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은 예고되었고, 수업은 얼마 남지 않았다.
오늘, 3주 만에 필라테스를 다녀왔다. 1주 전에는 아버지 제사로 창원을 내려갔고, 2주 전에는 아버지 제사인 줄 착각하고 창원을 내려갔기 때문이다. 물론 그 날은 곧바로 올라와서, 토요일 1시 수업을 갈 수 있었지만, 금요일 하루를 기차에서 보낸 자괴감과 피곤 때문에 온종일 집에서 하루를 보냈었다.
사실, 돈을 받는 회사 일이 아닌 이상, 나머지 것들은 꼭 하지 않아도 된다. 의무감 없는 일들. 그런 일을 하기 전에는, 스스로의 기분을 가늠해 보곤 한다. 하고 싶은지, 하기 싫은지. 만약 싫다면 다음날 후회하지 않을 건지. 오늘은 운동을 하고 싶었다. 무려 2주를 빠졌다는 죄책감이 들기도 했고, 평소와 다르게 몸이 근질근질했기 때문이다. 나는 또 생각에 빠져들었다. 왜 몸이 근질근질할까. 추적 끝에, 어제 회사 창고에서 오랜만의 막노동을 했고 그 관성의 법칙 때문이란 걸 알아냈다. 그래. 오늘은 할 기분이 생겼다.
토요일. 필라테스 수업을 하는 날이면, 아침부터 많은 의식과 준비가 필요하다.
평소처럼 새벽에 눈을 뜬 뒤 다시 감고 6시까지 버텼다가, 점점 밝아지는 창문을 조명삼아 소파에 누워 시간을 때웠다. 회사에 동갑내기 프랑스인이 '어서 와 한국은 처음이지'에 나왔다고 해서 찾아보았다. 그리고 엑스트라로 나온 동기 얼굴을 캡처해 보여주며 놀렸다. 동기들은 주말 아침부터 뜬금없이 카톡을 보낸 이유를 모른다. 이게 다 필라테스 때문이란 걸.
평소처럼 이른 점심도 먹지 않는다. 운동 직전 물을 세 컵이나 마셨다가, 엎드린 채 바벨에 배를 눌린 자세를 시도하다 토할 뻔했었다. 평소 먹지 않는 과자로 배를 조금 채운 뒤 포만감에 힘입어 다시 잠들었다.
드디어 12시 50분이 되어서, 트랙탑 주머니에 헤어밴드를 구겨 넣고 밖을 나섰다. 없으면 땀을 꽤 많이 흘려서 눈을 뜨지 못하고, 기구와 바닥에 물난리가 나는 참사가 생긴다. 워낙 많이 흘려서 정말 물처럼 짠맛도 없고 냄새도 나지 않지만, 땀은 땀이다. 웹사이트에서 헤어밴드를 검색한 뒤, 회사생활로 체득한 나름의 의사결정을 해보았다. 어떤 게 더 괴로운지 따지는 방식이다. 땀을 흘려서 창피와 모멸감을 계속 느끼는 게 나은지, 전문가도 아닌데 헤어밴드를 써 낯부끄러운 게 나은지. 결국 개인의 모멸감 방지와 공공의 이익을 위해 헤어밴드를 택했고 아주 만족한다.
평소 약속 시간보다 과하게 먼저 도착하는 걸 선호하지만, 필라테스 학원에는 시간을 맞춰 간다. 여자 회원들이 부담스러워하기 때문이다. 재빨리 방 안으로 들어가서 몸을 숨긴 뒤 강사님이 오길 기다리면, 아저씨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50대도 있고 30대도 있다. 꽤 서먹한 사이라 서로 대화를 주고받은 적이 없다. 아마 그들 역시 어느 날 허리가 아파서 병원을 갔었고 주변에서 필라테스를 권유받아 용기를 내 찾아왔을 것이다. 궁금하지만, 말을 걸고 싶진 않다.
