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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인환 Dec 26. 2020

오늘, 글 없는 삶 그리고 도로를 벗어난 곳.

쌓아온 길. 분명한 지표이기도 하지만, 주위를 가린 가드레일이기도 하다.

 지난 1년 간 코로나로 인해 생활이 확연히 달라졌다. 길가에 보이는 현수막에는 함께 고통을 이겨내자 적혀있지만 사실 그 마음이 온전히 와 닿지 않는다. 내겐 특별히 달라진 게 없으니까. 그러다 한 달 전, 친구를 만나기 2시간 전에 들린 카페에 의자들이 뒤집힌 걸 보았다. 내가 있을 곳이 없었다. 두 시간 동안 겨울 길을 방황했던 그 날부터 이유 없는 외출을 하지 않았고, 글을 쓰지 않았다.




 평일 재택근무를 하는 날이면, 아침에 빨래를 돌려놓고 동네를 나선다. 그리고 커피 한잔을 사들고 돌아와 노트북을 켠다. 처음에는 막연한 불안에 저녁이 넘어갈 때까지 모니터를 붙잡고 있었지만, 지금은 클래식을 틀어놓거나 가요를 따라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긴 업무 통화를 해야 할 때면 소파에 드러눕기도 했다. 생각보다 쉽게 적응했다. 다만, 일을 하며 랩을 따라 불렀다는 것. 그리고 소파에 누워있기도 했다는 비밀을 공유할 상대가 없다는 게 아쉽다. 해는 금세 저물어버려서 열어 놓은 창문은 닫은 것과 다름 없어졌다. 그럴 때면 커튼을 걸어 잠근 채 조명 빛을 쐬며 하루를 마감했다. 아직 저녁 8시. 그림을 그려보다 감흥이 떨어져서 태블릿을 닫고, 글을 쓰려다 의욕이 떨어져서 노트북을 닫고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글로 쓸 이야기는 참 많다. 최근에 회사에서 MBTI를 했던 일(어느새 나는 MBTI 박사가 되어버렸다.), 읽었던 책 이야기(로봇 같은 사람은 분열성 인격이라고 했다.), 갑작스러운 선다방 유튜브 스트리밍으로 당했던 댓글 팩폭(궁금해서 들어가 봤다가 저 남자 노잼이라고, 인스타도 노잼이라고 수십 명에게 실시간 팩폭 당하는 걸 눈앞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주머니 없이 덮개만 달린 의문의 코트(왜 덮개만 붙여놓았을까. 만든 사람에게 찾아가 물어보고 싶었다.), 그 밖에도 회사 근처로 이사를 가려다 포기한 일, 머리를 장발로 기르려다 다시 자른 것, 요새 급속도로 살이 찌고 있단 것. 하지만 이상하게도 의욕이 없어 며칠 동안을 노트북을 켜고 닫았다. 그 이유를 알 수 없다.




 크리스마스이브, 우리 부서는 팀 간 이동이 잦아, 매년 이맘때 즘 일주일 간 공사를 한다. 마지막 출근 날 짐을 포장하고 종무식을 치른 뒤 가벼운 점심을 먹고 집으로 돌아왔다. 소파에 누워 멍 때리다가 집 밖을 나와 마트로 갔다. 늘 겪는 크리스마스 특유의 미적지근한 기분에 홀려 와인을 샀다. 마침 봉투를 제공하지 않겠다는 안내방송을 듣고 병 두 개를 양손에 들고 나섰다. 그래서인지 길가에서 마주치는 사람들이 내 손을 계속 쳐다봤다. 집에서 유튜브를 보며 와인을 계속 들이켜니 금세 어지러워졌다. 그 기분이 썩 좋진 않다.


 오늘은, 오전에 커피를 사러 간다는 명목으로 밖을 나섰다. 꽤 상쾌했고, 오후에 한 번 더 밖을 나섰다. 가벼운 산책을 하려고. 언덕길을 걷다가 등산로로 빠지는 골목길을 발견했다. 예전에 둘레길을 도전했다가 산속에서 한 밤중에 길을 잃은 적이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누가 다가올까 전력으로 달렸고, 피곤한 일요일 밤을 지냈었다. 반면 오늘은 아직 해가 저물지 않았고, 무료한 휴일 가볍게 길을 잃어도 재미있을 것 같다. 도로를 벗어나 등산길을 걷다 보니 금세 낮은 봉우리에 닿았다. 낡은 주택들이 아스팔트 위로 쏟아버린 듯 흩뿌려진 풍경. 땀이 맺힐 때 즘 내려온 길은 낯설다. 예상한 대로 길을 잃었다. 휴대폰을 꺼내면 쉽게 돌아올 수 있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다. 처음 보는 동네가 꽤 신비한 모험의 세계 같아서.


 며칠  선배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생각한 대로 사람들을 움직일  없다고. 나는 책에서  대로 그들 생각의 흐름에 벽을 치면 된다고 말했다. 질주하는 생각 앞에 사선으로 하나씩 장애물을 두고 몰아가면 어느 정도는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  있지 않겠냐고. 그런데 지금, 도로를 벗어나 정처 없이 길을 헤매는 나는 반대로 가드레일을 살짝 벗어난 셈이다. 문득 생각이 들었다. 길이라는 . 분명하고 안전한 지표이기도 하지만 스스로를 가둬놓은 가드레일이기도 하다는 . 갑작스러운 코로나가 쳐둔 장애물로 인해 알게  것이 있다. 나는  사람들에게 목말라한다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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