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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인환 Oct 05. 2020

오늘, 출근 전에 치르는 의식

돌이켜보면 나와 세상과의 접점이 그렇게 만들었다.

 오늘, 2주간의 긴 휴가를 마치고 첫 출근을 했다. 토요일쯤 생각이 들었다. 이제 그만 쉬어도 되겠다고. 일요일에는 초저녁부터 서둘러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휴가 마지막 날 잠자리니까. 너무 일찍 잠에 들어서 밤 12시쯤 눈을 떴다. 시간이 꽤 남았다. 만족하며 여분의 잠을 청했다. 몇 시간 후면, 오랜만의 출근이 시작된다. 설레기도 하고 무거워지기도 한다.




 누구나 그렇듯 내게도 출근 전 아침마다 치르는 의식이 있다.


 6시 알람이 울리면, 휴대폰을 침대 가장자리에 두고 눈을 감았다. 그러다 몸을 굴려 침대를 벗어났다. (동생과 함께 2층 침대를 쓴다. 그런데 요새 동생이 지방업무로 내려간 지 오래다. 아랫 침대는 딱딱하고 윗 침대는 폭신하다. 가끔은 카펫 바닥에서 잠을 잘 때도 있다. 그래서 내겐 3가지 침구 옵션이 있다.) 


 6시 10분에 침실을 빠져나온 나는 샤워를 하러 보일러 버튼을 켜고 수전의 물을 틀었다가, 다시 수도꼭지를 잠그고 욕실을 나왔다. 그리고 스타일러에 오늘 입을 녹색 맨투맨과 베이지색 슬랙스를 걸었다. 옷감이 들썩이며 돌아가는 동안 뜨거운 샤워 물을 틀어놓고는 쪼그려 앉아 전동칫솔로 오랜 시간 이를 닦는다. 어깨와 등에 뜨거운 물을 쬐면 몸이 데워지고 피로가 풀린다. 양치가 끝나면 가글을 입에 품고 베이비파우더향 샴푸로 머리를 감는다. 손바닥에 폼클렌징을 가득 짜낸 뒤 또 오랫동안 얼굴을 닦는다. 블랙헤드가 사라질 때까지. 그리고 풀냄새 나는 바디워시를 바르고는 수도꼭지를 살며시 오른쪽으로 돌린다. 마무리로 찬물을 쐴 때는 결심이 필요하다. 심호흡을 하고 몸통부터 수전을 갖다 대면 헉하는 소리를 참을 수 없다. 그래도 찬물과의 싸움에서 이겼다는 만족감이 좋다.


 가글을 뱉고 옷방을 들어서면 벌써 20분이 지나갔다. 큰 거울 앞에 앉아 선풍기와 에어컨을 켠 뒤 얼굴에 로션을 잔뜩 바르고 드라이기로 머리를 매만지면 로션이 마른다. 그러면 선크림과 바디로션을 바른다. 벌써 또 10분이 지나고 스타일러에서 알람음이 울린다. 갓 데워진 옷에서 햇빛 냄새가 난다. 오늘은 꽤 추울 것 같아서 아이보리색 싱글 재킷을 걸쳤다. 오랜만에 영양제와 가글 알약을 꺼내 먹었다. 



 여느 때처럼 마스크를 깜빡해 다시 올라갔다. 그리고 길을 걷는 동안 메신저백에 사원증과 휴대폰이 들어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한다. 동네 골목을 지나는 동안에는 혹시 바닥에 개똥이나 은행열매가 있는지 유심히 확인하고 눈앞의 비둘기가 날아가진 않을까 최대한 길을 양보해준다. 그렇게 5분 정도 걸으면 정류장에 도착하고 2분 뒤에 오는 마을버스를 타고 사당역으로 간다.


 오늘은 늦장을 부려서인지 셔틀버스 첫차를 타지 못했다. 


 사실 회사 출근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아서 상관없지만, 늦게 출근하는 게 싫다. 언젠가부터 그런 버릇이 생겼다. 빈 사무실 책상에 먼저 앉아있으면 알 수 없는 승리와 안도를 느낀다. 분명 늘 그랬던 건 아니다. 신입사원 시절엔 지각 때문에 꽤 혼났고 대학생 땐 밤과 낮의 경계가 없었으니까. 어쩌다 변했을까. 돌이켜보면 나와 세상과의 접점이 그렇게 만들었다. 접점은 늘 선택을 강요했고, 내 섣부른 결단은 자부심과 후회로 날 다시 추궁했으니까.  



 

 비슷한 내용의 (내)소설이 있다.


 '혼자 살아간 지 벌써 12년이 넘었다. 집을 떠났던 스무 살에는 막상 식사는 어떻게 차려야 하는지, 청소는 어떤 순서로 해야 하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싱크대에 쌓인 접시에 곰팡이가 피어났을 때는 그대로 쓰레기봉투에 넣어 버렸지.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순간순간의 판단은 다시 내게 책임을 추궁했고 매일매일 혓바늘처럼 돋아나는 보잘것없는 의사결정이 쌓이는 만큼 내 방식이란 것이 생겨났다. 며칠 전, 퇴근 후 현관문을 열었을 때 알았다. 십여 년 간 내가 선택한 모든 것이 집안에 거울처럼 투영되었단 걸. 나는 더는 음식을 해 먹지 않았기에 실내 마감재처럼 반질한 스테인리스 싱크대는 물기 한점 없고 화장실에는 늘 락스 냄새가 났다. 이른 저녁 무료하게 흐르는 시간이 아까워 언젠가부터 그림을 그려온 탓에 집 곳곳에는 지울 수 없는 잉크 자국이 묻어있다. 누군가 염탐했다면 유별난 사람의 집이라 생각했을 법했다. 하지만 예전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이 집안에서 매 분마다 나는 선택의 기로에 서야 했고 누구도 지켜보거나 조언하지 않았다. 섣부른 판단은 옳든 그르든 나를 변화시켰다. 결국 이 집이 나를 재창조한 셈이다.'[게스트하우스에 기록된 존재들_청색의 큐피드]




 셔틀버스 안에서 음악을 들으며 지나치는 양재천을 바라보다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는 출근길 시간이 아까워 영어공부도 하고 시사 라디오도 들어보던 때가 있었는데. 나는 요새 매일같이 듣던 성시경의 희재를 마지막 곡으로 설정해두었다. 이것만 끝나면 오랜만에 영어공부 오디오 클립이라도 열어봐야지 하고. 그런데 희재가 끝나자 또 다른 곡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흘러가는 대로 넊을 놓고 창문을 바라보았다. 뉴스를 보면 요새 해고당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던데. 동료들은 잘 쉬고 돌아왔을까. 다들 연휴 동안 어떻게 지내왔을까. 그리고 혹시 내가 예상하지 못한 큰일이 기다리고 있진 않을까.


 오랜만이라서 그런지 크고 웅장해 보이는 회사 건물. 곧 내려마실 커피와 열어볼 메일들을 생각했다. 버스가 멈춰 섰다. 무척이나 부산해 보이는 로비. 검색대 뒤편에는 열화상 카메라와 보안요원들이 출근하는 우리들을 지켜보는 중이다. 나는 사원증을 게이트 태그에 갖다대었다. 그리고 삑 하는 소리와 함께 열리는 문 틈으로 들어섰다. 설레고 무거운 발걸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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