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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카 Jul 07. 2016

미셸 우엘벡, <복종>

프랑스에 이슬람 정권이 들어서다!

<복종>은 이슬람 혐오주의 소설이 아니다. 그러나 원한다면, 
우리에게는 이슬람 혐오주의 작품을 쓸 권리가 있다.


<복종>. 미셸 우엘벡의 신작은 다소 도발적인 저자 인터뷰를 전면에 내세운다. ‘우리에게는 이슬람 혐오주의 작품을 쓸 권리가 있다’니! 지금 유럽에 넘실거리는 이슬람 공포증을 다분히 염두에 둔 듯한 발언이다. 단순히 문화와 이념에 대한 갈등 뿐만 아니다. IS는 서구 세력에 보다 실질적인 위협이 되고 있다. 소설의 발간일인 1월 7일 샤를리 에브도에 대한 테러가 자행되었고 11월 13일, 파리의 명소를 겨냥한 또 다른 테러가 발생했다. 유럽 사회는 충격에 휩싸였고 프랑스를 만들고 발전시킨 똘레랑스의 정신은 수백 명의 사상자 앞에 말을 잃는다. 과연 이슬람은 정말 유럽을 복종시키려 할까? <복종>의 미래는 실현 가능한 디스토피아일까?


<복종>은 이슬람 정권이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 진출하고, 결국 집권에 성공하는 어떤 미래를 그린다. 오랜 기간 프랑스의 양대 정당으로 군림해왔던 대중운동연합과 사회당이 1차 투표에서 참패하고, 극우정당인 국민전선과 이슬람 정당인 이슬람박애당 대표가 결선 투표에 진출한다. 극우정당인 국민전선이 집권하는 것을 두려워한 여타 정당들은 이슬람박애당과 연합하고, 이슬람 정권에 대한 뿌리 깊은 우려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는 최초로 무슬림 대통령을 갖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이슬람 정권을 맞이하는 프랑스의 태도다. 뿌리 깊은 우려와는 달리 온건한 성향의 무슬림 대통령을 맞은 프랑스는 변화를 쉽사리 받아들인다. 게다가 가시적인 효과는 놀랍다. 실업률은 감소하고, 이민자 문제 역시 쉽사리 해결되며, 소외 지역의 범죄는 급감한다. 교육 이외의 모든 부분에서 타 정당의 요구를 수용한 이슬람 정권은 종교적 온건함을 강조하는 한편 오일 머니를 뿌려 예상되는 반발을 최소화한다. 이슬람 정권의 집권을 극도로 우려하던 사람들조차 성공적 행보라는 평가를 내놓고, 문제를 고발해야 할 언론은 이미 입을 다문지 오래다. 이렇게 이슬람은 쉽사리 프랑스를 ‘복종’시킨다.



우엘벡이 가정하는 디스토피아는 얼핏 ‘이슬람 정권에 마취된 미래의 유럽’인 것처럼 보인다. 우엘벡이 묘사하는 가상의 시대, 이슬람이 세력을 확장시켜 나가는 광경은 제법 냉소적이면서도 현실적이다. 여성들은 강제적으로 히잡을 쓰고 취업과 교육의 기회를 박탈당해도 주권을 대리 행사하는 자들은 그저 고갤 끄덕인다. 여성 노동력이 빠져나간 노동 시장은 얼핏 놀라운 효율을 되찾은 것처럼 보이고, 온갖 사회적 문제 역시 해결된 것처럼 보이니까. 근본적 변화에 대해선 눈을 감고, 자유와 인권을 위해 목소리를 높여야 할 사람들도 입을 다물고, 우습게도 극우정당인 국민전선만이 그럴 듯한 소리―그녀는 1793년에 발표된 인권과 시민권 선언의 한 장을 인용하며 연설을 끝맺었다. “정부가 민중의 권리를 침해한다면 봉기는 민중과 민중 개개인을 위한 가장 신성한 권리이자 필수 불가결한 의무이다.”―를 한다. 그나마도 국익과 주권을 위한 투쟁이라기보다는 당익을 위한 호소일 뿐이다. 의식 있는 사람들이 입을 다문 프랑스는 쉽사리 이슬람에 제 영혼을 양보한다.


