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범은 될 수 없어도 견본 정도는

by 이영희


근본을 먼저 취하지 않고 지엽부터 준비하는 사람들이 있다.

옛날. 옛날에 어느 스님은 훌륭한 법사가 되면 말을 타고 법문 하러 다녀야 하기 때문에 말을 타는 법을 먼저 배웠다. 또 연회에 초대를 받아가면 노래도 한 곡조 뽑을 줄 알아야 한다고 노래도 먼저 배웠다. 그러다가 정작 법사가 갖춰야 할 공부는 하지 못했다. 그래서 먼저 배웠던 것들이 쓸모없이 되어버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스님은 누군가에게 모범은 될 수 없어도 견본 정도는 되었다.

나처럼 하면 성공이 아니라, 이렇게 밖에 될 수 없다는 견본 말이다.


또한 몹시 나를 찔리게 한다.

저 스님이 밉상은 아니다. 날날이 땡중이지만 나름 지엽을 열심히 갈고닦았다.

파계승이 되어도 어느 자리에 가더라도 제법 놀 줄 아는 사람으로 불려질 것이다. 요즘 시대라면 영화배우나 TV 탈랜트는 무난하게 할 것 같다.

절반의 성공쯤으로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나는 누군가에게 스님 같은 견본이라도 되었던가.

타고난 재능도 없으면서 도구만 잔뜩 사들여 놓았다. 수채화 그리는 법, 뎃생. 유화 그리는 법, 초상화 기법 책 등등. 거기다 오일파스텔, 소프트 파스텔, 60색의 색연필, 열두 자루의 전문가 스케치 연필, 아크릴 물감, 수채화물감. 등등. 준비는 널널하다. 그래도 마음잡고 시작도 안 하는 것보단 낫다며 자위하며 늘어놓은 도구 하나를 집어 이젤 앞에 다가간다.


거기에 읽었다고 쌓아 놓은 저 책들은 어찌할 건가.

제대로 꼭꼭 씹어 소화시킨 문장들이 과연 내 머리 안에 얼마큼 저장되어 있을까. 5%나 될까.

그러면서 누구나 도전할 수 있다는 브런치 작가로, 자신만의 책을 엮을 수 있다는 쏠쏠한 이곳의 제안에 눈과 귀를 열어보았다. 하지만 어떠했나.

계통도 없고 한 가지 주제로만 구별 짓기도 어렵다.


그래도 이만큼 글이 모아진 것이 어디냐고, 살짝 위로의 말을 건네는 사람이 있고, 이제라도 한 가지 확실한 주제를 정해 놓고 써보라는 사람도 있다.


타의 모범이 아닌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견본은 확실하게 될 듯하다.


모범적 쓰기

모범적 그림

모범적 가장

모범적 아

모범적 자식

그런데 이 '모범'에서 느껴지는 답답함은 어디서 솔솔 풍기는 걸까.

지엽으로, 날날이로 살다 갈 운명의 지도가 내 팔자에 이미 그려져 있었으며, 진하게 깊이 새겨져 있음이 틀림없다.

그렇다고 도저히 못할 일도 쉽게 단념할 것들도 아니다. 견본으로 남을지라도 내가 갈 수 있는 데까지는 가야지.


훌륭한 법사는 아니 되었지만 스님처럼 말을 타던 노래를 하던, 잘할 수 있는 것이 하나라도 남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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