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에 대하여
알래스카에도 겨울이 왔다.
귀를 에는 듯한 칼바람. 저도 모르게 덜덜 떨리는 다리. 동상에 걸려 깨져버릴듯한 손발. 알래스카에도 겨울이 왔다.
호수는 진작에 얼어 버렸다. 망치로 퉁퉁. 깨부수려 두드려봐도 꿈쩍 않을 정도다. 거대한 콘크리트가 물길을 덮어버린 듯 하다. 살랑이던 물살은 더 이상 설 곳이 없다. 알래스카의 겨울은 단단하고 엄혹하다.
소년은 아버지의 심부름을 다녀온 온 참이다. 오두막에 들어오자마자 소년의 어머니에게 달려갔다. 가슴팍에 손을 넣었다. 배 위를 문지르며 추위를 녹였다. 겨울만 되면 소년은 어머니에게 들러 붙는다.
"썰매, 썰매."
추위를 녹인 소년이 이젠 아버지를 조른다. 아버지는 오두막 앞에 묶여있는 알래스카 맬러뮤트 두 마리를 푼다. 목줄에 밧줄을 꿴다. 미리 만들어놓은 스키대에 밧줄을 다시 꿴다. 오십키로에 육박하는 맬러뮤트들이 펄쩍펄쩍 뛰기 시작했다.
맬러뮤트 한 쌍은 옆집 마레프 아저씨가 어머니에게 선물한 것이다. 소년이 태어난 지 6개월이 채 안됐을 때였다. 마레프는 소년의 어머니를 꽤 오랫동안 사랑했다. 맬러뮤트 수컷과 암컷을 짝지어 한 쌍을 선물한 데에도 어떤 음흉한 속셈이 있는 지 모른다고 마을 사람들은 쑥덕거렸다. 그러나 소년의 어머니는 마레프의 선물을 호의로만 생각했다.
그 추운 날. 부자(父子)가 호숫가에 섰다. 아버지는 소년의 손에 채찍을 쥐어주었다.
"혼자 다녀와보거라."
아버지의 말에 소년은 채찍을 휘둘렀다. 둔부를 세게 맞은 맬러뮤트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썰매는 호수 한 가운데로 미끄러지며 나아갔다. 나무 이음새 틈이 조악하게 맞닿아 자꾸 썰매에서 덜컹거리는 소리가 났다. 소년은 무서웠으나 아버지에게 사내다운 모숩을 보여주고 싶었다. 채찍을 더욱 세게 휘둘렀다. 맬러뮤트들은 내달렸다.
아버지가 뒤에서 소리치는 게 들렸다. 소년은 아버지가 없는 썰매를 더 빨리 몰았다. 이미 호수 한 가운데를 지났다.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미 건너가고 있었다. 맬러뮤트들은 멈추지 않았다. 아버지의 악다구니가 허공에 울려퍼졌다. 소년의 다리가 덜덜 떨렸다. 손으로 다리를 움켜쥐고 싶었다. 그러나 맬러뮤트들이 너무 빨리 달려서 양손으로 썰매 손잡이를 붙잡지 않으면 안 됐다. 손을 놓는 순간 내동댕이 쳐질 것 같았다. 맬러뮤트는 여전히 멈추지 않는다. 질주한다.
어어. 맬러뮤트 수컷과 암컷의 달리기 속도가 달랐다. 썰매는 한쪽으로 기울어진 채 끌려가고 있었다. 소년의 몸도 기울었다. 아아. 당황한 소년이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썰매는 서편 호숫가로 넘어와 있었다. 소년이 한번도 오지 못했던 곳이었다. 멀리 집 한 채가 보였다. 돌로 지은 집이었다. 통나무로 지은 오두막에서만 살아온 소년에겐 생소한 집이었다.
