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션 임파서블 (작전명 : 크로 5)
비둘기 색 얇은 점퍼에 적당히 구겨진 면바지, 흰 머리칼이 언뜻언뜻 보이는 게 아저씨라고 하기엔 좀 더 돼 보이고 할아버지라 하기엔 좀 덜 돼 보이는 남자가 사람 좋은 인상으로 Seonkyung Kim이라고 써진 종이를 들고 서 있었다. 이국에서 내 이름자를 들고 있는 사람을 만나는 게 처음은 아니지만 오랜만에 만나는 작은 아빠처럼 반갑기 그지없던 이유가 있다. 여행을 떠나기 며칠 전 숙소로 예약한 자그레브 아파트 호스트로부터 35유로(약 45,000원)에 우리를 공항으로 픽업하러 올 수 있다는 제안을 받았다. 비행기가 자그레브에 도착하는 시각은 밤 10시 반, 공항버스로 중심가까지 가는데 150쿠나(약 3만 원), 거기서 다시 트램이나 택시를 이용해야 할 터였다. 공항에서 직접 택시로 간다면 우리 인원이 5명이니까 2대의 택시로 500쿠나(약 10만 원)는 들어야 하므로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5명에 커다란 러기지가 5개 있는데 가능하냐고 물으니 주인은 노 프라블럼이라 했고 나는 비행기 편명과 도착 시간을 알려주었었다. 그러나 웬일인지 인천 공항을 출발하기까지 데리러 가겠니라는 답을 받지 못했었다. 그러므로 입국장 문을 나오자마자 발견한 내 이름은 자그레브가 주는 환영의 메시지처럼 반가웠다.
40년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에서 만나 지금까지 그 흔한 다툼 한 번 없이 따사로운 봄 햇살처럼 지란지교 지내왔다. 그런 우리에겐 두 가지 별칭이 있다. 5명 모두의 키가 165~173으로 비교적 큰 키였던지라 친구들이 붙여준 이름 장다리들, 그리고 생활관을 운영하시던 가정 선생님께서 붙여주신 까씨들이다. 가정이 있고, 직장이 있는 친구들 모두가 시간을 맞추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생일, 제사, 근무, 가족 여행 등등의 사유로 수년전 홍콩, 마카오로 자유 여행을 다녀오고 스페인, 포르투갈에 다녀온 지 3년 6개월 만이다. 그렇게 크로아티아 여행이 시작되었다.
불과 3년 전만 해도 공항에 일찍 도착하여 비상구 쪽 좌석을 달라고 하면 별 어려움 없이 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젠 공간 여유가 많은 그 좌석도 별도 요금을 지불해야 한다. 그 대신 비행기 이륙 23시간 전에 항공사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예약되지 않은 좌석 중에서 좌석을 바꿀 수 있다. 이번 여행도 그런 식으로 접속하여 다섯 명 중 2명은 맨 앞 열로 다리를 뻗을 수 있는 좌석으로 교체했고 3명은 창 쪽 3열 좌석에 나란히 앉을 수 있었다.
밤이기도 했지만 아파트의 외관은 투박하고 거칠어 보였다. 올드 팝송을 들려주며 차내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주던 기사는 우리의 무거운 여행 러기지들을 2층으로 옮겨주었다. 오롯 혼자서 말이다. 고마운 마음에 40유로를 건네며 잔돈을 가지라고 하니 그는 수줍게 사양하며 굳이 5유로를 거슬러 주었다. 뭐랄까 원칙을 지키는, 그러면서 순수함이 느껴졌다. 젊은 아가씨가 집안 내부로 안내하며 상냥하고 친절한 설명을 해주었다.
유럽식 건축 특유의 높은 천장에 크고 긴 현관문으로 들어서니, 거실을 중심으로 두 개의 침실이 대칭으로 배치된 구조였다. 하얀 원목의 침대 발치로는 블랙과 화이트의 줄무늬 러그가 깔려 있고, 호텔로 치자면 침대 시트는 당연히 화이트지만 가구, 창문, 커튼, 스탠드, 화병과 꽃, 세 개의 에어컨까지 완벽하게 올 화이트 컬러, 연한 그레이의 고풍스러운 안락의자 세트가 놓인 내부가 우아하고 품위 있다. 완벽한 현대식 시스템의 주방 집기와 직사각형의 8인용 원목 식탁 위엔 둥글게 나무를 깎아 만든 커다란 보울엔 싱싱한 과일이 담겨 있어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켰고 2개의 욕실 또한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었다. 이그제큐티브 호텔 룸보다 더 세련되고 널찍한 집 분위기에 너 나할 것 없이 환호하며 벌써부터 그 집을 떠나야 할 아쉬움을 토로했다. 긴 비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모두들 지친 기색 하나 없이 투명한 와인글라스로 종소리를 내며 여행의 시작을 축하하는 건배를 했다. 이번 여행 역시 일정과 항공, 페리, 숙소, 렌터카까지 모든 걸 예약하고 준비한 내 입장에선 참으로 다행스러운 출발이 아닐 수 없었다. 행복한 기분과 편안한 침구 탓인지 짧은 수면 시간이었지만 개운하게 잠을 잤다. 간단히 아침을 만들어 먹고 밖으로 나갔다. 전날 미리 얘기했던 대로 우리의 러기지를 호스트의 사무실에 맡겨놓고 시가지를 돌아보려 한다.
크로아티아는 독일식 발음이다. 그들 언어로는 흐르바츠카, 이란의 호르바트 족이 그곳을 지배할 때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유럽 사람들은 자동차 여행을 많이 하므로 어딜 가나 다국적 번호판을 흔히 볼 수 있다. 프랑스 차는 FR, 이탈리아는 IT, 덴마크에서 온 차는 DN이 표시되어있듯 크로아티아의 자동차에는 HR을 쓴다. 동방견문록을 쓴 마르코 폴로가 그 나라 사람이고 크로스 오버 피아니스트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막심 므라비차가 그곳 사람이다. 전쟁터로 나가는 아들, 사랑하는 연인에게 오로지 안전과 무사귀환을 빌기 위한 도구로 정성스레 수놓은 넥타이를 목에 걸어주어 넥타이의 본고장이 된 곳, 1977년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영화배우 윤정희 부부가 납북될 뻔한 사건이 일어난 곳 또한 그곳 수도 자그레브였다.
옐라치치 장군이 말을 타고 있는 동상이 우뚝 선 옐라치치 광장에 들어섰다. 볼거리들이 주로 광장 뒤편에 몰려있기 때문에 그곳은 자그레브의 배꼽이라 할 수 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듯 트램이 도착하고 떠났다. 뜨거운 태양이 사람들의 얼굴을 모두 비슷한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노천에서 꽃을 파는 선한 사람들을 지나 몇 개의 계단을 오르니 우리네 아주머니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넉넉한 풍채에 머릿수건과 앞치마를 두른 여인이 머리에 광주리를 이고 우직하게 서 있는 동상과 마주쳤다. 돌 라츠 시장이다. 활짝 펴진 빨간 파라솔들이 큼직한 거베라 꽃 같이 아름답다. 여느 시장과 다를 바 없이 형형색색의 싱싱한 채소와 과일들이 나무 테이블 위에 또는 나무 박스 안에 보기 좋게 진열되어 있다. 과일 몇 가지를 샀는데 값이 싸다. 달콤한 과즙이 배어나오는 천도복숭아를 아작아작 먹으며 서두를 것 없는 걸음을 걸었다.
카페 거리 트칼치체바의 한 카페에 앉았다. 대형 비치파라솔에서 에어컨 냉기가 뿜어져 나온다. 새콤달콤한 아이스 레모네이드로 땀을 식히고 스톤 게이트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돌로 된 문은 보이지 않았다. 현재 보수 중이라 하얀 천막으로 뒤덮여 있어서 그곳을 지나가고도 알지 못한 것이다.
스톤 게이트를 지나 오르막길을 조금 오르니 성 마르크 교회가 만화처럼 나타났다. 알록달록한 모자이크 타일로 십자수를 놓듯 크로아티아와 자그레브를 상징하는 두 개의 문장을 지붕에 새겨놓았다. 그 왼쪽에 유심히 보지 않으면 지나칠만한 평범한 2층 건축물이 보이는데 그게 대통령궁이란다. 저택의 집사처럼 달랑 보초 한 명이 문 앞에 서 있을 뿐 어떤 삼엄함이나 위엄이 없어 보인다. 권력이 저렇게 소박할 수도 있구나 싶었다. 교회 오른쪽으로 주민 센터 정도의 소박한 건물이 국회의사당, 그 동네 의원님들은 동네 이장처럼 친절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내가 여행에서 좋아하는 일 중 하나가 골목길 걷기이다. 그 어떤 지도에서도 읽을 수 없고 그 어떤 책에도 소개되어 있지 않은 골목을 걷다 보면 그곳을 지나다녔을 사람들의 발자국에서 어떤 이야기가 들려오듯 하고 적당히 낡은 옷을 툭 걸친 듯 다정하고 편하기 때문이다.
빵집에 들러 치아바타와 크루아상, 바게트 샌드위치와 음료를 사서 나무 그늘 벤치에 앉았다. 도심에서 즐기는 런치 타임이 소풍처럼 정겹다. 주변을 지나가는 늘씬한 아가씨와 품위 있는 노인들을 쳐다보며 소소한 점심을 즐겼다. 친구 셋은 남아서 주변을 더 돌아보기로 하고 M과 나는 렌터카 사무실로 향했다.
M과 나는 다섯 명 중 대전에, 그것도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다. 우리 둘은 지난여름 스칸디나비아 3국을, 지난겨울엔 유레일패스를 이용해서 베네룩스 3국과 프랑스, 스위스를 여행했다. 지난 1년 중 35일 동안 24시간 동고동락한 친구다.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사이랄까? 함께 했던 두 번의 자유 여행처럼 이번 여행도 둘이 중심이다.
사무실에 도착했지만 안내 쪽지 하나 없이 문이 잠겨 있다. 약속 시간보다 우리가 일찍 도착한 탓인지, 점심을 먹으러 간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5분쯤 지나니 한 남자가 와서 10분만 기다리면 사람이 올 거라고 말해주었다. 사무실 앞 도로에 검은 물소처럼 듬직한 밴이 반짝반짝 광을 내며 주차되어 있다. 우리가 타게 될 자동차라는 걸 짐작했다. 외관에 손상이 없는지 요리조리 살피며 사진을 찍어두었다. 기다리던 직원이 오고 각종 서류에 사인하고 자동차의 작동 법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주유 투입구며 핸들 위쪽에 붙어 있는 자동 기어 변속기 작동 법, 구급 전화번호와 만약 사고가 났을 때 반드시 경찰에 신고가 되어야 보험처리를 받을 수 있음 등의 설명을 들었다. 자동차는 우리나라 스타렉스 정도 크기의 벤츠로 9인승 3열 시트에 맨 뒤 칸엔 짐을 실을 수 있는 공간이 널찍하게 마련되어 있다. 나는 7인승 이상의 오토매틱 기어 밴을 요청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단단하고 듬직해 보이는 차가 준비되어 안심이다. 무엇보다 2열에 두 사람, 3열에는 피곤한 사람이 혼자 누워서 다녀도 될 정도로 넉넉한 크기가 맘에 들었다.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는 장소의 주소를 내비게이션에 입력하고 출발, 그날은 M이 운전하고 나는 조수석에 앉았다. 유럽은 일방통행이 많고 트램과 혼용하는 도로가 있으며 라운드어바웃 교차로가 많다. 내비게이션이 안내한 지점은 일방통행 도로로 택시들이 줄 지어 정차해 있는 곳이었다. 친구는 비상등을 켜고 나는 급히 내려 친구들과 러기지를 가지고 와서 차에 탑승했다. 그때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다음 행선지인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 숙소의 주소를 입력했다. 일방통행이라는 사실만 주지한 우리가 직진하여 맞닥뜨린 곳은 오직 트램만 다닐 수 있는 엘라 치치 광장 앞 대로, 그 도로에서 자동차가 주행하면 안 되기도 하거니와 내려갈 수도 없이 턱이 높았다.
‘어떡하지?’
