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일탈을 꿈꾸는 남자가 말하는 사랑
남자는 몇 번이나 돌아누운 나를 자기 쪽으로 끌어당긴 뒤 입을 맞추고 몸을 쓰다듬으며 내가 자신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로 만들었다. 자다 깨면 찾는 게 내 몸이었고 어여쁘고 소중하게 좋은 것을 가진 사람처럼 나를 안았다.
“넌 너무 뜨거워.”
허영심을 채워줄 칭찬 같은 게 아니라 남자가 느끼는 있는 그대로의 사실, 그래서 너무나 견디기 어렵다는 듯 몇 번이나 내 몸을 빠져나갔다가 다시 시도하곤 했다. 그런 반응을 겪는 건 처음이라 나도 신기했다.
“따뜻한 게 아니라 뜨거워?”
“응, 온몸이 화끈거릴 정도로. 날 봐. 땀범벅이잖아.”
그런가? 상대의 척추와 기립근 사이에 땀이 찰방찰방 찰 정도로 격렬하게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제대로 된 섹스를 한 것 같지 않아서 새삼스러운 건 아니었다. 내 몸 안에 들어와 자신이 처음 겪는 신체적 반응에 남자는 신기한 듯 자신의 상태를 계속 설명했다.
남자와는 바에서 우연히 만나서 술 얘기를 잔뜩 하다가 흥이 일어서 갑자기 패트론을 시키곤 각자 연속으로 여섯 잔씩 들이키고 정신이 나간채로 호텔에 들어왔다. 바에서 어떻게 나왔는지 체크인은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하나도 나지 않는데, 욕조에 들어가 그와 마구 뒤엉킨 채로 서로의 몸을 핥고 빨던 것부터 생각이 났다. 그 순간에도 나는 몸이 잠긴 물의 온도가 느껴지지 않았고, 제삼자적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휘청거리는 몸으로 욕실에서 넘어지지 않은 게 용할 정도로 무슨 생각으로 이러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저 그런 나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랑 자고 싶었나? 글쎄 그 정도였나? 자기가 아는 걸 다 말해야겠다는 듯 뭐든 지나치게 설명하는 남자의 이야기는 지루했다. 내 나이는 알려주지 않았지만 나보다 여덟 살이나 어린 남자애가 세상을 다 안다는 듯, 남들과 다른 인생을 살아온 자기 자신에게 취해 내뱉는 이야기는 아무런 궁금증도 일으키지 않았다. 물론 남자가 성취한 것은 인정하지만 그 순간에도 막연하게 그것은 단지 그 자신만의 것은 아닐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째서인지 몰라도 그런 느낌을 받았다.
어쨌거나 이른 시각 바에서 만나 여섯 시간 정도 이야기를 나눈 동안 나에 대해서는 말한 게 없었다. 나를 말로 설명하고 내 역사를 읊어대는 걸 좋아하지도 않지만 남자가 내 이야기를 들을 생각이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물론 남자는 종종 “네가 이야기를 안 하니까 내 이야기만 하게 되는 것 같네.”라고 말하긴 했다. 응, 난 하고 싶은 말이 없으니까 그냥 네 이야기나 하렴. 이야기를 듣는 것, 맛있는 술이 끊임없이 제공되는 상황에서는 곤욕스러운 것도 아니지.
“너랑 하고 싶어.”
순진한 척, 뭐?라고 물어볼 수도 있고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당장 나가자고 할 수도 있었다. 내가 남자를 유혹했나? 그런 건 아니었다. 나란히 앉아서 술을 마시긴 했지만 가볍게라도 서로의 몸이 스친 적도 없었고 그를 자극할만한 뉘앙스의 말을 한 적도 없었다. 취기가 올라 나른하게 눈을 뜨거나, 원피스 아래로 드러난 내 다리가 미끈하거나, 그의 말에 적당히 반응하며 추임새를 넣어주는 입술의 색이 지나치게 붉었거나. 그런 것들에 반응하는 것이라면 너무나도 뻔했다.
생각을 해야 했다. 오늘 밤에 나는 섹스를 하고 싶나? 이 남자랑 몸을 섞고 싶은가? 우선 목소리나 말투가 빅뱅의 태양과 비슷해서 가산점을 얻긴 했다. 생긴 것도 막 잘 생긴 건 아니더라도 봐줄만했고, 체구가 크진 않고 키도 좀 작긴 했지만 9cm 하이힐을 신고 있는 나와 비슷한 정도니까 침대에 들어가면 내가 작게 느껴질 거야. 꾸준히 운동을 한다고 했으니 지구력이 나쁘지 않겠지. 콘돔은 가지고 있나? 그렇지 않더라도 내가 세 개나 가지고 있긴 하지.