70분 간의 수업은 혹독한데 특히 허벅지가 타들어가는 스쿼트 동작이 두렵다. 반면 스트레칭과 교정은 좋다. 보통 1시 30분쯤 시계를 쳐다보고 절망하고, 1시 50분쯤 만감이 교차한다. 그리고 2시 10분에 물 두 잔 마시고 난간에 의지해 초라하게 퇴장한다.
학원을 나와 개운한 기분으로 헤어밴드를 손가락에 건 채 돌리며 동네를 걸었다. 휙휙 돌아가는 헤어밴드에서 땀이 튕겨나간다. 오늘은 첫날보다 몸이 쑤시지 않는다. 자세도 제법 나아졌고 부들부들 떨던 다리도 조금 차분해졌다. 저녁에 일기를 쓰러 카페를 갈 생각이다. 그래서 늘 들려 숨을 고르던 동네 스타벅스를 가지 않았다. 그리고 치킨을 시켜먹은 뒤 소파에 누워 긴 잠을 잤다.
어제, 금요일 저녁. 10시에 시작할 전화영어 수업을 온종일 기다렸다. 시간과 날짜를 잘못 잡아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유튜브를 보다 휴대폰을 내려놓고, 그림을 끄적이다 종이를 접고, 올해 겨울에 살 외투를 찾아보다 노트북을 닫았다. 겨우 9시 30분이 되었을 때, 회사에서 출력한 교재를 펼쳐 큰 목소리로 영어 연습을 했다. 말이 유창하게 나올 때까지. 선생님에게 칭찬받고 싶기 때문이다.
최근에 본 토익스피킹 성적에 충격을 받고, 긴 휴가를 마친 뒤 전화영어를 신청했다. 첫 수업에는 말이 나오지 않아서, 어버버 말한 후 전화를 끊고 자괴감을 맞이했었다. 하지만 예습을 하다 보니, 그저 그동안 너무 내팽개쳐서 낯설어진 것뿐이란 걸 깨달았다. 선생님은 급격히 말문이 트이는 내 모습에 옹알이를 하는 아기를 본 듯 감명을 받고 있다.
필리핀에 사는 23살 선생님은 과도하게 상냥해서, 끊임없이 내 일상을 물어보고 기억하며 필요 이상의 격려와 용기를 북돋아주려고 노력한다. 33살의 나는 사실, 그녀가 전해주는 격언과 조언에 오류를 느끼고 있지만('높이 뛰는 말이 멀리 간다' 등 이상한 말을 한다.), 그녀의 과도한 리액션과 따뜻한 말을 건네고자 노력하는 모습이 좋다. 아저씨들은 걸그룹을 좋아한다던데, 이런 기분일까. 나이가 들수록, 예전엔 무심코 받아들였던 상냥한 사람들의 밝은 리액션, 활기찬 모습이 꽤 소중하게 다가온다. 그녀의 활기에 힘입어 나도 이런저런 소소한 얘기들을 신나게 꺼내게 되었다.
그럼에도 전화영어 수업 안내문 카톡이 오는 날이면, 심각한 고민에 휩싸인다.
하기 싫어서. 그런 건 나이를 먹어도 변하지 않나 보다. 돈을 받는 일이 아닌 이상, 꼭 해야 할 필요는 없다. 핑계도 필요 없다. 기분에 따라 전화를 받지 않으려다가도, 막상 어린 그녀가 섭섭해하거나 자기를 탓하진 않을까 걱정이 되어서 수업을 듣게 된다. 전화영어 수업은 다음 주면 끝난다. 그 상냥한 선생님과도 안녕이다. 필라테스는 내년 2월까지만 다니기로 했다. 이사를 갈 생각이라서. 세상엔 필라테스 남자반이 잘 없어서, 이제 영원히 안 하게 될지도 모른다. 다른 운동이 좋아질 수도 있으니까. 내가 시작한 가벼운 일들. 작별은 예고되었고, 수업은 얼마 남지 않았다.
ps. 내일 오전 11시에 온라인으로 학교 수업 일일강사를 하게 되었다. 조금 설렌다. 어서 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