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nna May 11. 2023

그곳에 가면

요란한 도심에서 벗어나 어둑하니 선선한 바람이 이는 통로를 지나고 나니 그림처럼 파란 하늘과 푸른 잎사귀 흩날리는 고요한 풍경이 물결처럼 인다. 자연의 소리 순간 잊게 만드는 지하철의 거대한 소음이 규칙적으로 귓가를 쑤셔대지만 그마저도 몽환으로 다가오는 곳. 촘촘한 돌계단 밑으로 펼쳐진 넓디넓은 한강의 싫지 않은 물비린내까지 갖춰진 이곳. 나들목을 나와 한강으로 향하는 곳이자 십 년이 넘게 내가 찾는 공간이기도 하다. 단순히 한강변을 산책하거나 자전거를 타러 갈 때 지나치는 공간에 불과할 때도 있지만 많은 생각과 감정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할 때 찾아 멍하니 무용한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따듯한 봄날인 요즘. 생각보다 일정이 빨리 끝나 집으로 향하던 중 갑자기 이곳이 그리워져 발걸음을 돌렸다. 가을과 겨울에도 이곳을 종종 찾긴 했지만 다채로운 봄과 여름의 모습이 주로 기억에 오래 남아서인지 더 익숙하다. 광활한 한강과 푸른 하늘, 길고 긴 거대한 지하철이 꼬박꼬박 기똥찬 소리를 내며 다니는 모습도 모두 그대로다. 어느 순간 십여 년간 이곳을 찾던 내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스친다.


시험을 망쳐 내 인생은 망했다며 시무룩해져 있던 십 대 후반의 소녀였다가, 첫 연애를 허무하게 끝낸 뒤 눈이 퉁퉁 부은 어설픈 화장을 공들여한 이십 대 초반 대학생이었다가, 취업과 미래 걱정에 답답해하다가 운동화를 질끈 묵고 뛰쳐나와 넓은 한강을 바라보며 '어떻게 되겠지' 라며 낙관하는 방법을 조금씩 익혀나가던 이십 대 중반의 내가 된다. 야근에 업무의 연장인 회식까지 마친 뒤 집에 바로 가기 하루가 너무 아까워 어디라도 들려야 할 것 같아 이곳에 온 날엔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칙칙폭폭 지하철 소리와 고요한 바람의 극과 극을 느껴보기도 했다. 이십 대 후반 쯔음엔 이곳에서 인생의 그늘이란 간헐적으로 오는 것이란 걸 담담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다. 결혼을 앞두고 새로운 변화로 인한 소란한 마음을 달래 보려던 서른 어느 날의 나. 매일 같이 똑같은 일상이 무료하다 못해 두려워질 때 생각이란 걸 멈추기 위해 걷다가 자연스럽게 이곳에 이르던 수많은 나날들.


오직 나만의 시선 속에서 이곳은 나라는 인간의 변천사를 담고 있는 곳이었다. 타인에게도 허용된 곳이지만 내적인 나만의 공간. 웃음이 끊이지 않을 만큼 즐거울 땐 이곳이 크게 생각나지 않아 미안한 마음에 추웠던 날씨 핑계를 대며 발길을 끊기도 했다. 요즘엔 따듯해진 날씨에 헬스장이 아닌 실외운동을 하기 위해 한강에 향하기 위해 종종 다시 이곳을 찾는다. 스트레칭을 하며 휴대폰의 만보기 앱을 켜다가 그곳에 잠시 멈춰 선다. 벤치에 앉아 혼자 훌쩍이던 어린 나, 친구와 쓸데없는 상상과 걱정을 주고받던 열정 가득하던 나, 웃지도 울지도 않은 채 멍하니 계절에 따른 변화를 받아들이던 과거의 내가 여럿 스친다. 지난 무거웠던 감정들이 한없이 가볍게 다가왔는데 단단해졌기 때문일까 시간이 흘러 자연스럽게 덤덤해진 것일까. 여러 순간의 내 모습을 담고 있는 이곳의 존재에 새삼 감사한 마음을 가져본다. 오늘의 나 또한 미래에 이곳을 방문한 내가 기억해 주길 바라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