에겐 채식주의자가 되어라. 누구에겐 꽃을 재배해라. 혹은 20년 간 매일 아침 성경을 읊어라는 식이지. 마치 인간을 대상으로 괴상한 실험을 하는 듯 말이야. 내게도 한 가지 조건이 주어졌네. 거짓말을 하지 말라. 그러니 내 말은 믿어도 좋네. 거짓말을 하는 순간, 나는 즉각 젊음을 빼앗기니 말이야.”
“당신은 무척이나 아파 보여요.”
신사는 또 한 번 동작을 멈췄어. 잠시 후 대답했지. “아까 전 병원 안 사람들이 멈춰있는 걸 보았지. 사회가 아프다네. 나는 사회의 분신으로서 길고양이를 이곳에 데려왔네. 지금 사회는 심하게 다쳤어. 누군가 사회를 공격했거든. 그 때문에 내게도 오류가 생겼네. 숨을 마시는 횟수가 온전치 않고, 손발이 부자연스러운 것 말이야. 당신을 보내고 곧 자유의 몸이 될 거야. 그래서 빨리 안내를 끝맺길 바랄 뿐이네. 내가 숨 멎기 전에.”
“그럼, 한 가지만 더 물어볼게요. 왜 그 누군가는 미지를 복제했나요?” “욕심과 망상. 그것뿐이라네. 당신은 왜 남들과는 다른 회복력과 힘을 가졌을까. 생각해보게. 끝없는 실험과 조작 말고는 불가능하네.” “백만 송이 장미를 가져올 그 남자의 짓인가요?” “미지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았네. 당신들의 목적은 누군가 지어낸 것이지. 바로 그 남자라네. 그와 사랑을 맺는 것이 당신들의 목적이라면, 그리고 혹 길고양이가 그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다면 불가능하네. 이미 그 남자는 죽었네.”
샛별은 별안간 찬바람을 느꼈어. 몸을 움츠리고는 눈을 감았지. 머릿속 거실이 텅 비었어. 어머니마저 떠나버린 거야. 가로등 빛이 새는 집 안에는 벌레 소리마저 들리지 않아.
끼익-
의자를 끄는 소리에 샛별이 눈을 떴어. 신사는 힘겹게 일어나 그녀 등 뒤로 다가갔어. 그리고 그녀 어깨를 느슨하게 쓰다듬었지. “그 남자는 죽었지만, 그의 분신이 화훼 빌딩에 있다네. 당신의 복제품과 함께. 말해줄 수 있는 건 이것뿐이라네. 이제 나의 역할은 끝났어.”
응접실 문이 열렸어. 신사는 샛별의 손을 잡아끌고 그녀를 바깥으로 배웅했지. 신사는 정중히 고개 숙였어. 그대로 동상처럼 더는 움직이지 않았지. 여전히 테이블 위 홀로그램으로 떠 있는 늙은 여자. 그녀는 힘겹게 숨을 쉬며 가는 눈으로 샛별을 쳐다보는 중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