운전대를 잡은 친구 M은 거의 울상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침착하게 비상등을 켜고 차를 유턴하여 어쩔 수 없이(우리는 외국인이니까 경찰도 이해할 거야, 스스로 위안하며…) 인도를 통과, 원점으로 돌아간 후 가까스로 도로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만일을 위해 나는 여행 기간 동안 이동할 모든 구간의 자동차 경로를 종이로 출력해서 가져갔다. 그 정보에 의하면 고속도로에 진입해서 2시간이면 도착해야 한다. 그러나 내비게이션은 3시간 30분이 걸리는 경로로 안내했다. 로밍 폰의 구글 맵을 작동시켰지만 3G인 그곳은 굼벵이만큼 느린 것이 스마트하지 못해 무용지물이다. 어쩔 수 없이 일단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따라 한 시간쯤 달렸지만 도로의 어느 이정표에도 류블랴나라는 지명은 보이지 않았고 고속도로도 나타나지 않았다. 주유소에 들어가 도움을 요청했다. 주소 중 한 단어를 빼먹은 걸 알게 되었다. 다시 자그레브 쪽으로 돌아가 류블랴나로 향하는 고속도로에 진입하는 데 성공했다.
제한속도 130km인 고속도로에 차량은 많지 않았다. 국경심사대도 아무 문제없이 통과했다. 그러나 도로를 잘못 들어 도착 예정 시간보다 약 한 시간이 늦어졌다. 호스트에게 문자를 보냈지만 답이 없다. 숙소 근처 역시 일방통행이고 그 앞엔 주정차할 위치로 적합하지 않으므로 조금 떨어진 곳에 일시 정차시켰다. 나는 차에서 내려 숙소 건물로 갔다. 그러나 현관문 옆에 붙어있는 10개 남짓한 이름의 초인종 옆엔 Widad라는 이름이 없었다. 그때 마침 거대한 나무문이 열리고 한 여성이 빨간색의 앙증맞은 자동차를 출차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Widad를 아냐고 물으니 모른단다. 아파트를 예약했는데 연락할 방법이 없다, 전화를 걸어줄 수 있냐고 부탁하니 흔쾌히 Sure~ 한다. 그렇게 Widad와 통화를 하니 5시까지 우리를 기다리다가 외출했는데 바로 갈 테니 기다리라는 것이다. 숙소 주인이 왔고 일방통행인 도로를 뱅글뱅글 돌아 겨우 숙소 앞에 도착했건만, 우리의 밴이 너무 커서 그들의 주차공간에 들어갈 수 없었다. 게다가 숙소가 5층인데 엘리베이터가 없다. 하룻밤 자면 또 떠나야 하니 굳이 무거운 캐리어를 다 들어 올릴 필요가 없음이다. 세면도구와 옷가지 등 꼭 필요한 물건들을 배낭에 챙기고 자동차는 공영 주차장에 주차했다. 일정 중 가장 비싼 가격이던(32만 원) 류블랴나의 숙소는 넓고 현대적으로 꾸며진 아름다운 아파트였다. 그런데 중요한 게 없다. 손바닥만 한 선풍기가 달랑 하나 있을 뿐 에어컨이 없다. 해를 가리기 위한 나무 덧창은 있으나 방충망이 없는 유리창을 모두 열었다. 그 밤을 어찌 지새웠는지 모른다. 정말 뜨거운 밤이었다.
예기치 않은 주차 불가, 엘리베이터와 에어컨 없는 5층 등 여러 가지가 불편했지만 숙소의 위치는 탁월했다. 볼거리들이 한데 모여 있는 용의 다리가 지척인 거다. 아직 이른 시각이라 거리는 한산했다. 강을 타고 카약을 하는 사람들이 간간히 지나갔고 푸줏간 거리의 상점마다 각종 고기들과 소시지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성 니콜라스 대성당 앞 광장에는 장사를 준비하는 상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트리플 다리를 건너니 마치 마티스 미술관을 연상시키는 핑크색의 프란체스카 교회가 보였다. 그 뒤 작은 골목에 들어서니 아기자기한 상점들이 많았는데 수십 켤레의 신발들을 공중에 걸어놓은 게 보였다. 무슨 설치 미술인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그곳은 신발의 거리였다.
강 주변에는 아름다운 레스토랑과 카페가 즐비했다. 한적한 카페에서 향기로운 커피를 마셨다. 류블랴나 성에 올라가려면 푸니쿨라를 타는 방법이 있지만 고적하고 호젓한 길을 천천히 걸어 올라가는 쪽을 택했다. 산 위의 성은 아래쪽에서 보는 것보다 훨씬 크고 넓었다. 망치로 코인을 두드려 이니셜을 새긴 목걸이나 열쇠고리를 만드는 청년의 미소가 해맑다. 색이 하얗지만 새콤한 맛이 일품인 레몬 젤라토로 땀을 식히고 한 잔의 생맥주를 한 모금씩 돌려 마시니 개운하고 깔끔한 맛이 그만이다.
슬로베니아어로 '사랑하는'을 뜻하는 Ljubljana(beloved)에서 따온 이름답게 루블랴나는 작고 사랑스러운 도시였다. 점심은 숙소 근처의 중국음식점에서 공인중개사인 친구 T가 샀다. 새우가 통째 들어있는 새우 딤섬이 특히 맛있었다. 다음 행선지는 플리트비체 국립공원, 그곳 근처엔 슈퍼마켓이나 빵집들이 없으므로 먹거리를 준비해야 한다. 우리는 각각 흩어져 빵과 과일을 샀다. 차를 타기 전 마트에 들려 생수, 우유와 요구르트, 달걀, 쿠키, 견과류와 맥주 등도 준비했다.
요정들이 살 것 같은 작은 마을, 집 아래로 흐르는 물을 이용한 물레방아로 방아를 찧는 곳, 옥빛 물줄기와 작은 폭포들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 이름도 예쁜 라스토케를 찾아가는 동안 차량에 표시된 바깥 온도는 36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대부분 프라이빗이라는 팻말을 붙여놓아 내부를 구경할 수 있는 집은 거의 없었다. 꽃과 물과 장작과 돌, 무엇보다 그곳의 일품은 고요였다. 숙소 현관에 앉은 여행자들이 간간히 맥주를 마시며 한가로이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물소리에 파묻혀 흘러가고 있었다.
플리트비체의 손주 뻘인 라스토케를 떠나 플리트비체로 가는 길가에 SOBE(숙소-민박)라는 간판이 많다. 침대에 사람이 누워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ZIMMER(독일어로 ‘방’이라는 뜻)라고 써진 걸 보니 독일과 오스트리아 여행자들이 많은가 보다.
그림자만 빼고 온통 푸르다. 그곳에선 바람의 냄새까지도 푸름을 안고 다녔다. 나무도 물도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도…, 플리트비체 예제라는 플리트비체의 호수들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낮은 위치의 호수가 해발 500m를 넘는 고지대, 카르스트 지형에 형성된 두 개의 강물에 석회질이 녹아 16개의 호수와 100여 개의 폭포로 만들어진 국립공원이다. 공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숙소는 숲 속의 콘도처럼 공기가 청아했고 바람에서 깊이가 느껴졌다. 별과 달이 그곳에서만 자라는 생명체처럼 푸르게 보였다면 기분 탓일까?
소방사인 집주인 Darko 역시 우리의 짐을 하나하나 친절하게 옮겨 주었다. 저녁식사는 마트에서 산 감자와 당근 등을 넣고 만든 카레라이스, 이국에서 먹는 카레 맛 또한 일품, 원활한 화장실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요구르트는 필수, 청포도와 자두까지 먹고 나니 아쉬울 게 없었다.
‘크기와 모양, 그리고 색깔 상관없이 초 한 자루씩 준비’
여행을 떠나기 전 친구들에게 명시한 준비물이다. 각자 가져온 크고 작은 초를 켜고 와인을 마시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숲 속의 밤이 지나고 있었다.
플리트비체는 여러 개의 트레킹 코스를 가지고 있다. 한 낮의 높은 기온은 물론이요, 세계 각국에서 몰려드는 여행자들과 좁은 데크에서 땀 냄새 풍기는 어깨를 부딪치며 걷지 않으려면 아침 일찍 나서는 게 상책, 입장은 8시부 터지만 7시 반부터 공원이 오픈하길 기다렸다. 우리는 6시간 정도 소요되는 H코스를 선택했다. 상류와 하류를 모두 접할 수 있는 코스다.
호수는 햇살의 각도에 따라 빛의 파장을 달리 하면서 세상 모두의 푸름을 전시하듯 보였다. 그곳에서는 누구나 푸름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나무 데크를 따라 호수 위를 걷는 동안 모든 색을 파랗게 녹여낼 듯 신비스러운 풍경이 이어지고 펼쳐졌다. 현실을 비껴간 물의 밭에 물고기들이 자라고 있었다. 너무나 투명해서 물고기의 내장까지 비쳐 보이는 건 아닐까 싶었다. 하늘이 호수고 호수가 하늘인 곳, 핀란드에서 보았던 호수들과 노르웨이의 피요르드와는 또 다른 푸름이다. 그곳에서 살면 사람이 파람으로 변하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물의 깊이와 햇살의 방향, 하늘의 밝기에 따라 아직 이름 붙여지지 않은 보석처럼 모든 초록이 빛나고 있다.
나무 길과 호수, 호수 속에 잠긴 하늘, 그리고 물고기, 바람을 가르는 폭포와 사람들의 발자국을 따라 걷다 보니 잠수한 사람처럼 나무가 물속에 누워있는 게 보였다. 그 나무가 나였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트레킹을 일찍 시작한 이유도 있겠지만 우리의 걸음이 빠른지 점심을 먹고도 주차장으로 돌아가기까지 4시간 남짓 걸렸다. 이미 공원은 인산인해,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데크를 걸어가는 사람들이 어깨 부딪히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선물로 지어진 도시라는 뜻의 자다르는 중세시대 로마 교황청의 직속 관리를 받을 정도로 중요한 건축물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 숙소는 시저와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에 형성된 로만 포럼 안에 위치하여 두말할 나위 없이 훌륭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동 호수만 알면 찾을 수 있는 고층 아파트가 아니고 오래된 건축물이다 보니 주소 하나 달랑 들고 집을 찾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자다르에선 가스를 배달하는 청년에게 물어보아 비교적 쉽게 집을 찾을 수 있었다.
자다르 숙소에는 주차장이 없다. 도로변에 주차하고 길가에 설치된 주차요금 정산기에 필요한 시간만큼 동전을 넣은 후 영수증을 뽑아 차 유리창 앞에 놓아두면 된다. 중요한 건 동전이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카페에서 동전을 바꿔주긴 하지만 20쿠나 이상은 안 된다고 하여 동전을 준비하는 것도 일이었다.
농담처럼 D는 말했었다. '여행 가서 맛있는 누룽지 백숙해줄게!'
우리는 자다르에서 정말 꿈처럼 맛있는 누룽지 백숙을 먹었다. 근처 마켓에서 닭과 통마늘을 사고, 각종 콩을 비롯한 잡곡으로 두툼하게 눌려온 누룽지와 준비해 온 한약재를 넣고 만든 백숙은 더위에 지친 우리들에게 더할 나위 없는 보양식이었다. 매콤한 할라피뇨와 오이 피클을 곁들이니 로마 황제가 부럽지 않은 행복감이 밀려들었다. 땡큐! D~~
바다가 작곡을 하면 파도와 바람이 연주를 한다. 바다 오르간이 만들어진 이후 단 한 번도 같은 음악을 들려주지 않았을 것이다. 앞으로도 그럴 거다. 바다에 면한 대리석 계단 아래에 75m의 거대한 파이프 35개를 설치하여 바람의 세기, 파도의 크기와 속도에 따라 바닷물이 공기를 밀어내며 오르간 소리를 낸다. 간조 때에는 파이프의 일부가 보이기도 하련만 그때는 만조인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크로아티아의 천재적인 설치예술가 니콜라 바시츠(Nikola Basic)가 2005년에 만들었는데 그 옆에 있는 태양의 인사 역시 그의 작품이다. 밤이 되니 낮에 모은 태양열로 LED 조명을 현란하게 바꾸어 그야말로 태양이 인사하는 격인데 현란한 조명이 마치 노천 클럽 분위기다. 중세 로마의 건축물도 아름답지만 현대의 설치 미술가가 착안해 낸 두 작품이 더 많은 여행자들을 자다르로 몰려들 게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여행자들이 모두 그곳으로 모인 듯 사람들의 열기로 가득했다. 바다 속으로 첨벙첨벙 뛰어들어 환호하는 젊음들, 안 그래도 뜨거운 한 여름밤이 더 뜨겁게 느껴졌다. 해안선을 따라 다시 자다르 유적지 중심으로 나갔다. 그곳 역시 많은 사람들이 아이스크림을 먹고 맥주를 마시며 더위를 식히고 있었다. 로만 포럼 돌 무더기에 앉으니 찜질방처럼 따끈따끈하다.
