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하루 Jun 24. 2020

현관 벨이 무섭게 울려댔다

비대면 시대에  삶과 대면하는 글을 쓴다는 것

이미지 출처: 영화 <도어락>



  가끔 ‘없는 척’을 한다. 예정에 없던 방문자가 혼자 있는 집 현관 벨을 누를 때가 그렇다. 일단 숨을 죽인 채 모든 전자기기 소음을 낮춘다. 인기척이 문에서 멀어지다 끝내 사라질 때까지 무소음 상태를 유지한다. 위험한 인물이 내 집을 노린다고 상상한 건 아니다. 택배기사, 관리실 직원, 동의서를 들고 오는 이웃 등. 대부분 예상 가능한 사람들이니까.      


  그런데도 이토록 ‘없는 척’을 하는 건 ‘대면’에 대한 어색함과 불편함에 있다. 점점 친구와도 통화보다 메시지로 대화하는 게 편해지고, 종종 약속이 취소되는 상황에 안도하는 마음과 비스름하다.     


  띵동, 띵동, 띵동, 띵동….


  얼마 전에도 그랬다. 갑작스러운 벨 소리에 조심스럽게 티브이 소리를 줄였다. 한데 낯선 방문자는 물러서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까치발을 들고 인터폰이 달린 벽으로 다가갔다. 흐릿한 흑백 화면에 60대 남성이 보였다. 아는 얼굴이다. 오가며 인사하던 경비아저씨. 고민 끝에 머리를 헝클어트리고 자다 깬 척하며 문을 열었다. 그런 나를 본 아저씨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아이고, 뭔 일 난 줄 알고 심장이 벌렁벌렁했네.”     


  그의 눈빛은 예고 없이 돌을 맞은 호수처럼 파르르 떨렸다. 일단 침착하게 “어쩐 일로 오셨어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이틀 전에 경비실에 맡긴 택배를 찾으러 오지 않아 직접 올라왔다며, 별일 없으면 됐다고 돌아섰다. 나는 곧장 택배를 찾아오기 위해 운동화를 꿰어 신고 현관을 나섰다. 엘리베이터를 탈 때까지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무슨 일 있으세요?”


  어쩌다 보니 내가 먼저 입을 달싹거리게 됐다. 망설이던 아저씨는 뜻밖의 얘기를 꺼냈다. 몇 달 전에 혼자 살던 아파트 주민이 집에서 자살했는데, 하필이면 자신이 그 현장을 보게 됐단다. 죽은 사람은 뜨문뜨문 오가며 대화하던 사람이라 덧붙였다.


  그 말에 몇몇 얼굴이 뇌리에 스쳤다. 혹시 한여름에도 카디건을 걸치던 노인분이냐고 묻자. 아저씨는 ‘노인이 아니라 70대 남성’이라 강조하며 ‘100세 시대에 70대는 아직 청춘이지 않냐’ 반문하곤 낯빛을 붉혔다. 그에게 ‘70대 남성 자살’은 소리 없이 정확하게 치고 들어온 습격처럼, 한순간 마음이 나자빠지게 만든 사건인 듯했다. 그래서 나는 “맞아요. 70대도 청춘이죠.”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양반 힘든 티가 안 나서 몰랐어. 하긴 요즘은 속을 뒤집어 까서 보여주고 사는 세상 같지만, 정작 진짜 속을 드러내는 게 더 어려워진 세상이니까. 나도 그렇고.”     


  그제야 아저씨는 한결 편안한 얼굴이 됐다. 꾹꾹 담아두고 있던 기억을 누군가에게 꺼내서였을까. 예상컨대 아닐 거다. 그저 내게 이야기하는 동안 자신을 좀먹던 두려움을 정면으로 바라봤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습격당한 후 납작 엎드려있던 마음이 툭툭 자리를 털고 일어설 기운이 조금은 생긴 거랄까.      