해는 어느새 뉘엇뉘엇 넘어가고 있었다. 얼어버린 호수에 노을빛이 가득찼다. 어둠이 소년의 눈을 파고 들고 있었다. 맬러뮤트들은 이미 전의를 상실했다. 집으로 돌아갈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어쩔 수 없었다. 소년은 썰매와 맬러뮤트들을 작은 기둥에 맸다. 그리고 돌집을 향해 걸어갔다.
소년은 돌집 앞에 섰다. 작은 창문 틈으로 검은색 머리카락이 흔들리는게 보였다. 소녀였다. 소녀는 스튜를 끓이고 있었다. 소녀의 아버지가 큼지막하게 썰어 삶은 말고기 세 덩이를 연달아 냄비에 던져 넣었다. 소녀가 꺄르르 웃었다. 소녀의 머리카락은 말총처럼 거칠면서도 찰랑거렸다. 그날 소년은 소녀를 보았다.
소년은 진갈색 오동나무로 만든 문을 세게두드렸다. 탕탕 소리에 놀란 소녀의 아버지가 문을 열었다. 말고기를 자를때 쓰던 큼지막한 식칼을 든 채였다. 자초지종을 들은 소녀의 아버지는 소년을 돌집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날 소년은 소녀를 보았다
식탁에 마주 앉은 소녀의 얼굴은 깨끗했다. 직사광선이 피부를 찢는 알래스카에 사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맑았다. 얼굴에 그을린 자국도 없다시피 했다. 소년은 소녀가 참 맑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호호 불어야 돼"
소녀가 붉은 입술을 오므려 말했다.
소년도 소녀를 따라 뜨거운 스튜를 호호 식혔다. 스튜는 달달했다. 서걱서걱 썰어넣은 당근의 식감도 참 좋았다. 표면이 거칠거칠한 빵도 스튜에 적셔 입안에 넣으면 사르르 녹았다.
오늘 하루종일 썰매를 타고 세찬 바람을 맞았던 소년이었다. 뜨스한 스튜가 몸을 덥히자 스르르 잠이 왔다. 소녀는 담요를 가져와 소년의 등에 덮어주었다. 그때 소녀의 검은 머리카락이 소년의 볼가를 스쳤다. 말총처럼 거칠고, 또 찰랑거리는 머릿결이었다. 소년은 주위가 어두워지는 것을 느꼈다. 아주 깊은 잠이 소년을 찾아오고 있었다.
소년은 그날 꿈을 꾸었던 것 같다. 소녀와 알래스카를 떠나는 꿈이었다. 눈이 잘 오지 않는 그곳엔 맬러뮤트 대신 말들이 산다. 척박하지만 따뜻한 곳이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 땀이 줄줄 흐른다. 홑겹으로 입어도 답답하다. 그곳에서 소년은 소녀와 함께 말을 타고 달린다. 말이 뛸 때마다 검은 말총이 흔들린다. 소년은 아주 깊은 꿈을 꾸었다.
다음날 아침. 소년은 잠에서 깼다. 돌집, 그 식탁에 엎드린 채였다. 소녀는 없었다. 소녀의 아버지도 없었다. 식탁엔 식어빠진 스튜만이 남아있었다. 공기가 찼다.
소년은 돌집 밖으로 나갔다. 맬러뮤트들이 작은 기둥에 묶여있었다. 썰매가 옆에 놓여있었다. 돌집은 어제처럼 그곳에 계속 서 있었다. 썰매에 탄 소년은 채찍을 휘둘렀다. 맬러뮤트들이 동쪽으로 내달렸다. 한 두 시간을 달리면 집에 도착할 것 같다, 고 소년은 생각했다. 해는 이미 떠오른 지 오래다.
소년은 소녀 생각을 했다. 꿈 생각을 했다. 알래스카를 떠났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검은 머리카락을 지닌 소녀와 함께 이곳을 떠나면 어떨까. 따뜻한 곳은 어떨까. 저 멀리. 소년의 집이 보이기 시작했다.
<끝>
이 소설은 아래 기사를 모티프로 삼았습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32&aid=0002838713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2&aid=00028314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