막힘없이 터진 하늘, 돌에 새겨진 천 년의 세월과 이야기, 반들반들한 대리석 길바닥, 여행에서 가장 중요한 건 마음을 푸는 일이다. 낯선 곳이건만 시간은 낯설 겨를도 없이, 흘린 생각을 주워 담을 틈도 없이 익숙하게 지나갔다. 필름처럼 돌아가는 사람들, 수만의 웃음이 피어나고 수천의 눈물이 흘러갔을 광장에 조용히 앉아 있는 시간,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어떤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바람을 리듬 삼아 춤을 추는 갈매기를 바라보는 일이면 충분했다. 바람에 밀려가듯 그 시간을 놓아주고 싶었다. 가슴이 서늘했다. 자다르의 밤이 그렇게 깊어가고 있었다.
원래의 계획대로라면 우리의 일정은 매일 아침 9시에 시작되어야 했다. 그러나 연일 기온이 35도를 넘어 40도를 육박하다 보니 최대한 일찍 움직이는 방법을 택했다. 부지런쟁이 T와 D는 식사 담당? 도시를 옮기고 숙소가 바뀔 때마다 주방을 점령하고 냉장고에 먹거리 장전부터 시작해서 커피와 과일 후식까지 완벽한 세팅을 했다. 그 덕에 우리는 아침 일찍 나갈 수 있었고 두세 시간 돌아보고 한 낮엔 다른 도시로 이동하고 저녁이 되면 야행성 동물처럼 다시 움직이곤 했다. 9시쯤 어둠이 내렸다.
다음 날 아침 7시, 주차 기계에 동전도 더 넣을 겸 해안선을 따라 다시 바다 오르간에 갔다가 자다르 구시가지며 성당들을 둘러보러 나갈 요량이다. 그런데…, 마치 약속이나 한 듯 다섯 명 중 네 명이 원피스를 입고 나섰다. 그러자 T가 말했다.
“오늘은 모두 원피스네? 난 없는데…” 평소 직설적이고 솔직한 표현을 잘 하는 친구였다. “글쎄 그러네, 나한테 하나 더 있는데 입을래?’ J가 선뜻 자신의 원피스를 꺼내 주었다. 여행 출발 이틀 전 단체 카톡 메시지가 떴다. ‘대전 친구들은 공항 패션이 뭐야?’ D였다. 다섯 중 셋은 서울에 산다.
‘비행기 탈 거니까 편한 바지와 티셔츠 입으려고…, 우리가 연예인도 아니고 무슨 공항 패션?’ 하며 웃었었다. 쉰다섯이라는 나이는 상관없다. 예뻐 보이고 싶은 맘 여전한 여자들이다. ‘오늘은 어떤 모자를 쓸까? 이 티셔츠엔 이 바지가 어울릴까?’ 하며 은근 의상에 신경 쓰는 눈치들이다. 그러다 보니 친구가 입은 옷에 포인트가 필요하겠다 싶게 밋밋해 보이면 목걸이도 빌려주고, 현지에서 값싼 반바지와 평소에는 눈여겨보지 않게 치렁대는 집시풍의 스커트도 사 입고 깔깔대며 다니는 재미가 쏠쏠했다. 저녁이면 침대에 나란히 누워 마스크 팩을 붙이고 뜨거운 태양에 지친 피로를 진정시키며 재미있는 이야기로 폭소를 자아내기도 했다. 아내와 엄마가 아닌 나와 친구만 있는 시간이 그저 편하고 행복했던 건 비단 나만의 느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
한적한 해변을 걸어 바다 오르간을 지나 원통형의 도리트 대 성당 근처로 왔다. 성당 앞 쪽, 그러니까 로만 포럼은 고대 로마시대의 시민광장이었는데 지금은 무너진 돌 무더기만 군데군데 남아있다. 2차 세계대전 때 폭격 맞은 것은 그대로 둔 것이라고 한다. 2개의 장미 창과 3개의 회랑이 있는 아나스타샤 성당은 종탑과 함께 어우러져 투박한 미를 보여준다. 5개의 우물이 있는 나로드니 광장을 지나면 자다르로 들어오는 육지의 문이 보인다. 문 위에는 베네치아를 상징하는 날개 달린 사자상이 있는데 수 천 년 전, 이탈리아의 땅이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탈리아 레스토랑이 많고 크로아티아의 언어를 유심히 들어보면 이태리어 억양이 강하게 느껴지는 이유까지도…
유럽인이 꼽는 낙원이 크로아티아라면, 크로아티아 사람들이 최고 좋아하는 곳이 프리모 스텐이라고 한다. 프리모스텐과 트로기르를 거쳐 스플리트로 이동하는 날이다. 두 도시를 들르긴 하지만 먼 거리는 아니다. 김 가루와 잔멸치, 참기름을 넣어 고소한 주먹밥을 만들어서 깨끗하게 씻어 말린 즉석 밥그릇에 가지런히 담았다. 운전대의 바통을 넘겨받은 나는 햇빛을 차단하기 위한 긴소매 니트를 입고 중무장을 했다. 류블랴나 이후 내비게이션은 별 탈 없이 “…turn left right now” 하며 친절히 안내했고 외부 온도가 얼마든 상관없이 시원한 자동차 안에서 듣는 김동욱의 노래는 감미로웠다.
프리모스텐의 공영주차장에 파킹을 하고 올드 타운으로 들어서는 길, 태양은 이미 찢어질 듯 팽창했다. 해변을 가득 채운 사람들이 거의 벗은 세미 누드 수준인 거와는 반대로 우리는 긴소매와 스카프로 태양을 피했다. 평소 햇빛 알레르기가 있는 친구 M이 J와 함께 스카프와 손수건으로 얼굴을 둘둘 감아 탈레반 반군 아줌마 같은 모습으로 내 뒤 쪽에서 걸어왔다. 한 카페의 문 앞에 서 있던 청년이 그 모습이 신기했는지 킥킥 웃으며 카페 내부를 향해 큰 소리로 급하게 소리쳤다.
‘헤이! 빨리 나와 봐, 무지 웃기는 여인들이 지나가고 있어…’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태양과 사투를 벌이면서 언덕으로 향했다. 한적한 돌길과 돌담이 보기 좋아서 한 명 씩 독사진을 찍고 있었다. 아직도 아들딸에게 까지 ‘마망, 귀여워요’라고 하는 말을 듣는다는 귀여운 친구 J는 사진 찍는 포즈와 표정이 다양하다. 친구는 사진 찍힐 때마다 언제나 우리를 폭소케 했다. J가 담을 껴안듯 포즈를 취한다. 그 익살스러운 자세에 카메라가 흔들릴세라 겨우 웃음을 참으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그런데 돌연 머리칼이 하얀 할아버지가 나타나더니 J의 뒤 쪽에서 포즈를 취하는 게 아닌가? 뷰 파인더에 눈을 대고 있던 터라 그이의 출현에 적잖이 놀랐다. 순식간에 모델이 둘이 되었고 나는 재빨리 셔터를 눌렀다. 센스와 위트가 넘치는 할아버지의 돌발 행동에 우리는 폭소를 터트렸다. 그에게 엄지손가락을 척하고 올려 보였다. 짧은 순간의 유쾌한 퍼포먼스였다.
햇살이 바늘처럼 피부에 박혔다. 아무렇게나 그린 듯한 담벼락의 그라피티, 낡고 바란 나무 간판, 바다를 향해 길게 팔을 뻗은 꽃, 주렁주렁 탐스럽게 매달린 청포도, 헐렁하게 늘어진 셔츠를 입고 한 없이 사람 좋은 미소를 머금은 할아버지, 꾸미려 하지 않았지만 완벽하게 어울리는 풍경이 미치도록 아름다웠다.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한 하늘과 바다 사이로 금빛 태양이 세상을 끌고 있었다. 세상 어디에도 없는 평화의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언덕 끄트머리에 있는 성 조지 성당에 오르니 아드리아 해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성당 주변을 빙 돌아가며 묘지가 빼곡하다. 비문을 보니 그닥 오래된 묘지가 아니고 요절한 사람들이 많았다. 내전 때 희생당한 사람들이 아닐까 생각했다. 청아한 바람이 불어오는 벤치에서 땀을 식히며 아드리아의 굴곡진 해안선을 바라보았다. 고즈넉한 시간이 지나갔다. 프리모스텐은 Bavic이라는 유명 브랜드의 레드 와인의 원산지, 크로아티아는 와인을 수출하지 못할 정도로 모두 내수로 소비된다고 한다. 언덕을 내려오는데 나지막한 지붕 아래, 작은 테이블 위에 하우스 와인 몇 병을 올려놓은 게 보였다. 유명 브랜드는 아니지만 소박하게 웃는 아저씨의 미소가 믿음직하여 디저트용 스위트 와인을 한 병 샀다. 그리고 주차장으로 돌아가는데 유리 너머로 전기구이 치킨이 돌아가는 모습이 보였다. 주먹밥이 있지만 트로기르로 가는 동안 레몬 맥주와 곁들여 먹으면 맛있겠다 라는 의견, 그러나 모두 예약된 거라 우리가 살 수 있는 건 달랑 반 마리, 운전을 하는 내게 친구가 건넨 치킨 한 조각이 유달리 고소하고 쫄깃했다.
프리모스텐에서 트로기르까지는 30분 거리, 자동차를 이용하니 작은 도시들을 쉽게 찾아다닐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공영주차장에 주차를 한 후 올드타운으로 향했다. 여행을 시작한 지 5일째, 비가 그립다. 그러나 비는커녕 사막 같이 타들어가는 햇빛뿐이다. 트로기르는 아드리아 연안과 접한 항구도시로 원래는 섬이지만 다리로 연결되어 있어 전혀 섬같이 느껴지지 않았다. 유네스코 역사 도시로 지정된 트로기르는 아름다운 로마네스크 교회들과 베네치아 시대의 뛰어난 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의 건물들이 함께 건축되어 있다. 아름다운 항구엔 늘씬한 야자수들이 쭉쭉 자라고 미국, 영국, 프랑스 등, 각국에서 모여든 개인 소유의 호화로운 요트들이 즐비했다. 요트들은 고급스러운 파티에 참석하려고 잘 차려입은 미모의 여인처럼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요트에 아름다운 여인의 이름을 붙이는 이유는 순한고 아리따운 여인처럼 순항하길 바라는 이유라는 말이 생각났다. 호화 요트는 없지만 여행하며 살 수 있는 나 역시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유럽 도시의 대부분, 광장으로부터 여행이 시작된다. 트로기르 역시 시계탑이 있는 이바나 파블로 광장에서 시작해서 성 로렌스 성당과 종탑, 시청 사들을 둘러보고 광장의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게 되었다. 평소 아이스커피를 즐기지 않는 나는 이열치열 격으로 뜨거운 커피를 주문하고 D는 아이스커피를 주문했다. 그러면서 친구가 웨이트리스에게 말했다. ' ~without ice cream please~' 그곳의 아이스커피는 아이스크림 한 덩어리를 풍덩 띄워서 준다는 걸 이미 경험한 터였다. 달콤하지만 텁텁함을 주는 맛보다 깔끔하고 시원한 맛을 원한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가져온 커피엔 역시나 한 스쿱의 아이스크림이 글라스의 1/3을 채우고 있다. 그래서 다시 말했다. ‘아이스크림을 넣지 말아달라고 했는데…’ 그러나 우리 나이 또래의 종업원 여자는 ‘네가 말한 대로 이건 크림이 들어있지 않은 커피다’라고 말하곤 휙 하니 가버린다. 우리는 서로 할 말을 잊고 얼굴을 마주 보았다. 어쩔 수 없이 아이스크림을 접시에 떠낸 다음 얼음과 물을 더 넣어 싱거운 아이스커피를 마셔야 했다.
