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방으로 난 창가에 매달린 레이스 커튼이 살랑살랑 대는 일요일. 남편은 일이 있다며 출근했다. 식탁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다 머그잔을 들고는 크지도 너무 작지도 않은 책장 앞을 서성였다. 읽기는 읽었으되 가물가물한 내용의 많은 제목들. 외국소설보다는 국내 작가들에게 손이 더 갔다.
하나하나 들춰보며, '맞아 이런 내용들이었어'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성석제와 김경욱은 결코 무겁지도 너무 가볍지도 않은 위트로 훈훈함을 주었었지. 누구나 알고 있고 겪고 있는 평범하고 소소한 사건들을 어쩜 이토록 기발한 솜씨로 웃게도 하고 가슴 한켠을 쩌릿하게 만들어내는지.
그러다 최인호의 <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에 눈이 쫑긋 했다. 이 책을 내가 읽었을 때는 작가가 살아 계셨는데, 이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님에 크게 더 열렸는지도. 물론 더 먼저 돌아가신 작가는 셀 수 없이 많지만.
들춰보니 곳곳에 밑줄과 함께 귀퉁이가 여러 군데 접혀있다. 페이지 여백엔 만약 읽고 난 느낌을 정리해서 쓴다면 이 문장에 특히 더 생각을 해 보자며 외국작가의 이름과 함께 물음표와 느낌표가 표시되어 있다. 하지만 그때 그 시간엔 쓰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이유는 생각나지 않는다. 마음먹고 그 기분을 되살려 정리해 본다. 제목을 무엇으로 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일단 시작하기로.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소설 제목에서 암시하듯 첫 페이지 첫 문장부터 무척이나 낯익은 문체로 시작한다. 어쩌면 그동안 너무 많은 책과 너무 많은 영화를 보아온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잔상이 문제가 된 것인지. 아니면 최인호 작가도 나와 같은 잔상들을 모아 모아 하나의 큰 그림으로 완성한 소설이라서 그러한지,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는 낯익은 문체로 어디에선가 분명히 보았던 그 장면들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카프카의 변신이 보이고, 핸드폰이라는 영화가 생각나며, 매트릭스라는 가상현실이 뒤섞였다.
지구촌에는 최첨단 과학으로 또는 병리학적으로 밝혀지지 않는 무슨무슨 증후군이라는 희귀 병을 앓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다. 그중에 ‘카그라스’ 증후군이 있다. 이 병의 특징은 자신이 알고 지내는 가족이나 친지들의 얼굴 모습은 분명히 기억하며 인식은 하지만 감정은 느끼지 못하는 증상이다. 한 집에 사는 아버지 엄마의 모습이나 얼굴은 분명 자신의 부모이지만 그 사람들은 진짜 부모가 아니라 자신의 부모를 흉내 내는 다른 사람일 것이라고 믿는 증후군.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안에는 바로 이 증후군을 보여준다.
소설 속 K는 아침에 자신이 평소와 다른 모습으로 침대에 누워 있음을 알게 된다. 이 문장부터 이미 낯익게 다가온다. 카프카의 변신처럼 커다란 벌레로 변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뉘앙스로 전개된다. 주인공 K의 아내는 분명 모습은 자신의 아내가 맞다. 간밤에 뜨거움을 나눴지만 눈을 뜬 아침은, 섬뜩한 냉혈동물과 잠자리를 한 것 같은 기분을 지울 수 없다. 껄끄러운 의심은 계속 이어진다. 거기다 딸은 배를 누르면 똑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인형을 닮아 있다.