허나 이 디스토피아에서 방점이 찍한 부분은 이슬람이 아니다. ‘마취’다. 화자 프랑수아는 입을 다문 언론에 대해 시종일관 냉소적인 태도로 일관하지만, 지식인인 프랑수아 역시 정치적 격동에 무관심한 것은 마찬가지다. 남성인 프랑수아는 히잡을 쓴 여성들의 몸을 볼 수 없는 것에, 유대인인 여자친구와 헤어지는 것에 슬퍼할 뿐 사회적 변화에 대해서는 놀라울 정도로 무관심하다. 대학에서 계속 강의하기 위해선 이슬람으로 개종해야 하지만 프랑수아가 퇴직을 결심한 것은 대단한 종교적 신념 때문이 아니다. 퇴직해도 어마어마한 연금이 주어지고, 딱히 그럴 필요를 못 느꼈기 때문이다. 내면의 고독과 슬픔으로 침잠하며 현실에 안주하는 그를 보노라면, 문화적(혹은 종교적, 사상적) 정복 세력이 지식인들에게 값비싼 안락을 제공하는 이유를 알 것도 같다. 급진적 개혁 세력이 저항 정신을 가장 쉽사리 누를 수 있는 무기는―무기력과 포기다.


역설적으로 화자가 변화에 대해 무감한 만큼 독자들은 사실적 디스토피아가 제공하는 공포에 몸을 떤다. 유대인들은 쫓기듯 서둘러 프랑스를 떠나고, 카톨릭 혹은 유대교 학교는 종교적 이유로 국가 지원을 받지 못하고, 여성은 남성에게 복종하며, 기본적 인권을 박탈당하는 끔찍한 미래에. 허나 작품 속 대다수의 권력자와 지식인들은 쉽사리 이슬람의 지배를 향유하는 것을 택한다, 최소한의 저항도 없이. 프랑스 정권에 무혈 입성한 이슬람은 더 없이 온유한 통치 방식을 택하지만 그래서 더 두렵다. 비에 젖어들듯 이슬람 정권의 통치에 적응해 가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포기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미래의 세대가 자유와 선택이란 가치를 상상도 못 하고 자라리라는 것도. 우엘벡은 무기력한, 종내에는 지배에 복종할 것을 기쁘게 결의하는 지식인 프랑수아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며 공포를 더욱 자극한다. 


물론 디스토피아를 초래하는 대상이 이슬람인 것은 정치적으로 공정하지 않을지 모른다. 우엘벡은 2001년 공개적으로 이슬람교를 비난해 소송에 휘말린 적도 있거니와, 자신이 반(反)이슬람주의자라는 것을 공공연히 밝혀왔다. 어쩌면 이 소설은 우엘벡 본인의 정치적 성향을 녹여낸 프로파간다(propaganda)일지도 모른다. 혹은 유럽에 만연한 이슬람 공포증을 적시에 이용해 이윤을 추구하는 교활한 행보일지도 모르고. 하지만 우엘벡의 말처럼 작품 속 ‘이슬람’을 ‘카톨릭’―우엘벡은 최초로 이 소설을 구상할 때 카톨릭으로 개종하는 주인공을 상상했다―, 혹은 어떤 이념적 집단으로 바꾼대도 이 소설의 문학적 성취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엘벡은 서늘하고 냉소적인 시선으로 광신이 인간 위에 군림하는 미래를 비웃는다. 어떤 집단으로 갈음해 상상한대도 <복종>이 그리는 디스토피아는 비참하고, 우엘벡은 그것을 조롱할 뿐이다. 온유하고 상냥한, 능력있는 압제라니! 비웃는 우엘벡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복종>이 거둔 성취의 이유를 소재, 혹은 시의성에만 두는 것은 옳지 않다. 디스토피아를 묘사하며 암울한 현재의 모습을 풍자하는 우엘벡의 필치는 훌륭하다. 그가 그려낸 디스토피아 역시, 한 번쯤은 생각할 만한 거리를 제공한다. 지나치게 편향된 시선이라고 느낄지언정, 더없이 불쾌하다는 감상 외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을지라도, 한 번 읽어보길 권한다. 어쩌면 우엘벡이 그리는 이 디스토피아는 현명한 지도자의 가면을 쓰고 성큼 다가와 있을지도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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