그때 한 팀의 한국 단체 여행자들이 광장에 도착했다. 우리는 카페에 앉아서 가이드의 설명을 귀동냥으로 들었다. 설명이 끝나고 사람들은 왁자지껄 저기 저기 흩어져 바쁘게 인증 숏을 찍었다. 셀카봉을 들어 올리는 남녀, 시청사를 배경으로 차렷 자세를 하는 아저씨, 그리고 다시 또 어디론가 바삐 떠나는 모습이 보였다.
커피를 마시곤 좁은 골목을 샅샅이 누비며 아기자기한 소품들을 구경하는데 크로아티아에 온 이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바람의 기운이 느껴졌다. 하늘엔 순해 보이는 구름 몇 점이 떠 있었다. ‘비가 올 것 같아, 이제 그만 갈까?’ 하며 여유 있게 주차장으로 향하는데 갑자기 심상찮은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길가의 작은 가판대에 조그만 액세서리며 기념품을 늘어 논 상점이 즐비했다. 그 옆을 지나가는데 장사를 하던 아가씨들이 가판을 접는 손놀림이 불법 노점상 단속 나온 경찰을 피하는 손길보다 더 빠르게 다다다다 움직이는 게 보였다. 순간, 이게 예사로운 징조가 아니지 싶었다. 모자를 벗어 들고뛰기 시작했다. 그렇게 3~4초도 지나지 않았는데 몸을 가누기가 힘들다. 바람이 내 몸을 집어삼킬 듯 잡아채고 있었다. 후드득, 비가 듣는 건 순간이고 어디 잠깐 피할 겨를도 없었다. 육중한 철문을 밀어내듯 돌풍과 사투를 벌이며 무거운 발걸음을 어렵게 옮겨 가까스로 차에 탈 수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다행히 많이 젖진 않았지만 주차장은 순식간에 물바다로 변했다. 지나가는 소나기인지 몇 시간이고 계속 쏟아질지 가늠이 되지 않는 상황이다. 일단 주차 요금을 정산하고 출발을 하려는데 비가 더 거세졌다. 게다가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하는 동안 주차 시간이 초과되었는지 안전 바가 올라가지 않아 출차를 할 수가 없다. 조수석에 앉아있던 M이 다시 내려서 주차비를 내고 영수증을 가져왔다. 비를 쫄딱 맞은 M이 난데없이 추위에 덜덜 떨었다. 주차장을 나와 와이퍼를 최고 속도로 높였어도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어딘지 모를 건물 앞에 일단 정차했다. 스플리트까지는 약 40 여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지만 그대로 비가 그치지 않는다면 일찍 어두워질 테고 나이트 운전을 할 수도 있겠다는 염려가 되었다. 30여 분을 기다렸지만 비는 그칠 기미가 없어 보였다. 나는 비상등을 깜박이며 다시 차를 조심스레 출발시켰다. 다행히 트로기르를 벗어나 남쪽으로 가까워질수록 비의 세력은 점점 약해졌다. 그토록 우리가 기다리던 비는 무시무시하게 우리를 스쳐 지나갔다.
멀리 스플리트 시가지가 눈에 들어오는 시점, 갑자기 굉음을 내며 오토바이가 내 운전석 쪽으로 그러니까 역주행하여 쌩 하니 추월했다. 물론 편도 1차선 도로이긴 하지만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놀란 가슴이 아직 진정도 안 된 상황에서, 이번엔 경찰 오토바이가 삐요삐요하며 내 뒤를 바짝 뒤쫓는다. 뒷자리의 친구들, 걱정되는 맘에 난리법석이다.
‘우리가 뭐 잘못한 거야?, 우리 쫓아오는 거 아니지?’
나는 대답할 겨를 없이 사이드 미러로 그의 태도를 주시했다. 차를 세우라는 수신호를 한다거나, 아니면 추월할 테니 이해하라 거나…, 브레이크를 살짝 밟으며 속도를 늦추니 그는 바로 나를 추월하며 오른손을 번쩍 들어 고맙다는 수신호를 보냈다.
‘휴~~’
잘못한 게 없었지만 그래도 긴장된 순간이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3중 추돌사고가 벌어져있는 걸 발견했다. 우리를 추월해 간 경찰이 거기 있었다. 구급차도 와있는 상황으로 보아하니 인명피해도 있는 듯했다.
대부분의 차량이 스플리트 중심가 쪽으로 우회전하는데 우리의 친절한 내비게이션은 한적한 시골 쪽으로 안내한다. 그렇게 10여분 후, 도무지 성당이나 유적의 그림자도 안 보이는 인적 없는 마을로 데려다 놓고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한다. 주소는 ‘Mosorska ulica 11’, 내가 이런 위치에 숙소를 정했을 리 만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이상했다. 비는 부슬부슬 내리는 상황, 짐칸에서 우산을 꺼내 들고 M과 나는 집을 찾아 나섰다. 도로 양쪽에 9,12,13,15,17번지는 있는데 11번지는 없다. 몇 군데 들어가 물었지만 그들은 영어를 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뭔가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또 한 곳에 들어가 물어보니 역시 영어를 못하는데 아들 내외랑 주고받는 대화와 제스처로 보아 이곳이 아닌 다른 곳에 같은 지명이 있다는 뜻처럼 느껴졌다. 주변 마켓에 들어가 물어보니 한 집을 가리키며 그곳 2층에 우리의 호스트 Lana가 산다는 것이다. 그곳으로 가보았지만 공사 중이며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다. 호스트에게 전화를 했지만 연락이 되지 않았다. 그때 마켓에서 나오는 한 남자에게 주소를 보여주고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자기가 주소지를 찾아보겠다며 차를 타고 쌩 하니 가더니 돌아와 하는 말, 지명은 여기가 맞는데 그런 번지는 없다는 것이다. 호스트와 전화 통화를 하고 싶은데 우리 전화로 연결이 안 된다는 말을 했다. 자기는 전화기를 안 갖고 왔는데 와이프가 혹시 갖고 있는지 알아보겠다고 다시 마켓으로 들어갔다. 그녀도 역시 전화기를 놓고 왔다면서 집에 가서 전화기를 갖고 올 테니 5분만 기다릴 수 있겠냐고 묻는다. 5분 아니라 50년도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이 착하고 친절한 남자였다. 남자는 미션을 수행하는 첩보원처럼 또다시 쌩 하니 차를 출발시켰다. 그리고 구세주처럼 다시 나타나 전화를 걸어주었다. 결론은 우리가 찾아가야 할 곳은 올드 타운 근처로, 같은 이름의 지명이 그곳에도 있던 것이다. 그는 그 주소와 가장 가까운 다른 지명을 내비에 입력시켜 주었고 호스트는 길에서 우리를 기다리겠다는 말을 했다. 그곳까지는 약 15분 거리, 그 자상하고 친절한 남자에게 무엇으로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부인이 곁에 떡 하니 서 있지 않았더라면 허그를 했을지도 모른다. 애기들 과자라도 사 주고 싶은 맘이 꿀떡 같았지만 그저 고맙다는 말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서둘러 그곳을 떠나야 했다.
일방통행의 좁은 골목 저 편에 Lana가 서 있는 게 보였다. 그녀는 쏘리를 연발하며 우리를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그러나 미리 준비해둔 주차 공간은 차의 길이보다 여유가 거의 없어 보였다. 주차를 하고 나면 자동차 트렁크의 문을 열 수 없는 상황, 러기지를 먼저 내리고 그녀의 남편이 나 대신 주차를 해주었다. 그녀의 집 역시 외관과는 달리 너무나 현대적으로 깔끔하게 꾸며져 있었고 여기저기 동양적인 소품들로 장식되어있었다. 호텔 프런트의 매니저처럼 스플리트의 지도를 준비한 그녀는 우리가 돌아볼 곳을 설명했다. 그리고 미안함과 더불어 환영의 의미라며 와인 한 병을 건넸다. 체크아웃은 어떻게 하냐고 물으니 메일 박스에 키를 넣어두고 가면 된다고 한다. 광풍과 호우를 뚫고 엉뚱한 마을에서 헤매다 찾아온 집이라 그런지 유난히 더 아늑하게 느껴졌다. 여전히 주방을 접수한 T와 D가 준비한 육개장으로 맛있게 식사를 하고 죽은 듯 잠이 들었다. 힘든 하루였음에도 불구하고 지나감이 여전히 아쉬운 밤이었다.
스플리트를 돌아본 후 흐바르 섬으로 가는 날이다. 차를 두고 가야 하므로 1박 2일의 짐을 배낭에 챙기고 러기지는 차에 실어두었다. 골목을 내려가니 바다가 지척이다. 북문 바로 앞에 크로아티아의 미켈란젤로라고 불리는 ‘이반 메슈트로비치’가 만든 4.5m 높이의 거대한 그레고리우스닌의 동상이 있다.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의 하나로 일찍이 10세기에 크로아티아어로 미사를 드릴 수 있도록 간청한 주교란다. 그의 엄지발가락을 만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 때문에 그의 발가락은 빤질빤질 광이 난다.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의 네 개의 문 중 아드리아 해를 볼 수 있는 문은 남문으로 ‘청동의 문’, 북문은 ‘황금의 문’, 동문은 ‘은의 문’, 서문은 ‘철의 문’으로 불린다. 노예 출신으로 황제까지 오른 입지적인 인물이었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 여생을 지내기 위해 만든 디오클레티안 궁전은 정 사각형 모양이다.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궁전 속에 보통 사람들이 살고 있다. 집과 집 사이를 가로질러 매 놓은 빨래 줄에 하얀 팬티들이 부끄럼 없이 널려 있고 에어컨 실외기에서 물이 뚝뚝 떨어진다. 레스토랑과 카페 테이블은 물론 그 어느 곳이든 어김없이 꽃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저마다 다른 컬러의 화음으로 사람들의 발걸음과 눈을 향기롭게 만든다. 그 꽃 하나만으로도 발걸음이 행복하다. 디오클레티안 궁전 앞 열주 광장 돌계단 위에 앙증맞은 방석들이 놓여있다. 테라스를 카페로 사용하는 이유다. 크던 작던 궁전이 있으면 멀지 않은 곳에 꼭 요새가 있다. 장미를 지키는 가시라 할까? 스플리트에도 성 미카엘 요새가 있다. 지하 궁전엔 각종 보석의 액세서리 상점들이 즐비하다. 야자수와 대리석 바닥이 펼쳐진 리바 거리는 단정하고 부유한 도시의 위용을 드러낸다. 가까운 섬으로 가는 페리들이나 수상 스포츠를 위한 요트 대여를 하는 사람들이 바다를 배경으로 파라솔을 펼치고 여행자들을 유혹했다.
흐바르로 향하는 페리 야드로리니아 호의 예약 바우처를 티켓으로 교환했다. 티켓을 구입하려는 여행자들의 줄이 꽤 길게 늘어서있었다. 6번 플랫폼에서 승선한다는 것도 확인했다. 근처 레스토랑으로 점심을 먹으러 들어갔다. 샐러드와 피자, 리조토, 파스타 등을 주문하니 음료를 묻는다. 식사 후 커피를 마실 생각이었지만 테이블에 놓인 생수병을 가리키며 우린 물이 있다고 했다. 그러자 웨이터가 거침없이 말했다. 레스토랑에선 너희들이 가져온 물을 먹을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그의 말이 틀린 건 아니지만 순간 당황스러웠다. 무안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여 생수병을 배낭에 집어넣고 맥주를 주문했다. 조금 고급스러워 보이긴 했지만 주로 여행자들이 들르는 노천 레스토랑이고 외국인인 우리가 무안할 정도로 대하는 그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았다. 한 무리의 여행자로 보이는 가족이 들어왔다. 그들 역시 생수병을 들고 들어왔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짜지 않게 해달라는 주문을 했건만 음식은 짜고 가격에 비해 그다지 훌륭한 맛이 아니었다. 친절치 못한 웨이터의 매너에 기분이 상한 우리는 커피는 다른 곳에 가서 마시기로 하고 그곳을 떠났다.
