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더위나 추위 때문에 책을 펴 들기 힘들다는 말도 못 하게 된 지 꽤 오래다. 무더위에도, 얼어붙는 한파에도 쾌적한 공간은 집안에서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여의치 않다면 카페든 어디든 찾아갈 수 있겠다.
중요한 것은 그날그날의 기운만 잘 다스리면 된다. 몰입해서 읽다가 눈이 밝아져, 생각을 붙들어 쓰기까지 연결될 수 있으면 더 무엇을 바랄까.
요즘은 인터넷으로 책을 주문하는 편리함도 좋지만 바쁘지 않은 나는, 서점에 가서 직접 종이의 질감을 느끼며 신간의 따끈따끈한 햇문장을 보는 풋풋함도 좋거니와 사람들의 눈길에서 슬쩍 비껴간, 두툼해서 무게감까지 느껴지는 것에 오래 머물기도 한다.
다시 읽어도 새롭게 다가오는 조선 후기의 실학자 위백규(1727~1798)의 <김 섭지에게 줌>, 그리고 이탁오(1527~1602)의 문장 쓰기에 대한 가르침을 옮겨본다.
** 바람을 추월하고 번개를 뒤쫓는 천리마는 결코 암수나 털 색깔 따위의 외관에 있지 아니하고, 소리가 상응하고 같은 기운끼리 짝하게 만드는 작품을 내는 작가는 절대로 문자나 형식에만 얽매이는 답답한 인간들 사이에 있지 아니하며, 바람이 물 위를 스칠 때 퍼져나가는 물무늬와 같은 아름다움은 절대로 한 글자 한 구절의 기특함 속에 있지 아니하다. 엄밀한 결구나 적절한 대우, 이치나 법도에 합당한가의 여부, 수미가 상응하고 허실이 번갈아 일어나게 하는 등등의 갖가지 병폐는 모두 글 짓는 방법으로 논의되지만 천하의 으뜸가는 문장에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 --- 이지(李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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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지으려는 사람은 먼저 독서의 방법을 알아야 한다. 우물을 파는 사람은 먼저 석 자의 흙을 파서 축축한 기운을 만나게 되면 또 더 파서 여섯 자 깊이에 이르러 그 탁한 물을 퍼낸다. 또 파서 아홉 자의 샘물에 이르러서야 달고 맑은 물을 길어낸다. 마침내 물을 끌어올려 천천히 음미해보면, 그 자연의 맛이 그저 물이라 하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또다시 배불리 마셔 그 정기가 오장육부와 피부에 젖어듦을 느낀다. 그런 뒤에 이를 퍼서 글로 짓는다. 이는 마치 물을 길어다가 옷을 빨고 땅에 물을 주어 어디든지 쓰지 못할 데가 없는 것과 같다. 고작 석자 아래의 젖은 흙을 가져다가 부엌 아궁이의 부서진 모서리나 바르면서 우물을 판 보람으로 여기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할 것이다. -- 위백규<김섭지에게 줌>
이렇게 옮긴 글이 내게는 좋다고 해도 남에게 꼭 좋은 것은 아니다. 이미 더 훌륭한 글을 섭렵한 분들이 보면 싱겁게 웃고 지나갈 수도 있다. 하지만 좋은 문장에 늘 목마른 나에겐 더없이 달고 맑은 물맛이다. 목은 계속 마를 것이고 제대로 깊게 우물 파는 일에 게을러지지 않기만을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