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문장 때문에 계획을 바꾸는 경우가 종종 있다. 글을 쓰는 사람도 광고 글에 자주 낚이는데, 내 경우가 그렇다. 남을 홀리는 글을 써야 할 시간에 남의 글에 홀려서 시간을 탕진한다. 최근에도 그랬다. 저 한 문장을 읽고는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10회짜리 <Why Women Kill>이란 드라마를 1박 2일 동안 정주행 했다. 짜릿한 치정극과 미스터리가 칼칼하게 조리된 이야기. 솔직히 빠가사리 매운탕 같은 자극적인 이야기는 봐도 봐도 재밌다. 문제는 살인자가 누구고 살해당한 사람이 누군지 밝혀지는 마지막 회를 보고 나면, 뻑뻑해진 눈을 두 손으로 감싸고 다른 빠가사리 매운탕 맛 드라마를 찾는다는 것이다. 글쓰기를 제쳐두고 말이다.
뭔가 손에 땀을 쥐는 일이 벌어져야만 몰입하는 편이다. 이런 내가 평범한 일상으로 글을 쓰고, 책을 출간할 수 있던 이유는 ‘마감’ 덕분이다. 스스로 마감을 정해놓거나, 회사에서 마감을 통보하거나, 출판사에서 마감을 정해주거나. 날짜가 정해지면, 그 날짜가 다가올수록 초조해하며 딴짓을 한다. 결국 날짜가 코앞에 다가오면 손에 땀을 쥐고 글을 써 버린다. 이렇게 글을 완성하고 나면 원래 해야 할 일. 그러니까 원래 써야 할 글이었는데도 뿌듯함이 두 배가 된다. 이런 몹쓸 자기만족은 오래가지 못하지만, 그래도 저 몹쓸 기분 탓에 쓰고 또 쓰게 되는 듯하다.
이런 내가 지난 몇 주간 ‘마감’을 정하지 않고 지냈다. 임신 준비와 퇴사 등. 이런저런 사정이 있었는데, 길게 늘어놓기에는 구차해서 생략하겠다. 마감이 사라지자 글 쓰는 일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안 쓰고, 미루고, 결국 포기하는 이야기가 쌓여갔다. 나름 끄적거리는 버릇이 있는 탓에 마음만 바로잡으면 다시 마감하는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믿었는데. 역시 난 그리 독한 인간이 못됐다. 미드 홍보 글 한 줄에 스르륵 무너지는 걸 보면 말이다.
그렇게 빠가사리 매운탕 맛 드라마에 심취해 소파에서 허우적대다 보니 몇 주가 흘렀다. 더는 자극적인 드라마를 찾을 수 없다. 나는 좀 불안해졌다. 시간이 차고 넘치는데 몰입할 드라마가 사라지면 글을 써야 한다. 한데 손도 머리도 굳어서 쓰기가 싫다. 글 쓰는 일이 좋으면서, 글 쓰는 일이 부담되고 싫은 이중적인 마음. 아니, 핑계. 고민하고 괴로워할 시간에 쓰는 게 낫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자꾸만 소파에 몸을 깊숙이 기댈 뿐이었다. 미드, 영드, 일드, 한드. 안 되겠다 이 기회에 중드에 도전해야지. 이런 결심을 할 때쯤 휴대전화 알람이 울렸다. 메일이 왔다. 제목에 ‘작가님, 안녕하세요’라고 적혀있다. 두근두근. 셀레며 내용을 확인해 보니 딸랑 한 줄이다.
‘작가님 책을 읽고 포기했던 글을 다시 쓰려고 합니다.'
한데 저 한 줄에 눈과 마음이 홀린다. 벌떡 일어나 티브이를 껐다. 평소보다 1.5배 빠른 속도로 책상에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아, 그런데 또 쓸 얘기가 없네. 일단 지금까지의 일을 쓰기로 한다. 마감을 정했다. 한 시간 안에 쓸 것. 평소와 달리 술술 써진다. 역시 나는 종종 어떤 문장 때문에 계획을 바꾸는 경우가 생긴다. 내 글보다 남의 글에 자주 낚이기도 한다. 빠가사리 매운탕 맛 드라마를 보다가, 밍밍한 백숙 같은 글을 쓰게 되는 것을 보면 말이다.
글을 쓰며 만나게 되는 가장 반가운 감정은 이런 게 아닐까 싶다. 누군가의 글에 낚이고, 또 다른 누군가는 내 글에 낚이는 것. 끌려다니고, 끌어당기며, 결국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원래의 위치로 돌아오게 만드는 감정들.
안녕하세요. 이하루 작가입니다.
뻔뻔하게 에세이 쓰기 관련 책을 내고 난 후, 에세이 쓰기에 좀 게을러졌었네요. 그렇다고 글쓰기를 멈춘 건 아니었는데 말이죠. 최근에 몇몇 독자분들에게 메일을 받았어요. 책 잘 읽었고, 글쓰기에 도움이 많이 됐다고요. 덕분에 게을러진 일상에 다시 생기를 불어넣는 중입니다. 그 시작으로 글쓰기 강의에 도전해 보려고 해요. 솔직히 말이 강의지. 함께 글을 쓰는 시간이 될 것 같아요. 책을 내고 난 후에 몇몇 강의 의뢰가 들어왔는데요. 코로나 때문에 또는 개인적인 스케줄로 인해 계속 성사되지 않았어요. 이번 강의도 코로나가 걱정이긴 한데요. 그래도 일단 걸어 둡니다.
저와 함께 빠가사리 매운탕 맛 드라마를 보는 대신, 밍밍한 백숙 같은 일상을 글로 바꾸실 분을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