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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정 Sep 24.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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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이 정갈하고 아름답기보다 삶이 정돈되고 관능적이길 바란다


절정의 순간이 바로 앞에 있는데 그 주변만 맴돌며 도달하지 못하는 기분이었다. 그게 그렇게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 뭐가 부족한 거지? 남자는 최선을 다해 움직이고 있었고 나도 내 몸의 감각에 최대한 집중하고 있었다. 


“목을 졸라!”  

남자의 손을 내 목으로 가지고 오며 말했다. 남자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하아. 글렀군. 착실한 남자들은 아니 정정, ‘섹스를 하다가 인생이 좆 되는 걸 원치 않는’이라고 해야 더 정확할 거 같다. 그런 남자들은 목을 조르지 못한다. 아니 다시 정정, 나의 요청을 성실하게 수행하기 위해 목 조르기를 시도한다 한들 후두 옆 양쪽 경동맥을 눌러 뇌로 가는 산소를 일시적으로 차단해야 한다는 걸 모른다. 정성스러우면서도 조심스럽게 목 전체를 눌러 기도를 막아 콜록콜록 기침을 하게 만든다. 그러면 목을 누른 본인도 겁을 먹고 놀라 사그라지고 나 역시 지금까지 고조되던 것이 다 소용없게 된다. 가르치지 않았는데 알아서 목을 잘 조르는 남자는 한 명 있었나? 그들이 즐겨보는 포르노에서 배우는 게 전혀 없구나. 


비정상적일 정도로 에로스에 대한 욕구를 느끼던 시기가 있었다. 죽음에 대한 또 다른 충동였다고 말하면 지나치게 프로이트적인가? 비겁해서 죄송합니다. 내세엔 다시 태어나지 않겠습니다. 그런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살았다. 요조의 기분을 이해하면서. 


죽고 싶었지만 죽을 용기는 없었던 그러나 죽어있고 무기력한 시기가 있었다. 살아있다는 증거를 찾기 위해서 남자를 안았다. 사랑받고 있다 혹은 누군가가 나를 필요로 한다 이런 감각을 충족시키거나 인정 욕구를 채우려고 한 건 아니었다. 나는 이 행동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헛됨을 반복하는 것은 체념하기 위함이었다. 내가 죽고 싶은 이유, 살고 싶지 않은 이유. 너무나 큰 기대로 가득한 삶을 버리기 위해서.


그렇기에 섹스를 비일상적이고 일탈적인 행위로 취급하는 인간을 동정한다. 연민이 아니다. 섹스는 당연히 삶 그 자체라는 걸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가여움이다. 그런 이들은 섹스가 애정 표현의 한 종류라는 것도 배우거나 느끼지 못했겠지. 자기 권력의 확인. 정복욕을 채워나가는 행위일 뿐. 쉽게 섹스하기 위해서 그러나 나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서 우선 그런 남자들을 걸러내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애정이 없이도 아무렇지 않게 섹스를 했던 건 남자의 몸을 탐닉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나는 섹스를 좋아하는 것만큼 남자의 몸을 좋아하거나 신비롭게 느끼거나 야한 자극을 받지 않았다. 섹스는 항상 나의 감각에 집중하고 탐험하는 과정이었다. 그걸 부끄럼 없이 잘 수행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남자를 어여삐 여기며 쓰다듬는 시간이었다. 


어떤 방면으로든 위협적이지 않은 남자를 선호한다. 궁극적으로 내가 바라는 상대라는 건 나를 갖기 위해 투쟁하지 않는 것은 별로지만 그럼에도 질투심을 잘 숨길 줄 아는, 소유욕보다 더 큰 애정으로 내가 가진 모순을 극복하는 남자랄까. 


지금은 더 이상 죽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살아야겠다. 살아남아야겠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발정만 나던 시기랑은 확연히 다른 기점에 서 있다.


문장이 정갈하고 아름답기보다 삶이 정돈되고 관능적이길 바란다. 불안한 영혼은 안고 싶지 않다. 그 태도로 말미암아 유발되는 불행의 흔적이 내게 묻는 게 싫다. 이렇게 지독한 여자지만 생기를 잃고 색기마저 증발된 삶 따위 원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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