오전에 스플리트를 돌아본 후 오후에 숙소로 돌아가서 자동차를 가지고 항구 주차장에 주차한 후 섬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런데 항구 주차장은 이미 꽉 들어차 있고 들어오고 나가는 차들이 오도 가도 못하는 게 보였다. 주차를 해둔 숙소 근처에 가서 주민에게 물었다. 근처에서 숙박을 했는데 하루 더 주차를 해도 가능하냐고 말이다. 이곳이 복잡하긴 하지만 별 문제는 없을 거라는 대답을 했다. 그래도 미심쩍어 또 다른 사람에게 물으니 상관없다고 했다. 귀중품이랄 건 없지만 렌트한 자동차가 혹시나 견인이라도 되면 낭패니까 신중을 기한 것이다. 우리는 그곳에 자동차를 그냥 놔두기로 결정, 배낭을 메고 다시 항구로 향했다.
골목을 구경하다가 맛있어 보이는 베이커리에서, 아침으로 먹을 빵을 사고 나니 피시 마켓이 보였다. 흐바르로 갈 예정이니 생선을 살 수는 없는 일, 한국의 멸치젓 같이 청어과에 속하는 작은 생선으로 만든 이탈리아 젓갈인 엔초비를 한 병 샀다. 그리고 아기자기한 소품이 예쁜 카페에서 맥주와 커피를 마시며 느긋하게 배 시간을 기다렸다. 다섯이다 보니 어딜 가나 우리가 서있으면 자연스레 줄이 만들어진다. 그렇게 페리에도 1등으로 승선했다.
흐바르에 도착하니 소비와 레스토랑에서 나온 사람들이 다투어 호객 행위를 했다. 배에서 토해놓은 여행자들은 러기지를 끌거나 유모차를 밀며 삼삼오오 같은 방향으로 걸어갔다. 성 스테판 성당 앞 광장에 여행자 인포메이션이 있었다. 주소를 보여주며 가는 길을 물으니 지도에 방향을 표시해 주었다. 걸어서 15분, 택시를 탈 수도 있다고 했다. 그러더니 친절한 아가씨가 전화로 물어봐주겠다고 한다. 흐바르의 호스트 산드라는 날씨가 너무 더우니 택시를 타고 올 것을 추천한다고 전했다. 그녀가 가르쳐 준 곳으로 가니 서너 대의 택시가 주차되어 있었는데 우리를 본 한 남자가 다가와 차에 타라고 한다. 다섯 명이라고 하니 상관없단다. 하긴 날씬한 까씨들이니 엉덩이 조금씩 모로 세우면 안 될 것도 없지 싶었다. 거리에 비해 요금(100쿠나,약 2만 원)이 좀 비쌌지만 탁월한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꽤 높은 고지대에 있었기 때문이다.
산드라의 집은 우리가 묵을 거실과 주방에 면한 넓은 발코니가 압권, 바다가 시원하게 내려다 보였다. 수를 놓은 베드 시트며 벽에 걸린 드라이플라워 액자 등, 하나하나 정성이 깃든 게 무척 맘에 들었다. 방마다 욕실이 따로 있고 에어컨도 각각 달려 있다.
산드라는 한 눈에 봐도 무척 쿨하고 씩씩한 40대의 여인이었다. 근처의 마켓 위치와 가까운 해변으로 가는 길, 등을 알려 주고 필요한 게 있으면 벨을 누르라고 했다. 저녁식사로 해산물 음식을 먹기로 했는데 레스토랑을 추천해 달라고 하자 그녀는 두 곳을 알려주었다. 그러면서 그녀의 차로 태워다 줄 수 있으니 언제 갈 건지 알려달라고 했다.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휴식을 취했다. 아침 일찍부터 스플리트를 걷고 페리를 타고 섬까지 왔으니 피곤하기도 하련만 모두들 에너지가 넘치듯 책을 펼치고 섬에서의 일정을 상의했다. 씨 푸드 레스토랑으로 디너를 먹으러 갈 요량이니 원피스를 입었다. 산드라의 BMW가 친구 셋을 먼저 태워다 주고 되돌아와 나와 D를 태웠다. 자기는 43살이며 아이가 셋인데 큰 아들은 수상 레포츠 강사라고 했다. 나이보다 젊어 보인다고 하니 남편이 잘해준 덕이라고 하며 웃는다.
그녀가 추천한 레스토랑 두 곳 중 한 곳을 찾아갔는데 아쉽게도 씨 푸드 전문점이 아니었다. 해산물 음식을 위주로 주문했는데 맛은 좋았다. 석양이 몰려오는 야외 테라스에서 먹는 저녁 식사는 분위기에 취해 더욱 그럴싸했다. 식사는 특별히 J가 계산했다. 그런데 웨이터가 오더니 커피를 제공하겠다고 한다. 우린 맥주에 음식량이 과한데다 어둡기 전에 요새에 오르려면 시간이 촉박할 것 같아 오더를 하지 않았었다. 공짜냐고 물으니 그렇단다. 해외에서 커피를 디저트로 서비스하는 경우는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었다. 감사한 마음으로 커피를 받았지만 점점 어두워지고 있어서 서둘러 일어나느라 느긋하게 마시지는 못했다.
가슴에서 우러난 친절함에 한껏 충만한 마음으로 돌길을 따라 요새에 오르기 시작했다. 16세기 베네치아 인들이 오스만 튀르크의 침입을 막기 위해 축성한 베네치아 요새, 아무래도 너무 늦은 것 같다. 어느새 어둠이 내려 주변이 어두웠고 그렇게 늦은 시각까지 티켓을 판매할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나가는 이에게 물으니 자기도 정확하게 모르겠다고 한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올라가기로 하고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유니크한 감각을 뽐내는 액세서리와 그림을 파는 예쁜 상점들이 많았다. 무엇보다 세월이 묻어나는 반질반질한 계단이 흐바르의 예스러운 향기로 가득했다. 흐바르의 명물인 라벤더 언덕에 가고 싶었지만 하루에 버스가 한 번뿐이란다. 기념으로 말린 라벤더 향주머니를 몇 개 구입했다.
요새 쪽의 계단 골목엔 카페와 레스토랑이 주로 많았다. 숙소로 돌아가려면 페리를 내린 해변 끝까지 쭉 따라가서 프란체스코 수도원이 보이는 곳에서 계단으로 올라가면 된다. 수도원 앞으로 조그만 해변이 있어서 신발을 벗고 바닷물에 발을 담갔다. 생각보다 차갑진 않았다. 모래가 아닌 몽돌 해변인데 물이 어찌나 맑던지 깊이를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자칫 하면 깊은 곳으로 쑤욱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잠깐이었지만 가슴에 담긴 시름도 바람처럼 날아갈 듯 시원했다. 바다에서 나와 신발을 벗어 든 채 맨발로 걷기 시작했다. 햇빛에 달궈진 돌바닥이 여전히 따스했다. 이국에서 사랑하는 친구들과 맨발로 밤길을 걷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마음이 벅차고 행복했다.
친구들이 하나 둘 잠자리에 들고 불을 껐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친구들이 깰까 봐 살그머니 메인 발코니로 나갔다. 부겐빌레아가 흐드러지게 핀 화단 옆으로 바비큐 그릴이 놓여있었다. 커다란 대리석 테이블 앞에 앉은 산드라가 인터넷으로 게스트들의 예약 상황을 체크하고 있었다. 그녀가 흔쾌히 앉으라고 한다. 집이 참 예쁘다. 리모델링한 것 같다. 인터넷 사진으로 본 것보다 훨씬 아름답고 침구류가 호텔보다 쾌적하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니 많은 게스트들이 만족해한다고 말했다. 벽에 걸린 액자들을 혹시 당신이 만든 것이냐고 물으니 그렇단다. 미술을 전공했냐고 물으니 원래 직업은 셰프인데 소베 사업을 시작하면서 그만두었다고 한다. 우리가 저녁 먹으러 갔던 레스토랑이 자기가 요리사로 있던 곳인데, 음식이 어땠냐고 물었다. 미술에 대해 공부한 적은 없고 관심이 많다고, 그래서 해마다 집안 내부를 새로 꾸미고 침실을 바꾸고 심지어 페인트칠까지 직접 한단다. 1년에 6개월만 일하고 3개월은 쉬고 3개월은 집을 새 단장하며 보내는데 무엇보다 각 나라에서 오는 손님들과 만나고 친구가 되는 게 너무 행복하단다. 1층엔 젊은이 혼자 1년을 렌트해서 묵고 있는데 6개월만 일하고 6개월은 여행을 다닌다고 한다. 인터넷에 올려놓은 3층 룸을 보여주었는데 그 방은 꽤 클래식한 집기로 꾸며져 있었다. 한 번은 북한에서 온 게스트가 있었는데 남한 사람과는 너무나 다르다면서 그의 말투를 흉내 내기 시작했다.
산드라가 북한에서 온 게스트에게 아이가 있냐고 물으니 Yes! 하더란다. 그래서 2명이냐? 물으니 No! 하더란다. 3명이냐? 물으니 역시 No! 그렇게 No만 거듭하기에 나중에 가서 그러면 1명이냐? 물으니 그제서 Yes! 했단다. 마치 그는 Yes나 No만 말할 수 있는, 뭔가를 말하면 안 되는 무뚝뚝한 군인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그녀가 흉내 내는 게 어찌나 우습던지 한참을 웃었다. 내가 음악 선생이라고 하니 무슨 악기를 다루냐면서 멋진 직업을 가졌다고 했다. 내일 우리는 모스타르로 갈 예정이라고 하니 참으로 아름다운 도시라면서 그녀의 엄마가 모스타르 사람이라고 했다. 늦은 밤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 유쾌했다.
아침 일찍 요새에 오르기로 했다. 크림 수프와 빵, 소시지, 과일로 간단히? 식사를 하고 나니 7시. 산드라에게 작별 인사를 할까 했지만 이른 시각이라 혹시나 아직 취침 중일지도 모르므로 간단히 메모를 남기고 집을 빠져나왔다.
요새 쪽으로 난 나지막한 돌계단과 골목을 20여 분쯤 오르니 아드리아 해의 시린 바다가 드라마처럼 펼쳐졌다. 일찍이 베네치아 공국의 지배를 받던 섬으로, 회백색의 고색창연한 석조 건물들과 붉은 지붕은 바다를 마주 보며 인내한 세월의 무게로 빛을 발했다. 오랜 주택들을 지나 산길로 접어드니 푸른 소나무 향이 코끝에 진하게 전해져 온다. 어떤 자극도 부추김도 없이 천 년의 세월을 인내해온 흐바르의 너그러운 풍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청량한 공기, 돌길을 따라 이어진 어느 집 정원에는 알로에와 사보텐 선인장, 그리고 주인의 손끝에서 사랑을 담뿍 받고 자란 다육이 가득했다. 햇빛에 태닝 되어 건강해 보이는 피부를 가진 주인 여자가 정원에 물을 뿌리고 있다. 한가로움과 여유가 그대로 물씬 풍긴다. 요새로 가는 중턱 솔숲 사이로 보이는 타운의 한 폭 풍경이 마치 오래된 그림 액자 같이 정겨웠다. 오랜 세월이 지났어도 여전히 향기와 윤기를 지닌 흐바르의 생명력과 역사의 향취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아드리아 해를 오가는 요트들 틈바구니로 작은 어선이 기우뚱거리며 항구로 접어들고 있었다.
요새에서 내려와 스테판 성당의 반대 편 골목들을 거닐었다. 오래된 포석 위를 거니는데 발끝에 느껴지는 감촉이 좋다. 더구나 오랜 시간 함께한 친구들과 게으른 산책 같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지라 더욱 행복하다. 어느 골목에 이르자 조그만 계단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앉아 커피를 마시거나 빵을 먹고 있는 게 보였다. 작은 빵집인데 출입문 옆에 소박한 초상화가 걸려 있고 Nonica 파티셰라는 글씨가 써져 있다. 노니카는 현재 그곳을 운영하는 파티셰의 할머니, 그러니까 3대째 운영되는 맛 집이다. 그러나 공간이 너무 좁아 셀프서비스로 주문을 해서 밖으로 들고 나와 먹는 거다. 유럽에서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면 거의 에스프레소 수준으로 진한 커피를 준다. 그러므로 뜨거운 물을 많이 넣어달라는 주문을 잊지 않는다. 브라우니와 레드 후르츠 크럼블 케이크를 샀다. 견과류를 갈아 넣은 브라운 빛깔의 네모진 케이크 위엔 눈이 내린 듯 하얀 슈가 파우더가 뿌려져 있고 빨강과 파란색 베리 두 알, 그리고 애기 손톱만 한 허브 잎 하나가 얹혀있다. 모양과 빛깔이 너무 예뻐서 먹기 아까울 정도다. 게다가 그 맛은 황홀 +무아지경이다. 커피를 리필하고 케이크를 더 사 먹고 나서야 충만감을 느낄 수 있었다.
