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만송이 장미 19 샛별

“불쌍한 길고양이에게 길을 안내하는 인간이란다."

by 류인환

샛별은 이제 확신했어. 수많은 엄마들이 굳이 태어나고 죽을 이유가 없었지. 샛별 속 엄마들은 침묵했어. 얼마 전 딸이 그 남자를 만나 그들의 목적을 끝맺어버렸다는 것. 그래서 이제 삶의 이유가 사라졌다는 걸 알게 된 것만으로도 이미 많은 엄마들이 그녀 머릿속을 제 의지로 떠났어. 샛별이 붙잡을 수도 없었지. 게다가 사회와의 계약. 그리고 신사의 덧붙인 설명까지 그녀들의 수고를 헛된 고통으로 만들어버렸어.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신사의 말을 듣는 동안에도 샛별 머릿속엔 그녀들이 하나씩 사라지는 중이야. 귓속은 점점 고요해졌고, 샛별의 정신은 또렷해졌지. 지금 남은 엄마들은 둘이야. 하나는, 샛별을 사랑해서 절름발이로 태어난 그녀를 소각하지 못했던 어머니. 숨죽여 우는 중이야. 샛별의 딸이 아닌, 샛별이 그 남자와 만나 행복했어야 했다며 넋두리를 하고 있었지.


그리고 남은 하나는, 자신을 혐오해서 딸을 만들고 자결하자 다짐했던 샛별 자신. 그녀는 자신이 부활하는 동안 딸의 인큐베이터를 통해 다시 샛별에게 돌아왔지. 지금도 그녀에게 욕설을 퍼붓는 중이야.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죽어버리라고.


문득, 의문이 들었어. 누가 자신을 욕조에 넣어 재생시켰을까.


딸이 태어났을 때 들이닥쳤던 강도였을까. 그는 자신이 내리친 주먹에 숨 멎었을 거야. 지금도 공포에 질린 그 남자의 얼굴이 기억나. 그렇다면 딸 밖에 없어. 딸이 자신을 살려 준 거야. 사회가 말했어. 4년 전이라고. 욕조에서 그녀들이 탄생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사흘이면 충분해. 자신이 욕조에 담긴 건 사나흘 전일 거야. 그리고 딸은 지난 4년 동안 혼자 살아갔겠지. 그러다 그 남자를 만나고는 집을 떠나기 전에 별안간 샛별을 인큐베이터에 넣은 게 분명해. 왜 그랬을까. 자신을 살리지 않았어야 했어. 샛별은 하나로 충분해. 아니, 하나여야 하니까. 샛별의 머릿속이 복잡해졌어. 그 와중에도 신사는 계속 말을 하고 있었지.


‘귀머거리 년!’


머릿속 샛별 자신이 그녀에게 외쳤어. 그녀는 화들짝 놀라 신사를 쳐다봤어. 그는 말을 멈추고 샛별의 동공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표정 없이 말했어.


“안 들었군. 다시 설명해주겠네. 내겐 시간이 없단다. 길고양이야. 너의 기원은 미지라는 여자란다. 나랑 같이 기록보관소로 가야 해. 가서 확인하라고. 너의 원본의 정체가 무엇인지. 누가 너를 복제품으로 만들었는지. 인간은 직접 보지 않고서는 믿지 않는 고약한 버릇이 있으니까. 내가 직접 확인시켜 주겠네.”


샛별은 가는 눈초리로 물었어. “미지는 무엇인가요. 그것보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불쌍한 길고양이에게 길을 안내하는 인간이란다. 더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 않겠네. 대원칙 상 어긋나거든.” 신사의 눈은 이전보다 붉게 물들었어. 마치 심한 병에 걸린 것 같았지. 입술에는 경련이 일기 시작했어. 샛별은 의심스러웠지만 따라갈 수밖에 없었어. 그의 급격하게 쇠약해진 모습은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보였으니까. 지체하다간 더는 그에게서 정보를 얻을 수 없을 것 같았어. 그것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일단 그를 따라가야겠어.


“기록보관소는 어디에 있나요?” 샛별에 물음에 신사는 눈을 내리깔고 그녀의 붉은 구두를 바라봤어. 샛별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섰지. 신사의 붉은 동공은 움직이는 붉은 구두를 세밀히 쫓아갔어. 마치 그녀 심리를 계산하듯. 그녀가 어깨를 움츠리며 백색 코트 깃을 여매자, 신사는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려 그녀 얼굴에 고정하고 말했어. “이곳. 병원의 지하실이 기록보관소란다. 모피를 두른 길고양이가 밟고 있는 지면 아래에 숨겨 놓았지.”


“왜 병원에 도서관 같은 걸 숨겨 놓았나요?” 신사는 얼굴을 고정한 채 잠깐 침묵했어. 그의 입가는 헐거워지고 있어. 내쉬는 숨 하나하나가 뒤틀리고 있지. 다만 붉어진 눈가에 담긴 또렷한 동공은 변함없었어. 숨을 정돈 한 뒤 기침을 넘기고는 답했어.


