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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경도 렌즈도 없이

by 안나

시력이 좋지 않아 집에서는 안경을, 외출할 땐 렌즈를 착용하는 편이다. 하지만 종종 익숙한 장소에서는 안경도, 렌즈도 착용하지 않기도 했다.


반복되는 직장생활에 유독 지쳐 있을 땐 일하는 시간을 제외하곤 안경도 렌즈도 없이, 차라리 뿌연 세상 속에 있는 걸 택하곤 했다.


렌즈나 안경을 오래 착용했을 때의 피로함도 있었지만, 보기 싫은 것들을 자세히 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좋은 사람들이 훨씬 많았지만 찌푸린 표정을 짓고 있던 직장 동료, 얌생이 같이 자기 일은 떠넘긴 채 상사들에게 여우 같은 웃음을 지으며 거짓말을 술술 하던 직장 상사 같은 소수의 빌런들을 조금이라도 더 멀리 있는 느낌으로 두고 싶은 마음이랄까.


이 외에도 길거리에 수두룩하게 버려져있던 담배꽁초와 쓰레기들과 같이 자세히 보면 뒷골이 싸악 당기는 장면들도 차라리 자체적으로 블러처리를 하는 것이 마음 편했다.


심적으로 지쳐있을 때 부정적인 대상들을 잠시나마 뿌연 세상에 넣어 숨김채 마음속 평정심을 유지하는 나만의 방법이었다.


당연히 건강상, 안전상 좋은 행위는 아니었고 아주 뚜렷하게는 안 보여도 희미하더라도 대상을 분별할 정도의 시력이어서 가능했던 부분이다.


출산을 하고 난 뒤의 요즘엔 항상 어린 아기를 돌보고, 외출을 할 때도 아기를 안거나 유모차에 태우다 보니 안전을 위해 무조건 렌즈나 안경을 착용하는 편이다. (여담이지만 안경은 아기가 보자마자 꽉 쥐고 놓아주지 않아 오히려 출산 후 렌즈를 더 자주 착용하게 됐다.)


또렷하게 보이는 세상. 보호해야 할 대상이 생기니 갑자기 튀어나오는 차량, 울퉁불퉁한 바닥 등 길거리 위험 요소들에 민감하게 반응하느라 두 눈알을 열심히 굴리며 순간적으로라도 조금 더 안전한 길을 찾다 보니 쉽게 피로해졌다.


하지만 아기가 시력이 발달하고 세상 구경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길거리의 나무, 풀, 돌멩이, 벽에 그려진 그림, 알록달록 간판들 앞에 서서 오랜 시간 바라보는 행위를 함께 했다.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 공원에 나타난 까마귀의 깍-깍 소리, 산책 나온 강아지가 좋아 데구루루 구르는 모습. 어린아이들이 뛰어놀고, 사이좋은 노부부가 손을 잡고 천천히 걷는 모습, 카페 직원의 친절한 웃음 등. 또렷하게 바라보는 세상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밝고 좋았다.


처음에는 아기의 오감발달을 위한 노력으로 시작된 루틴이었지만 매일 산책을 하며 여러 풍경과 생명들을 또렷이 바라보는 것에 대한 흥미가 생겼고 매일 반복하다 보니 그 순간들이 소중하고 더없이 행복하게 다가왔다.


보면 볼수록 더 또렷이 보고 싶고 마주하고 싶었다.


자주 다니던 길에 항상 있었음에도 이전에는 유심히 보지 않고 지나치던 것들이다. 희미한 세상 속에 피하고 싶은 대상들을 숨기고 싶어 모든 것을 외면해 버렸던 건 아니었을까.


미묘한 변화와 상대의 감정에 예민한 편이어서 부정적인 것들에 대해 가끔은 선택적으로 흐리게 바라보고 싶다. 하지만 이젠 (시력에도 좋지 않고 위험하기도 하니) 시력 교정을 할 수 있는 도구는 사용하되, 선택적 희미함과 또렷함을 적용해보려고 한다.


어둡고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들에는 자체적으로 희미함을, 밝은 기운을 불어넣어 주는 아름다운 것들에는 또렷함을 더해보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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