우연히 발견한 장인의 케이크로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다시 골목을 걸어 다니다가 풍성한 그늘에 바람도 시원한 성 스테판 성당 광장에 철퍼덕 주저앉았다. 다리도 쉴 겸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데 어떤 아저씨가 오더니 말했다. ‘여긴 성당 광장이다. 식사는 저쪽에 훌륭한 레스토랑이 많으니 그곳을 이용해라.’ 우린 노숙자들처럼 먹다만 샌드위치를 부랴부랴 챙겨 들고 투덜투덜 자리를 떠야 했다. 그늘진 계단을 찾아 과일까지 먹은 후 다시 그곳으로 가서 앉았다. 페리를 탈 시각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음이다. 광장엔 사람들로 그득하다. 설렘과 들뜸으로 이제 막 섬에 도착한 사람들과 충만한 행복감과 아쉬움으로 섬을 떠나는 사람들, 그리고 액티비티 하게 섬을 즐기는 사람들이 다양한 컬러와 다른 디자인의 옷을 입고 삼삼오오, 또는 하나 둘 오고 갔다. 그들 중에 행복해 보이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를 포함하여…
사람들 속에 섞여 줄 지어 페리를 기다리는데 어디선가 아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앙증맞은 원피스를 입은 서너 살쯤 되는 여자 아이가 마미를 부르며 울면서 우리 쪽을 향해 걸어오는 것이다. 아마도 엄마를 놓쳤음이다. 작은 인형을 끌어안은 아이는 뜨거운 태양 아래 땀을 흘리며 당황하고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사람들이 도와주려고 아이를 따라가며 이름을 묻거나 손을 잡으려 했지만 아이는 막무가내로 뿌리치며 울기만 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몰려있는 선착장까지 왔다가는 다시 되돌아가며 계속 울면서 엄마를 찾았다. 아이를 본 사람들 모두 안타까움과 걱정으로 어쩔 줄 몰라했다. 배에 오른 후에도 아이는 엄마와 만났을까? 큰 섬이 아니니까 찾았을 거야~ 궁금해하다가 나도 모르게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과연 우리의 자동차는 아무 일 없이 잘 있을까? 가족을 잃은 아이처럼 24시간 방치되었던 자동차가 궁금했다. 부지런히 걸어가니 어제 그 자리에 얌전히 앉아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우려했던 그 어떤 스티커도 붙어있지 않았다. 고마워 우리 차…, 고마워 스플리트!
하늘이 가깝게 느껴졌다. 헐벗은 산엔 돌 무더기들이 무덤처럼 흩뿌려져 있고 눈물 하나 돋아날 것 같지 않은 황량함만 황야의 무법자처럼 쏘다녔다. 노을만 살아남을 것 같은 돌산이 끝없이 이어졌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전의 상황을 세세히 알진 못하지만 왠지 한쪽 가슴이 벌써 싸~하다. 두브로브니크로 내려가면서 일정에 넣은 모스타르는 도시의 이름 조차도 '오래된 다리'라는 뜻이다. 그곳엔 올드 브리지 ‘스타리 모스트’가 있다. 네테르 바 강을 가로지르는 돌다리로 16세기 오스만 제국 시대 때 건설되었으나 1993년, 유고슬라비아를 집어삼켰던 광포한 내전의 물결 속에서 크로아티아 포병대에 의해 파괴되었었다. 유네스코의 후원을 받은 재건축 프로젝트가 진행되어 2004년 다시 개통되었다. 발칸반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로 꼽히며 이슬람 예술의 본보기이기도 하다. 다리의 오른쪽은 가톨릭이 왼쪽은 이슬람교도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지도에선 가느다란 선에 불과하지만 엄연한 국경이다. 오가는 사람이 뜸해서 무료한 듯한 표정의, 그러나 무뚝뚝하고 사무적인 심사원이 우리의 여권을 받아 든다. 누군가 피를 쏟았고 그의 누군가는 눈물로 지켜낸 땅의 경계를 여권에 도장 하나 쾅 찍으면 출국이고 10여 미터 더 가서 또 다른 나라의 스탬프가 찍어지면 입국이다. 차에서 내릴 필요도 없다. 그저 미소 한 움큼 머금고 ‘We're 5 members!’ 하면 끝이다. ‘왜 왔냐? 어디서 잘 거냐? 며칠 동안 있을 거냐?’ 등을 묻는 공항의 출입국 관리소와는 사뭇 다르다.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열쇠 구멍 같은 여권에 화인 같은 도장이 새로 찍혔다. 우리는 슬픈 국경을 그렇게 쉽게 넘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내비게이션 화면상에 우리가 공중을 날고 있다. 아직 업그레이드가 되지 않은 새 길인가 보았다. 자동차를 배에 싣고 섬으로 가자면 자동차가 바다를 건너고 있음을 가리키듯 우리는 하늘 길을 달리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시점에 도로가 나타났지만 이정표와는 달리 다른 방향으로 안내했다. 허름한 농가 주택의 아주머니께 물었다. 영어가 전혀 되지 않지만 모스타르라는 지명을 알아듣고 손짓으로 방향을 가르쳐주었다. 길가엔 우리네 국도변처럼 과일을 파는 노점상들이 많았다. 과일이 먹고 싶었지만 우리에겐 보스니아의 화폐인 마르카가 없어서 사지 못했다. 시가지라고도 할 것도 없이 휑한 도심에는 만들어진지 얼마 안 되는 커다란 공동묘지들이 꽤 여러 군데 있었다. 내전이 남긴 상처 이리라. 고사리 같은 손을 내밀어 구걸하는 소녀의 눈에는 그 나이가 가져야 할 순진한 웃음소리가 어디에도 들어있을 것 같지 않았다. 갓 스물이나 되었을까 싶은 소녀가 숙소 근처 길가에 앉아 있다가 우리가 차를 세우는 걸 발견하고는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네가 시마니?’ 하고 물으니 그렇단다. 놀랍게도 그녀는 우리의 호스트였다. 반갑다는 인사를 나누자마자 그녀는 5분만 기다려 달라고 하더니 어디론가 급히 전화를 했다. 집 앞에 주차장이 있지만 우리 차가 너무 크기 때문에 주차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부탁하려는 뜻이다. 짐을 내리는 동안 어디선가 한 남자가 급히 오더니 그의 차를 옮겨서 우리가 주차할 수 있도록 양보해주었다. 말하지 않아도 순박한 친절함이 그대로 느껴졌다. 건물 외벽엔 총탄 자국이 가득했고 창문이 통째로 날아가 마치 로마 콜로세움처럼 뼈대만 앙상한 건물도 눈에 띄었다.
복층 구조인 집은 꽤 깔끔했다. 거실엔 에어컨이 있고 폭파되기 전의 스타리 모스트를 그린 유화와 재건 후의 모스트를 그린 두 장의 그림이 슬프게 걸려 있었다. 냉장고엔 웰컴 과자가 들어있었는데 우리나라 호박엿 같은 젤리였다. 이번 여행을 하는 동안 가장 저렴한 흐바르의 숙소는 1박에 8만 원, 2층엔 더블 침대가 놓인 침실 두 개와 욕실, 아래층 거실에 싱글베드와 안락의자 세트, 그리고 주방까지 갖추어진 엄연한 독채다. 이렇게 싸도 되는 거야? 전쟁의 후유증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그들의 선량하고 슬픈 눈동자 앞에서 그만 마음이 노그라졌다.
모스타르의 올드타운은 숙소에서 200m 남짓한 곳에 있었다. 다른 유럽의 길바닥과 달리 마치 조개껍질을 박아놓은 듯 조약돌이 무늬를 만들며 촘촘히 박혀 있은 형태였다. 거리 양쪽을 가득 메운 상가들이 마치 터키나 인도의 이슬람 거리에 온 듯한 착각에 빠지게 했다. 유고 연방으로부터 독립하는 과정에서 가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 사람들이 이슬람을 믿는 보스니아들을 몰아내기 위한 보스니아 내전이 남긴 끔찍한 상흔들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스타리 모스트가 보였다. 막 석양이 넘어가고 불빛이 그 존재를 드러내려 하는 시점에 스타리 모스트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 여행자들이 넘쳐났다. 물론 재건한 것이라 올드한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지만 하나의 돌로 만들어진 다리의 모양이 독특하고도 아름다웠다. 흔히 야경이라 하면 오색 창연 하게 화려한 불빛을 연상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스타리 모스트의 야경은 마치 옛날 영화 속의 가스등처럼, 어릴 때 시골 외할머니 집에서 보았던 호롱불처럼 주변을 은은하게 비추고 있었다.
<open for visitors - best view at the old bridge>
표지판을 보고 작은 문으로 들어가니 정면에 마치 지붕 달린 우물 같은 게 있고 그 왼쪽엔 이슬람 사원 모스크가 있다. 오른쪽엔 기념품과 스카프 등을 파는 상점이 보였다. 우물처럼 생긴 것은 아래쪽에 수도꼭지가 여럿 달려있는 것으로 보아 모스크에 들어가기 전에 발을 씻는 장소인 듯했다. 그때 한 노인이 손짓하는 곳으로 다가갔다. 문 닫을 시간이 다 되었으니 티켓은 사지 말고 얼른 들어가서 사진을 찍고 나오라는 것이다. 사람이 나오면 자기가 곤란하다면서 서두르라고 한다. 그가 안내한 곳은 스타리 모스트가 막힘없이 보이는 베스트 뷰포인트였다.
젊은 남녀 대 여섯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그들 중 한 명에게 우리 다섯의 사진을 부탁하니 자기들도 찍어달라고 했다. 기분 좋은 미소로 서로 사진을 찍어주었다. 갑자기 한 아가씨가 ‘안녕하세요?’라고 또렷한 한국말로 인사를 했다. 우리 모두 깜짝 놀라 한국말을 어떻게 아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에스토니아에서 여행을 온 대학생인데 한국 문화에 관심이 많아서 조금 배웠다고 했다. 나는 에스토니아의 탈린에 2번 갔었는데 참 아름다운 도시였다고 말했다. 그녀는 ‘반가워요, 즐거운 여행하세요’라고 말하곤 그곳을 떠났다. 왁자지껄 아름다운 다리의 야경에 취해 떠들고 있는데 우리를 안내했던 아저씨가 그만 나오라는 손짓을 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그곳을 떠나 다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다리의 중앙까지는 오르막이고 그 이후는 다시 내리막 형태의 계단식이다. 1088개의 하얀색 돌로 마감된 단일 아치형 다리는 계단 참 끝을 약간 막음 형태로 미끄러짐을 방지시켜 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곱돌처럼 바닥이 미끄러워서 난간을 잡고서야 겨우 건널 수 있었다. 다리 아래로 흐르는 네테르 바 강 주변 절벽엔 카페와 레스토랑들을 밝힌 불빛이 아름다웠다. 이슬람식 전등, 카펫이나 파시미나, 동판과 주석을 두드려 만든 장식품, 앤티크 한 물건들 사이엔 전쟁 때 군인들이 사용했던 집기들도 많이 팔고 있었다. 특히 탄피로 만든 볼펜이 이채로웠고 상품의 질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찌감치 올드 타운을 다시 찾아갔다. 93년 11월, 모스트 다리는 크로아티아의 포격으로 붕괴되었다. 그를 상기시키는 글씨가 돌에 새겨있었다.