“길고양이는 본질을 모르는군. 종이에 기록한다는 것은 현상이야. 오래된 책 같은 것이 본질이 아니지. 네 원본이 기억하는 시대와 지금은 달라. 방식과 관계마저 달라졌지. 더는 인간이 기록하지 않는단다. 그래서 거짓도, 취사선택 같은 것도 없지. 이제 인간은 여과 없이 기록될 뿐이란다. 시간 단위의 숨결, 감정, 고민까지. 다만 애석하게도 그걸 친절하게 또박또박 글로 써주지는 않는단다. 기계 없이, 인간의 맨눈과 맨 귀로는 알아낼 수 없지. 왜 병원에 기록보관소가 있냐는 길고양이의 질문에 대답하자면, 이제 인간이 목메는 건 수명밖에 없으니까. 그 중요한 것이 바로 이곳에서 기록된단다. 그 외 잡다한 것들을 그리 중요하지 않아.”


샛별은 크게 뜬 눈으로 신사를 쳐다볼 뿐이야. 그녀 구두 굽이 머뭇거렸어. 그는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리며 말했어. “자신이 입은 모피코트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설명해도 알아듣지 못할 길고양이에는 부질없지,” 신사는 빠른 걸음으로 병원 복도를 앞장섰어. 샛별을 서둘러 그를 쫓아가며 주변을 둘러보았지.


백발의 사람들이 멈춰 서 있어!

마치 공원의 동상처럼.


누군가는 서로 대화하던 도중이었고, 누군가는 걷는 도중이었지. 저 멀리 백발의 숙녀 손을 꼭 붙잡은 검은 머리 꼬마 만이 영문 모른다는 표정으로 숙녀와 샛별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지. 백개의 눈이 달린 기계들만 조용히 복도를 지나며 제 할 일을 하는 중이야.


“응접실로 가야 하네.” 신사는 한층 쇠약해진 목소리로 복도 모퉁이를 돌아갔어. 매끈한 알루미늄으로 마감된 늘어선 바닥 중점에는 백색 빛으로 새긴 경계선이 그어져 있어. 샛별의 구두가 그 선을 지나자마자, 밝던 시야는 급격하게 어두워졌어. 바닥과 천장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검은 공간. 샛별 주위로는 빛나는 문이 일렬로 늘어섰어.


“정신 차리고 따라오게.” 신사는 가장 가까운 문으로 들어갔어. 불 꺼진 듯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방. 샛별이 들어서자 미닫이 문이 소리 없이 닫혔어, 그러자 지면에서부터 밝은 조명이 서서히 일어나. 폭 5m의 응접실의 벽은 온통 황금으로 번쩍였지. 벽은 세밀한 그림으로 옅게 조각되어 있어. 어머니들의 기억으로, 문양은 고대 문명의 벽화 같기도 했고, 대성당의 거대한 그림 같기도 했어.


“금박이 아니라네. 두께 5mm의 금으로 방을 덮었지. 물론 방은 이곳 하나만이 아니야. 이 병원에 황금은 충분하네. 무엇보다 이곳에 새겨진 장식, 지나온 검은 복도. 그 외의 세밀한 구성 때문에 인간들은 마치 사후세계를 방문한 듯 착각하곤 하지. 그것이 도움이 되네. 그들이 사회와 계약을 하는 것 말이야.”


신사는 방안 잡다하게 놓인 크고 작은 조각상을 밀쳐내고는 중앙에 놓인 고딕 풍의 목재 책상에 다가갔어. 낡은 의자를 집어 끌어내고는 힘겹게 걸터앉았지. 그 와중에 삐그덕 하는 소리가 났어. 샛별은 별안간 그 소리가 정겨웠지. “그렇다네. 이 낡은 테이블이 구성의 정점이지. 그들은 종교적인 웅장함에 압도되었다가도 이 자리에 앉으면 금세 안정을 되찾는다네. 그들 말로는 영적인 경험이라네. 지금 길고양이와는 상관없지만. 어서 앉게”


샛별이 신사 맞은편 자리에 앉자, 그는 몸을 뻗어 샛별의 손을 감싸 쥐었어.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이곳의 무거운 공기와는 달리, 신사의 손은 따뜻해. 열병 걸린 사람처럼. “이곳 수십 킬로미터 지하에 기록보관소가 있지만 인간이 들어갈 수 있는 통로는 없네. 들어간다 하더라도 열과 깊은 압력에 살덩이가 뭉개지고 말겠지. 대신 화면으로 보여주겠네. 이곳 응접실이 유일한 통로야. 다른 곳에선 열람할 수 없지.”


신사는 샛별의 손바닥을 테이블에 갖다 대었어. 그러자 테이블 공중에 홀로그램이 펼쳐졌어.


나체의 늙은 여자!


샛별은 날 것 그대로의 생물을 보는 느낌을 받았어. 주름진 얼굴. 하지만 알 수 있어. 자신의 원본이란 걸! 공중에 뜬 여자는 몸을 테이블에 누운 채 힘겹게 호흡하고 있었지. 신사는 쉰 목소리로 읊어.


“미지. 1981년 생. 2045년 실종. 병원에서 식물인간으로 지내던 중 사라져 버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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