확실한 의사를 밝히거나 내 의사를 묻지 않고 술 취한 김에 얼렁뚱땅 어떻게 해보면 되겠지 하는 태도를 취하지 않은 것에 가장 큰 점수를 줬다.
“나가자!”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린 뒤에 안심했는지 그대로 취해버려서 잠깐의 블랙아웃. 나를 욕망하는 대상이 크게 흠이 없다면 섹스야 하지 않는 것보다 하는 게 낫다. 내가 욕정을 견디지 못해 상대를 탐하는 일이란 거의 일어나지 않는 일이었고 수동적인 내가 가장 재미있게 섹스를 할 수 있는 건 상대가 나에 대한 열망이 끓어올랐을 때라는 건 그간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오늘 밤은 재미있을 거야.
밤새 몇 번이나 나를 안았는지, 세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몸이 떨어지지 않은 채 아침을 맞이했는데 남자는 갑자기 내 귓가에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냉소적인 표정을 짓지 않으려고 애쓰는 내가 보이지 않는 건지 어제의 격정과는 사뭇 다른 애틋함이 가득한 태도로 이마에 키스를 했다. 낯선 몸이 주는 흥분감이 사그라지고 헛헛해졌다. 사랑이란 단어는 정말이지 고통을 받는구나.
그 순간에 남자가 느낀 것이 사랑일 수도 있겠지. 그걸 내가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걸 누설하는 일은 다른 문제다. 어째서 그걸 내게 말하는 것이지? 그 사랑으로 무엇을 할 수 있지? 그다음에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데?
남자는 세상 진지를 혼자 다 가진 것처럼 내게 나처럼 말이 잘 통한 여자는 처음이고, 내가 다른 여자들과는 다르고, 내가 너무 좋은 사람인 것 같고, 내가 자신에게 어떤 영감을 일으킨다고 말했다. 그런 말에 설렘을 느끼기엔 내게 호감을 느끼는 남자들은 모두 그렇게 말해서 그게 나의 매력인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그 매력이란 대체로 내 생각을 말하기 전이나, 내가 하는 일을 그들이 알기 전까지 유효하지.
내 촉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것도 예상한 대로의 고백이 이어졌을 때였다. 오래 사귄 연상의 여자 친구가 있고 사업적으로 얽혀있어서 헤어질 수는 없는 상태이다. 마치 내가 그걸 이해해줘야 한다는 듯, 그 사실을 미리 말하지 않아서 고통스러운 건 자기 자신이었다는 듯, 내가 지금 당하고 있는 기만이 얼마나 우스운지 알려주고 싶을 정도로 남자는 자신만의 비극에 한껏 취해있는 것 같아 보였다.
귀여워.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오늘과 같은 밤을 보낼 수 있을까? 날 오늘처럼 격렬하게 취할 수 있을까? 내일이 없다는 듯 아낌없이 쏟아부으며 잠깐 떨어져 있는 시간도 아까울 정도로 내 몸을 탐하고 자극하고 온몸을 빠짐없이 어루만지게 될까? 아니. 절대 아니야. 오늘 같은 밤은 오늘 하루로 끝이야. 아무리 내게 사랑을 느낀다 한들 그다음부터는 일탈적이지 않은 일상적인 섹스를 하게 될 테고 지금 여자 친구와 별반 다르지 않은 시간을 우리도 보내게 될 거야.
잠깐의 흥분감이 만들어낸 비일상을 일상으로 이어나가지 못하고, 일상성을 소중하게 느끼지 못하며 늘 낯선 일탈을 꿈꾸는 남자가 말하는 사랑에 내가 감동받을 거라고 생각했나? 다른 여자들과는 다르다고 말할 때 ‘다르다’는 것이 무엇이었을까? 사랑이라는 말이면 믿고 속아버리는 자존감이 낮고 연애로 자신을 증명할 수 있다고 믿는 여자들에게나 통할 그런 수법에 감동이라도 받을 줄 알았단 말인가?
남자를 놓치더라도 아쉬울 게 없었다. 그의 성취, 그의 조건들에 혹한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남자의 곁에 여자가 없었다면 이룰 수도 없었을 일이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