“Don't forget 93”
아직 상점들은 문을 열지 않았고 여행자로 보이는 사람은 우리 외에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어제 밤, 스타리 모스트의 베스트 뷰의 장소인 모스크로 다시 들어갔다. 지난밤, 우리를 티켓 없이 안내했던 아저씨가 우리를 알아보고 또다시 손짓을 한다. 이번엔 아직 문을 안 열었으니 살짝 들어가라고 한다. 얼마나 고마운지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다. 각자 포즈를 취하며 스타리 모스트를 배경으로 독사진을 찍고 한참 후에 그곳을 빠져나와서 알았다. 그곳은 코스키 메흐메드 파샤 모스크로, 첨탑에 올라가 주위 경관을 조망하는 입장료가 8유로다. 물가가 무척 싼 보스니아임을 감안할 때 무척 비싼 금액이다. 알고 보니 우리를 안내했던 남자는 맞은편 상가의 주인이었다. 자기는 그곳에 8개의 상점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이것은 오리지널 루이뷔통과 펜디다. 들어와서 구경해라, 질 좋은 파시미나가 여기 많다, 하며 우리를 기꺼이 상점으로 들어서게 했다. 그가 우리에게 베풀었던 친절이 장사 소관이었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그가 말한 오리지널이라는 제품은 우리나라로 치면 아주 하급에 해당하는 품질이었다. 그러나 에트로 풍의 페이즐리 무늬가 프린트된 겨울 파시미나는 저렴한 가격에 비해 품질이나 색상이 좋아 보였고 J와 T가 2개씩 구입했다. 우리는 스카프를 히잡처럼 머리에 두르고는 여고생처럼 깔깔대며 사진을 찍었다. 그중 베스트 오브 베스트 컷은 T가 획득, 모스타르의 여신으로 등극하기에 이르렀다.
밤과 달리 한적한 올드 타운의 거리 끝 즈음에 이르니 ‘언니들 이뻐요, 이거 싸요, 이뻐요’ 하는 유창한 한국말이 들렸다. 린넨과 코튼으로 만들어진 테이블보며 테이블 매트, 러너 등을 팔고 있는 총각들이 서글서글한 미소로 우리를 불러 세웠다.
예쁘다는 말에 현혹될 우리가 아니다, 한국말을 잘 한다고 관심을 보인 것도 아니다. 레이스 제품들의 가격이 물건의 질에 비해 싸고 예뻤다. 아니 인정할 게 있다. 두 총각은 각각 18세, 20세의 형제라는데 장사 수완이 보통이 아니다. 그런데 그들 행동이 밉상이 아니다. 예기치 않게 흥정을 하고 모두들 한 개씩의 테이블보와 러너를 구입했다. 함께 사진을 찍은 후 이 메일 주소를 받아왔다. 한 바탕 유쾌한 시간을 보내고 네테르 바 강변 카페에서 보스니아식 커피를 마셨다. 구리와 주석으로 만들어 약간 붉은 빛깔의 앙증맞은 포트와 에스프레소 잔 크기의 찻잔이 1인용씩 작은 쟁반에 담겨 나왔다. 커피를 잔에 따르고 커피 가루가 가라앉으면 윗물을 따라 각설탕을 넣어 마시는데 약간 홍삼차 비슷한 맛이다. 호기심 많은 M과 T가 강변 모래톱으로 내려가 우리를 향해 하트를 그린다. 나는 카메라 줌을 한껏 당겼다.
시마는 약속한 대로 12시에 찾아왔다. 한쪽 머리에 커다란 꽃핀을 꽂은 모습이 너무 예뻤다. 열쇠를 건네고 악수를 나누는데 괜히 맘이 짠하며 섭섭했다. 딸쯤 되는 나이지만 여동생 같았다. 잘 지냈다고, 아름다운 곳이라고, 고맙다는 말을 끝으로 차에 올랐다.
두브로브니크까지는 140km, 2시간 30분 예정이다. 렌터카를 반납할 시각이 4시니까 시간적인 여유가 충분하리라 생각했다. 시가지를 벗어나 국도를 얼마간 달렸는데 갑자기 차량들이 정체되어 있다. 도무지 꼼짝을 하지 않는다. 궁금함에 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도로에 가득하다. 무슨 일인지 차를 돌리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가고 차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맞은편 도로에선 드문드문 자동차가 지나갔다. 우리나라도 상습 정체 지역엔 뻥튀기나 물을 파는 장사가 호황을 누리듯 그 지역에도 과일을 파는 노점상의 손놀림이 바쁘게 돌아가고 가판대의 과일은 점점 빈자리가 늘어갔다. 우리는 정체 구역에 들어서기 전에 이미 노점에서 청포도며 복숭아, 사과를 샀던 터였다. 그렇게 한 시간 넘게 지정체가 이어지고 드디어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차량 수가 늘어나면서 하나뿐인 출입국 관리소의 업무가 더뎌진 탓이었다. 간신히 그곳을 벗어나 조금 달리다 보니 해안도로가 나타났다. 그런데 도로가 거의 말티 고개 수준이라 속도를 낼 수가 없다. 다행인 건 오른쪽으로 펼쳐진 아드리아 해의 풍광이 그림처럼 아름답다는 거다. 아드리아 해를 껴안고 달리는 달마티안의 해안도로엔 바위를 던져 섬이 된 듯 아름다웠다. 바다가 파란 스카프처럼 출렁인다. 원색의 잉크를 그대로 쏟아부은 듯 푸르기가 그지없다. 강원도의 해안 도로처럼 밋밋하지 않다. 넓은 백사장이 아니니 파도도 없고 너울거리지도 않는다. 둘째 손가락과 셋째 손가락 사이처럼 해안의 굴곡이 심하고 도로도 그만큼 구불거린다. 운전을 하면서 간간히 바라보는 경치는 가히 절경이다. 도로변엔 앞마당처럼 작은 해변을 찾은 사람들의 차가 즐비했다. 낙산, 하조대, 경포대… 식으로 늘어선 해수욕장이 아기자기하다.
다리를 건너니 두브로브니크다. 그러나 차를 반납해야 하는 4시가 이미 지났다. 원래 내가 예정한 시각은 5시였는데 4시까지 반납하면 하루치 렌트 비용을 줄일 수 있다고 하여 1시간 일찍 도착하기로 바꾼 터였다. 그러나 어쩌랴, 최대한 빨리 반납하고 사정 이야기를 해 볼 방법밖에 없다. 다리를 건너니 성벽이 보였다. 성벽을 따라 일방통행 도로를 얼마간 가서 주소지에 이르렀다. 좁은 도로라 아쉬운 대로 임시로 대각선 주차를 하고 건물 계단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그곳은 한 층에 두세 집이 함께 거주하는 형태인데 호수도, 이름도 쓰여 있지 않았다. 이집 저 집 기웃거리다가 급한 마음에 다짜고짜 어떤 집의 초인종을 눌렀다. 웃옷을 벗어재낀 할아버지가 문을 연다. ‘리디아 집을 찾고 있는데 아세요?’ 모른다고 했다. 그녀에게 전화를 부탁하니 무전기 수준의 커다란 무선 전화기를 들고 왔다.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3층 끝집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누구나 친절한 크로 사람들~~
가느다란 끈이 달린 먹색 티셔츠에 반바지, 숏 컷의 헤어스타일이 무척 잘 어울리는 리디아는 지성미가 물씬 풍기는 외모였다. 그녀가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거실 벽면 가득 유화가 걸려있는 아파트는 한 눈에 클래식함이 묻어났다. 그러나 세세히 둘러볼 겨를이 없다. 리디아는 모두의 여권을 달라며 집에 대해 설명을 시작하였다. 나는 급히 렌터카를 반납하러 가야 하니 친구들에게 얘기하라는 부탁을 하고 러기지를 옮길 틈도 없이 허겁지겁 차에 올랐다. 렌터카 사무실까지는 6.7km, M과 내가 숨 돌릴 틈도 없이 찾아간 사무실은 문이 잠겨있다. 옆의 마트 직원에게 물어보니 출근을 했는데 잠시 자리를 비운 것 같다고 했다. 그 순간 주유를 하지 않고 온 것이 생각났다. 차를 받을 때 가득 채워져 있었고 반납할 때도 가득 채워야 한다는 말을 들었던 터였다. 한 아가씨에게 주유소의 위치를 물어보니 시가지로 나가야 한다고 했다. 주유소 찾아 삼만 리가 시작되었다. 일방통행 길을 요리조리 뱅글뱅글 돌다가 하마터면 스플리트 가는 길로 들어설 뻔했다. 부두에서 낚시를 하는 남자에게 물으니 독일에서 와서 모른다고 한다. 그 옆에 노숙자 같은 아주머니에게 재차 물어보니 손짓으로 설명을 했다. 그녀가 설명하는 쪽으로 갔으나 역시 찾을 수가 없다. 택시들이 줄 지어 서 있는 도로를 지나게 되었다. 택시 기사들은 잘 알 거라는 확신에 물어보니 직진하여 어떤 건물을 돌면 작은 주유소가 있다는 거다. 그렇게 어렵사리 찾은 주유소는 무척 작았다. 우리나라의 SK나 오일 뱅크처럼 거대한 주유소를 연상한 게 잘못이다. 우리가 타고 다닌 자동차는 연비가 무척 좋았다. 총 1500 Km를 타는 동안 고속도로 주유소에서 딱 한 번 주유했는데 아직도 오일 게이지는 중간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주유를 하고 다시 렌터카 사무실로 돌아갔으나 여전히 문은 굳게 잠겨 있다. 배고 고프고 목도 마르고, 땀이 나서 꼬질꼬질한 얼굴을 서로 마주 보고 폭소를 터트렸다. 무엇보다 기운이 없었다. M이 사 온 생수와 버터 스틱 과자로 허기를 면할 수 있었다. 벌써 7시가 넘었다. 무작정 기다릴 순 없었다. 자동차에 앉아 사무실 쪽을 바라보니 상가 건물에 다른 렌터카 사무실이 보였다. 그곳에 가면 혹시 그 사람들 전화번호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60대로 보이는 퉁퉁한 아저씨 둘이 사무실을 지키고 있다. 한 사람은 카키색 폴로 티셔츠에 베이지 면바지를, 또 한 사람은 흰색 셔츠를 걸쳤는데 제법 중후한 멋을 풍겼다. ‘유니 렌터카에 차를 반납하러 왔는데 사람이 없네요. 혹시 그와 연락할 수 있으세요?’ 그가 놀라운 대답을 전했다. ‘그 사람들은 일요일에 출근하지 않는다. 그러니 오늘은 기다려도 소용이 없다.’ 친구와 나는 놀라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두 사람이 뭔가 대화를 나누다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화를 내듯 누군가와 통화를 하다가 수화기를 건네주었다. 렌터카 직원이었다. 디포짓은 내일 처리할 테니 자동차 키를 자기네 사무실 밖에 걸린 우편함에 넣어두고 가라는 거다. 그는 아무 문제없다는 듯 걱정 마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알았다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러자 두 노인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자기네는 30년 동안 렌터카 회사를 운영했는데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 그 젊은이들은 툭하면 문을 닫아서 그쪽 손님들이 자기네 사무실에 찾아오게 만든다. 그들은 프로페셔널한 정신이 없다는 거다. 그러면서 자동차 키는 넣어두되 자동차 등록증과 우리가 사인한 서류는 가지고 갔다가 내일 아침에 다시 와서 정산하고 말끔히 처리하라고 일렀다. 듣고 보니 그게 옳다 싶었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다음에 다시 크로아티아에 오게 된다면 당신의 렌터카를 이용하겠다고 하니 그럴 필요 없다고 말했다. 연륜이 쌓인 할아버지들의 조언을 따라 자동차 등록증과 서류를 차에서 꺼내왔다. 여행을 떠나기 전 두브로브니크 호스트에게 숙소로 돌아가는 방법을 물어봤던 대로 4번 버스를 타고 올드 타운까지 간 다음 택시를 타고 돌아갔다. 피곤함이 밀물처럼 엄습했다. 집에서 기다릴 친구들에게 문자는 보내 놓았지만 생각보다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다. 친구들은 저녁 준비를 해놓고 우리가 오기를 눈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킹사이즈의 침대가 있는 침실이 두 개, 에어컨이 있는 실내는 시원했고 마당만큼 넓은 발코니에서 아드리아 해가 훤히 내려다 보였다. 식사를 마쳤지만 도저히 밖으로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무 사고 없이 무사히 자동차를 잘 타고 다녔고 반납했으니 이제 이틀간 두브로브니크를 즐길 일만 남은 것이다.
