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가 날 사육하고 조련해주는 것이 좋다.
사내식당에서 어떤 걸 먹을지 고민하면서, 역시 집보다 회사가 낫다는 생각을 했다. 영양사님이 식단을 준비해주니까. 이번 주는 업무가 꽤 여유로워서 큰 걱정이 없다. 밥을 먹고 점심시간 동안 엎드려 잤다. 최근에 든 습관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지만, 이상하게 꼭 회사에서 낮잠을 자면 쾌락이 차오른다. 마치 프로포폴을 맞은 느낌이랄까. 놀라운 건 그 쾌락의 정도가 이제껏 경험한 모든 것 보다 가장 높아서, 만약 우리가 쾌락을 위해 살아간다 하면, 나는 점심시간에 낮잠을 자기 위해 회사를 다니고, 남들 몰래 그 쾌락을 즐기는 셈이다.
집에서 주말에 한두 시간씩 낮잠을 자도 그것보단 약하다. 회사 내에서도 꼭 내 자리여야 한다. 자세도 엎드려야만 한다. 점심시간에 식사와 양치질을 모두 끝내면 5분에서 20분 정도가 남는다. 잠 못 들고 눈만 감고 있을 때도 있다. 그럴 때면 잠든 만큼은 아니라도 개운한 기분은 느낄 수 있다. 커피 냅을 들은 적 있어서, 자기 직전 커피를 마시고 잠들어 본 적도 있다. 낮잠을 자는 동안 뇌가 노폐물을 청소를 하고하면, 카페인이 효력을 발휘하는 10-20분 뒤에 딱 맞춰 상쾌한 기상을 할 수 있다고.
작년 까지만 해도 점심시간에도 끊임없이 일을 했고 그런 스스로의 모습이 좋았다. 하지만 너무 바쁘고 지친 날 잠깐 잤다가 뜻밖의 쾌락을 느꼈다. 그 이후 여유가 있으면 낮잠을 잔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사무실에 불이 켜지면 잠의 부작용으로 저림의 고통을 몇 분간 참아낸 뒤 바로 모니터를 켜고 일을 한다. 산뜻한 기분으로.
예전엔 회사에서 낮잠을 자는 사람들이 달갑지 않았다.
일을 싫어하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는 편이다. 일상의 반이 넘는 시간을 싫어하며 보낸다는 게 좋은 삶은 아니니까. 그들을 미워했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사람마다 가치관이 다르니까. 가족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집에 잘 내려가지 않는 날 경멸할 수 있다. 따뜻한 관계를 중시하는 사람들은 일 하지 않는 자들은 다 해고되었으면 좋겠다 말했던 날 욕할 수 있다. 그들이 만약 내 얼굴에 대고 비난한다 해도 이젠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은 고쳐 쓰는 게 아니라서 그들을 미워하고 강요한다고 해서 고통받는 건 나일뿐이다. 게다가 나 역시 올바른 사람은 아니니까. 그들에게도 정의가 있고 배경이 있다. 연차가 쌓일수록 타인의 비난을 받아들이면서도 내 결정을 내리는 법을 배운다.
오후에 여후배가 내게 오늘 여유롭지 않냐고 했다. 그렇다고 했다. 그러자 회사 근처 내과로 가서 독감 예방접종을 맞으라고 했다. 옆에 있던 여선배도 오늘이 기회라며 꼭 가라고 했다. 그럴까요? 하고 가볍게 돌아섰는데. 그들은 입술을 닫고 내가 실제로 병원을 갈 것인지 쳐다보고 있었다. 가지 않으면 그들에게 양쪽으로 머리채를 잡힌 채 끌려갈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이렇게 날 생각해주는 사람이 많다고 너스레를 떨자 후배님은 우리들을 위한 것이라고, 빨리 받고 오라고 말했다. 그렇게 나는 남선배랑 둘이서 강제로 주사를 맞고 왔다.
스스로를 불규칙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관심 없는 일상의 자잘한 일들을 놓치는 편이다. 그래서 주사를 맞고 돌아오는 도중, 회사를 다녀서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밥도 주고 돈도 주고 건강도 챙겨주고. 내일은 건강검진도 받아야 한다. 그렇게 날 사육하고 조련해주는 것이 좋다.
물론 언젠간 퇴직할 날이 있다. 같이 울고 웃던 사람들과 더는 연락할 일도 없겠지. 회사에 삶을 바친 후 쓸쓸한 노후를 맞는 사람들 얘기도 여럿 들었다. 회사에 목숨 걸지 말라고 한다. 많은 것들을 놓칠 것이고 후회할 것이라고. 나가면 성과나 밤샌 나날들이 무슨 의미겠냐고. 일은 주는 만큼만 하고 부동산이나 주식에 관심을 가지는 게 더 인생에 도움이 될 것이라 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회사는 스물다섯, 철없고 꼬질꼬질하던 내게 스스로를 가꾸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타인을 대하는 태도와 그들과 내 가치관을 조율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세상에 관한 광범위한 문화와 정보를 알려주었고 어떤 게 좋고 나쁨을 판단할 수 있는 사고방식을 알려주었다. 무엇보다 삶을 해쳐나갈 돈과 능력 그리고 격려를 건네받는다. 물론 회사라는 건 가상의 종교 같은 것임을 안다. 그럼에도 분명 그 공통의 믿음 아래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과 상호작용하며 '나'라는 것이 만들어지는 중이다.
삶은 길다. 그래서 우리의 결심과 태도는 영원하지 않고 늘 더 나은 방향으로만 흐르는 건 아니다. 젊은 날의 열정을 후회하며 내게 믿지 말라 충고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앞으로도 지금처럼 좋은 마음을 유지하며 회사를 다니고 싶다. 그리고 이곳에서 그들과 더 나은 사람이 되는 법을 계속 배워가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