주인공 K는 낯익은 사람들 틈에 자신이 존재함은 여실히 느끼지만 과연 누가 누구를 속이는지 알 수 없는 혼란의 근원을 찾아 나선다. 그 여정 안에는 여장남자인 교수가 나오며, 성인방에서 일하는 세일러 문으로 변장한 매춘부. 그녀는 한심한 남자들을 짧은 시간에 구원하듯, 마술봉으로 세상을 구원하고 싶어 하는 만화 같은 이야기도 있다. 한때 잘 나가는 배우였으며 몸매가 좋았던 누나가 왜 폭식증을 앓고 있으며, 어린 날에 내 안에서 살아계신 예수가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복잡한 현실을 해결하며 살아 있는지. 백 년 전에도 문제가 되었으며 백 년 후에도 벌어질 수 있는 인간의 문제들을 주인공은 혼돈 속에서 캐묻고 따진다.
여기까지 쓰고, 저 위에 밝혔듯이 여백에 써 있던 외국작가 <잉그마르 베르히만>에 대해 설명을 하고 싶다. 왜냐면 예전에 이 작가가 걸작 <페르소나>를 쓰게 된 동기를 설명하는 글이 그 시간에 생각이 났었고. 최인호의 이 작품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을 수 있지만 내 머릿 속에 저장된 베르히만이 계속 떠나지 않기에 여백에 끄적였을 것이다. 간추려 적어본다.
"1965년, 잉그마르 베르히만은 내이염을 앓았다. 이 병은 귀의 안쪽 깊은 곳에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생기는데 잠이 들었을 때조차도 끊임없이 어지럼증을 느끼는 병이다. 베르히만은 현기증을 최소화시키기 위해 머리를 고정시킨 채 의사가 천장에 찍어준 점만을 응시하면서 몇 주 동안을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 있었지만, 눈을 한 번 다른 데 돌리기만 해도 온 방이 빙글빙글 도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천장의 점에 집중하기 위해 베르히만은 두 개의 얼굴이 한데 합쳐진 이미지를 상상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 병에서 회복된 후 창밖을 내다보다가 베르히만은 나란히 앉아 서로의 손을 비교해보고 있는 간호사와 환자를 보았다. 간호사와 환자의 관계, 그리고 겹쳐지는 얼굴이라는 두 개의 이미지는 베르히만의 걸작 <페르소나>의 전제가 되었다"는.
최인호 작가도 지독한 병마와 싸우며 육체는 비록 아프지만 정신은 또렷하여 살아오며 잠깐씩 스쳐가는 영감이나 직감이 뜻밖의 발견으로 이어져 소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쓰게 된 동기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상상에 도달한다.
길어지고 있다. 마무리를 해야겠다.
주인공 K가 처한 상황이 아이러니한 것만은 틀림없다. 소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가 주는 아이러니의 의미를 곱씹어 보니, 지금의 핵가족으로 오는 과정에서, 많아야 4인 아니면 3인 가족이데, 이마저도 가족이라는 테두리는 점점 허물어지고 오롯이 '핵'만 돌아다닌다. 가족이란 의미조차 어디에서 근원을 찾아야 할지 모른다. 각자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 골똘하다. 어른 아이 할것 없이 핸폰만 죽어라 파고 들여다보는 사람들. 어디서나 고개숙여 인터넷에 몰두한다. 가끔 그들이 고개를 들지만 대화는 할 수 없다. 단절된 너와 나. 말도 표정도 카톡으로만 한다. 결코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는 가족. 낯익은 타인들만 사는 도시.
내 느낌일 뿐이다.
가장 기억에 남는 문장은 이것이다. K가 극장에 들어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포르투갈의 작가 사마라구의 장편소설을 영화화한 작품 <눈먼 자들의 도시>를 본 감상을 말하는 부분이다.
“... 눈먼 자들의 도시. 제목 자체가 불쾌하다고 K는 생각하였다.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고 문제성을 야기하려는 자칭 예술가의 호사 취미 같은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 문장을 그냥 흘려 읽어버릴 수도 있지만 나는 작가가 소설의 제목을 왜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로 정했으며 더불어 독자들에게 자신의 책 제목에 대해서 사마라구를 빚대어 신랄하게 혹은 스스로 겸손하게 평하는 것 같았기 때문에 쉽게 지나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