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출처: 드라마 <마더>
그녀의 아버지는 밖에서는 호탕하고 통 큰 사람으로 불렸다. 지독하게 권위적인 남편이자 아버지였던 가정에서와는 달리 말이다. 집 안 온도는 아버지 기분에 의해 오르락내리락하곤 했다. 안타깝게도 현관문을 열고 들어설 때의 눈빛은 늘 매섭고 서늘했으므로, 가족은 그가 귀가할 때면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간혹 술이라도 한잔하고 들어오는 날이면 끈질기게 트집을 잡다가 끝끝내 누군가의 피를 봐야만 잠이 들었다.
그렇게 집은 어둑한 골목길보다 을씨년스러운 곳이었다. 어머니까지 “네가 생기기 전에 이혼했어야 했다”라거나 “너만 아니었으면 자살했을 거다”와 같은 말로 분노와 책임의 화살을 딸에게 돌렸다. 그런 처참한 폭력이 이뤄진 다음 날에도 남편의 식사를 정성껏 준비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공포 그 자체였다.
지켜줄 사람이 없다는 건.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녀는 점점 울지 않게 됐다. 자고 일어나면 꿈이 바뀌는 친구들과 달리, 한 가지 꿈만 염원했다. 빨리 어른이 되어서 집을 탈출하는 것.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어른이 되기 전에 집을 벗어날 수 있었다. 유학을 가게 된 것이다. 바깥에서 묻어온 화를 가정폭력으로 풀던 아버지 사업이 날이 갈수록 번창한 덕분이었다.
해외 생활은 만족스러웠다. 매일 자고 일어나는 공간이 더는 무섭지 않다는 게 큰 위안이 됐다. 하지만 늘 불안했다. 성적이 좋지 않으면 한국으로 돌아가게 될까 봐 미친 듯이 공부에 몰두했다. 우수한 성적을 유지하며 명문대를 졸업하고 높은 연봉을 주는 직장까지 얻게 됐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시작됐다. 그녀가 얻은 직장 본사는 해외에 있었으나, 그녀가 일해야 할 곳은 한국지사였다. 어쩔 수 없이 독립 준비가 될 때까지 피 튀는 기억이 가득한 집에 머물러야 했다. 매 맞던 어린 시절이 다시 반복되는 게 아닌지 두려웠다.
그런데 걱정과 달리 돌아온 집은 고요했다. 십여 년 사이 아버지는 변했다. 희끗희끗해진 머리카락, 왜소해진 체구, 눈가에 자글자글하게 핀 주름까지. 화난 듯한 얼굴로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는 건 여전했으나, 더는 자신의 뇌리에 박혀 있던 괴력의 괴물은 아니었다. 전과 달리 술을 마시고 와도 아내와 딸에게 더는 손찌검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끔 아내와 딸을 불러내 외식을 하기도 했다.
돌아온 그녀에게 종종 아버지는 “얼른 좋은 사람을 만나서 결혼해야지”라던가 “넌 형제나 자매 없어 외롭게 자랐으니. 나중에 자식을 둘 이상 낳아라” 같은 말을 해댔다. 그럼 어머니는 옆에서 맞장구를 쳤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당신들을 봐서라도 절대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살겠다”라는 목구멍에서 삐져나오려는 걸 꾹 참았다. 그럼 묵묵부답인 딸이 건방져 보여서인지 아버지는 “쎄가 빠지게 일해서 해외에서 공부시켜 놨더니. 싹수가 없어졌다”라며 으르렁댔으나, 어쩐지 딸의 냉랭한 분위기에 기가 눌려 전처럼 손을 들어 올리진 못했다.
그제야 모든 게 원망스러워졌다. 지나온 시간을 돌이켜봤다.
어릴 적부터 그녀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부단히 애를 썼다. 외로운 유학 생활 중에도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다. 그런 탓에 주변에선 그녀를 바늘로 찔러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릴 독한 사람이라 평가했다. 타인을 경계하는 마음이 크다 보니, 연애도 쉽지 않았다. 신뢰 없는 연애는 늘 쉽게 깨지곤 했는데, 이별 후에도 잽싸게 좋았던 기억을 지우고 울렁대는 슬픔 감정을 닫아버렸다.
오랜 시간 참고 견디며 강해졌다고 믿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묵혀온 눈물은 폭력이 사라진 집에서 터져버렸다.
그제야 알게 됐다. 폭력에 시달리던 작고 약한 아이가 그 모습을 숨기기 위해 얼마나 냉소적인 어른으로 자랐는지 말이다. 이것 또한 방어기제였다. 두려움과 공포를 감추기 위해 울고 싶은 아이가 울지 못 하게 하는 방어기제.
그녀는 부모를 모아놓고 솔직하게 얘기했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폭력이 얼마나 끔찍했는지, 어머니의 푸념과 무기력이 얼마나 잔혹했는지 말이다. 이야기 중간중간 감정이 격해져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딸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아버지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고, 어머니는 미안하다며 엎드려 통곡했다.
한바탕 눈물을 쏟아내고 나니 죽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이 다시 살아난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부모님에게 말했다. 어쩌면 평생 당신들을 미워할지도 모르겠다고, 이따금 괴롭고 아팠던 기억이 떠오를 때면 원망하고 또 원망할 거라고.
그날 이후 아무렇지 않은 척 부모님과 지내고 있다는 그녀가 내게 얘기했다. 매 맞고 자란 아이는 괜찮은 어른이 되기 엄청나게 불리한 환경에 처한다고 말이다. 그러면서 이런 말도 덧붙였다. 그러나 불행한 어른 밑에서 자란 아이일수록 행복한 어른이 되길 갈망한다고. 아주 간절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