  언제부턴가 속내를 발설하지 않는 일에 익숙해졌다. 진지하면 분위기가 오그라들까 봐 대강 웃어넘기는 순간도 많다. 부담스러워서 감정을 숨기는 것이다. 마치 쓸모없어 보이지만 차마 버리지 못하는 물건 때문에 수납공간이 많은 집으로 무리해 이사한 느낌이었다. 처치 곤란한 물건을 수납장에 모조리 쑤셔 넣고 휑한 집구석을 보며 ‘나는 미니멀 리스트다’라고 외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일까. 처음에는 에세이가 써지지 않았다. 며칠간 백지상태였다.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고, 글로 10년 넘게 밥벌이를 해 왔는데, 일기 정도로 치부한 글쓰기에 쩔쩔맸다. 몇몇 사람들은 에세이를 쉽게 쓰는 글, 아무나 쓰는 글이라 표현했다. 때로는 나도 같은 의견이라며 거들기까지 했더랬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에세이는 쉽지만 어려운 글이다. 글로 풀어낸 사적인 이야기를 독자가 공감하고, 나아가 작가의 깨달음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써야 하는 탓이다. 이런 이유로 ‘쓰는 방법’을 배운다고 잘 쓸 수 있는 글이 아니다. 제아무리 현란한 문장력을 지녔다 한들 ‘진심’을 수납장에 고이 모셔두고 있는 한, 그냥 일기나 뻔한 글이 된다. 시청률이 높은 드라마는 매회 다음 화를 궁금하게 만든다. 에세이도 다르지 않다. 작가의 다른 글도 궁금하게 만드는 것이 ‘잘 쓴 에세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잘 쓴 에세이’에는 ‘나를 드러내는 용기’가 필요하다.     


  “사람은 ‘답정너(듣고 싶은 대답을 정해놓고 질문하는 사람)’에요. 감정에 대한 답은 자신 안에 있어요. 그 답을 찾으려면 마음속 복잡한 실타래를 글쓰기 같은 것으로 풀어줘야 해요. 자꾸 표현하다 보면 정리가 되고 해소할 수 있으니까요.”     


  한 유튜브 채널에서 정신과 전문의가 우울하고 힘든 감정에 관해 조언한 내용이다. 굉장히 공감되는 이야기였다. 책을 읽는 이들이 줄어드는 반면 글을 쓰겠단 사람들이 늘어나는 현상. 많은 장르 중 ‘에세이’를 글쓰기 시작 지점으로 삼는 이유. 나는 이런 것들이 ‘사람은 답정너’인 탓이라 헤아려 왔다. 사실 심리적으로 어떤 고통을 느낄 때 정신과를 찾아가는 것도 기가 막힌 조언과 약을 처방받기 위해서라기보다는, ‘털어놓는 것’이 두려워 ‘완벽한 경청’이 준비된 전문가를 찾아가는 게 아닐까 싶었다.     


  에세이는 타인이 아닌 스스로가 자신의 삶을 경청하게 만든다. 내 삶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글로 옮기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나는 용기 있게 에세이를 쓰기로 한 이들이 ‘구체적인 글쓰기’를 하길 바란다. 왜냐하면, 서툰 문장이 가득하더라도 글을 통해 대면한 내 삶이 읽는 이에게 쉽게 그려진다면, 쓰는 사람의 바람과 읽는 이의 목적이 절반씩 채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독자가 작가의 마음과 일치하는 지점을 만나게 된다면 나머지 절반도 금세 메꿔진다.     



     

  띵동.


  오늘은 주저 없이 현관문을 열었다. 한데 아무도 없다. 문 앞에는 먼지 묻은 작은 택배 상자가 비딱하게 놓여있고 누군가의 다급한 발소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나는 상자를 챙겨 들어오면서 미처 확인하지 못한 휴대전화 메시지를 읽었다.      


-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확산됨에 따라 고객님의 안전과 감염 예방을 위해 비대면 배송을 하오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택배사에서 보낸 것이다. 어쩌면 지난 몇 달간 택배기사님은 나와 비슷했으리라. 마주치지 않기 위해 내가 없는 척했던 것처럼, 기사님도 고객과 대면하지 않기 위해 상자가 아슬아슬하게 실린 수레를 끌고 쏜살같이 움직였을 테니까.     


  우린 갈수록 비대면 일상에 익숙해지고 안도할 것이다. 하지만 이럴수록 삶은 대면해야 할 것들이 늘어난다. 나는 에세이가 대면과 비대면 사이의 삶이 복잡하게 얽히지 않도록 도와준다고 믿는다.




  [2020 파·출·소 여름호]에 실린 글입니다. 파주 출판도시 소식지 보러 가기

매거진의 이전글 알람을 끄자, 저절로 눈이 떠졌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