렌터카 회사 직원에게 전화가 왔다. 자동차 등록증 얘기다. 아침 8시 반에 사무실까지 가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므로 다음 날 아침 일찍 성벽 투어를 하기로 한 우리의 일정을 변경해야 했다. 나와 M이 렌터카 사무실에 들러서 일을 보는 동안 다른 친구들은 마트에서 장을 좀 봐 놓고 렉터 궁전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날은 플라차 대로와 성내를 돌아보고 성벽 투어는 그 다음날 하기로 정했다. 야경은 다음 날 볼 수 있으니 그날은 그렇게 숙소에서 쉬는 것으로 일정을 마무리했다.
숙소 앞뿐 아니라 성벽을 빙빙 돌아가며 도로는 모두 일방통행이다. 택시를 쉽게 탈 수 있을까? 하는 염려를 했는데 운 좋게 바로 택시를 탈 수 있었다. 고마운 일이다. 기사는 어디서 왔니, 언제 떠나니? 등의 상투적인 질문을 했다. 그리고 이례적으로 습도가 높고 고온현상이 지속되어 매우 덥다고 했다. 그날 저녁 스르지 산 정상에서 일몰을 보기로 한 터라 케이블카를 타려면 어떻게 가야 하느냐고 물으니 그는 대뜸 케이블 카 대신 자기 택시를 이용할 것을 권했다. 50(약 65,000원) 유로에 스르지 산까지 왕복으로 태워주고 베스트 뷰포인트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몇 번 정차도 해 준다는 거다. 1인당 100쿠나로 다섯이면 500쿠나(약 100,000)인 케이블 카 보다 저렴하고 시간도 절약될 터였다. 우리 일행이 다섯 명인데 가능하냐고 물으니 우리만 괜찮으면 자긴 상관없다고 한다. 우리는 그와 저녁 7시 반에 숙소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친구들과 상의해보고 의견이 맞지 않으면 전화해주겠다고 말이다. 그는 그렇게 하라며 명함을 건넸다. 아침부터 뭔가 일이 술술 잘 풀리는 기분이 들었다.
렌터카 사무실에 도착하니 8시 20분, 아직 문이 잠겨있는 상황이다. 30분이 되니 승용차 한 대가 도착하고 젊은 남자가 허겁지겁 다가와 미안하다고 했다. 우리는 어제 2시간을 기다렸다. 그러므로 소중한 여행 시간을 허비했다고 하자 그가 말했다. 일요일엔 사무실을 닫는다고 자그레브에서 알려주지 않았느냐고…. 우리는 절대 그런 소리를 듣지 못했다. 오직 4시까지 차를 반납하라는 이야기만 들었다고 하니 거듭 미안하다고 한다. 차량이 훼손된 곳이 없는지 점검을 하고 온 남자는 아무 문제없다면서 디포짓을 환불해주었다. 다행히 우리가 약속한 시간을 지키지 못해 하루치 비용을 더 내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모든 일처리를 끝낸 후 그는 우리에게 어디로 갈 거냐고 물었다. 올드타운으로 갈 거라고 하니 자기가 태워다 준단다. 그러므로 우리는 친구들과 약속한 시간보다 일찍 궁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필레 게이트를 지난다. 세월의 문이지 싶다. 이탈리아 건축가 오노프리오가 설계해서 1438년에 만들어진 오노프리오 샘이 보였다. 16개의 각기 다른 얼굴이 조각된 구멍에 생수병을 대고 물을 받는 여행자가 보였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 성 안은 한산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플라차 대로는 길지 않았고 루자 광장이나 렉터 궁전, 두브로브니크 성당 등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평화로운 시간이다.
로마의 그림자가 있는 도시, 베네치아의 향기가 나는 도시, 짧은 동안 시간이 멈추었고, 그 순간 우리는 풍경의 하나가 되었다. 햇살을 쪼개며 불어오는 게 바람이라기보다 태양의 가루가 뿌려지는 듯했다. 색이 다르고 크기가 다르고 질감과 두께가 모두 다른 돌길이 내 고향처럼 푸근했다. 잘 마른풀 냄새처럼 달큼한 공기가 느껴진 듯도 하다. 시간을 거슬러 오르듯 계단을 올랐다. 군데군데 구멍이 나고 떨어져 나간 돌덩어리가 세월을 맞이하고 보내며 둥글어져 있었다. 조금 열린 창문이 있으면 목을 빼고 들여다보고 싶은 곳, 낡은 빨래가 잘 구워진 쿠키 같은 벽을 배경으로 널려있음이 괜스레 마음이 따뜻해지는 곳, 낡고 닳아진 돌담 사이 좁은 골목길엔 심심풀이처럼 사람들이 오가는 곳, 태양을 비타민처럼 머금은 꽃들이 박수소리처럼 피어있고 오래된 나무 간판들이 걸려있는 곳, 두브로브니크는 그렇게 따뜻한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두브로브니크 총독의 거처이자 집무실이었으며 감옥으로도 사용되던 렉터 궁전 앞에 친구들이 나란히 앉아있었다. 옛 장터였다는 투자 광장 오른쪽엔 성 블라시오 교회가 있고 그 맞은편엔 스폰자 궁전이 있다. 공연을 준비하는지 가설무대를 설치하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루자 광장의 시계탑은 플라차 대로의 시작이며 끝이라고 할 수 있는 지점에 서 있다. 종탑 꼭대기엔 청동으로 만든 종이 있는데 마로와 바로라는 캐릭터가 종을 친다. 시계탑 아래쪽에 오노프리오 작은 샘이 있다. 필레 게이트 옆 오노프리오 샘의 동생 격이다.
어느 도시나 구 시가지엔 장터가 있다. 군돌리체바 광장에 들어선 장에는 다른 곳에선 못 보았던 게 있다. 잘게 썰어 설탕에 재워 말린 과일이다. 달달한 게 제법 감칠맛이 났다. 군돌리체바 광장 너머로 바로크 양식의 계단이 보인다. 로마에 있는 스페인 계단과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같은 건축가가 설계한 계단이다. 계단을 오르니 흙바닥이 드러나면서 성 이그나티우스 교회가 나타났다. 비둘기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광장을 날고 있었다. 꾸미지 않은 담백한 바로크 양식의 자연스러움과 잘 어울리는 광경이다. 광장 한쪽에 부자 카페로 가는 길을 알리는 간판이 보였다. 부자는 구멍이라는 뜻으로 아드리아 해를 들여다볼 수 있는 절벽 카페로 유명하다.
플라차 대로를 거쳐 필레 게이트 옆쪽으로 연한 베이지색의 장미 창을 가진 아담한 성 그리스도 교회가 있다. 저녁 9시부터 열리는 음악회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슈베르트며 슈만 등 익숙한 곡들이다. 교회 내부를 들여다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작고 아담하다. 1667년 두브로브니크를 황폐화시켰던 대지진 때에도 하나도 손상되지 않아 르네상스 양식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건축이란다. 음악회 30분 전부터 문 앞에서 티켓을 살 수 있다고 한다. 스르지 산에 올라갔다 내려와서 시간이 되면 감상하기로 했다.
성 그리스도 교회 바로 옆으로 길게 이어지는 쪽에 프란체스코 수도원이 있다. 내부로 들어서면 왼쪽에 유럽에서 3번째로 오래된 약국이 있다. 과거에는 수도사들이 전염병을 퇴치하는 의사 역할도 겸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1317년에 문을 연 약국은 지금도 영업을 하고 있는데 약초를 이용하여 전통 방법으로 제조한 화장품과 연고 등을 판매한다. 프란체스코 수도원의 반대쪽에 오렌지 나무가 있었다. 오렌지 향기가 날리던 스페인 세비야의 가로수들이 생각났다. 그 오렌지 나무 사이로 독특한 수염을 한 스페인 출신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 얼굴이 보였다. 그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중이다. 친구들 모두 그림을 좋아하는 터라 티켓을 구입하여 미술관으로 들어갔다. 플라차 대로에는 사람이 바글바글하지만 전시장 안은 한가롭다. 비발디와 바흐의 현악 앙상블이 미술관 바닥을 낮고 둥글게 날고 있었다. 입술 모양의 빨간 달리 의자에 앉아 사진을 찍었다.
플라차 대로의 대리석 바닥은 닳고 닳아 햇살 아래 반질반질 빛이 난다. 대로 양쪽으로는 고색창연한 건물들이 늘어서 있고 그 사이로 무수한 샛길이 가지를 치고 있다. 여러 갈래로 갈라진 골목들을 누비는 재미가 쏠쏠하다. 전쟁 사진이 걸려있는 벽과 마주쳤다. 사진기자 웨이드 고다드가 크로아티아 내전 때 찍은 사진을 전시하는 전쟁 사진 갤러리였다. 종전된 지 20년밖에 되지 않는 크로아티아의 아픈 상처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세르비아 군이 퍼부어댄 2천 발의 포탄에 폐허가 되다시피 한 두브로브니크를 짧은 시간에 이만큼이나마 복구한 게 정말 고맙고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섯 명의 버스커들이 연주를 한다. 더블 베이스 하나, 기타 둘, 클라리넷 하나, 보컬은 여성이다. 악기가 여럿이니 제법 풍부한 화성에 보컬의 음색이 매력적이다. 한참 동안 노래를 듣다가 밀려드는 사람들을 피해 부두 쪽으로 나갔다. 인근 섬으로 가는 보트를 예약하는 간이 오피스들이 즐비하다. 레스토랑에서 초로의 노인 둘이 연주를 한다. 피아노를 치며 노래하는 사람의 저음과 알토 색소폰이 조화롭다. 그네들의 나이테가 아름다워 보여서 한참을 바라보았다. 호스트인 리디아가 적극 추천한 로쿠룸 섬은 아니지만 인근 섬을 돌아보는 보트 투어를 하기로 했다. 시간표와 요금을 알아본 후 숙소로 향했다. 뜨거운 태양을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총무를 맡은 D는 영수증을 챙기며 계산에 몰두, J는 널찍한 발코니에서 10여 년 간 수련해온 태극권을, M은 여행 책을 이리저리 넘기고, T는 먹거리들을 정리하고, 나는 노트북에 사진을 옮겼다. 게으른 오후가 지나고 스르지 산에 오를 시간이다. 아침에 약속한 택시를 타고 산으로 오르는 길은 마치 절벽을 끼고돌듯 가파르고 굴곡이 심했다. 어떻게 이런 길로? 할 정도로 좁고 정비가 되지 않은 길, 아마도 전쟁의 상흔에서 벗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므로 그러리라 짐작했다. 어디 든 시원하게 뻥뻥 뚫린 우리나라의 도로와 비교하면 안 되지 싶었다. 산을 오르며 베스트 뷰포인트에서 두 번 정차, 스르지 산 너머 보이는 땅이 보스니아와의 경계라고 한다. 척박한 돌산에 죽은 나뭇가지 사이로 황량한 바람이 불었다.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한 장면처럼 나무 한 그루가 길 끝에 비스듬히 서 있다. 산 위는 여름 풍경이라고 하기 어려울 정도로 황폐했다. 케이블카가 토해낸 사람들이 한 무더기 씩 늘어났다가 사라지곤 했다. 산 정상의 대형 십자가는 나폴레옹이 1808년 정복 기념으로 세웠는데 원래 나무였으나 화재로 불탄 뒤 재건한 거라고 한다.
충혈된 태양은 오렌지 빛 지붕을 헌신하듯 낱낱이 물들였다. 싱싱한 노을 속에 우리가 익어가고 있었다. 해는 낡은 구름 속으로 점점 가라앉고 내 마음은 해보다 먼저 금빛 바다에 빠졌다. 그렇게 한동안 바다 밑바닥까지 빛의 노래가 이어지고 있었다. 과거와 현재의 경계, 현재와 미래의 경계, 그 경계에 여물지 않은 달이 하늘을 타고 올라가는 게 보였다. 가끔씩 외로움이 장대비처럼 쏟아질 때면 소리가 사라지고 시간이 멈춰버린 그런 기분을 느끼고 싶었다. 기억이 바람에 묻어오지 않아도 내 곁엔 너무 많은 소리들이 보였다. 그럴 때면 바다에 빠지는 해가 부러웠을지도 모른다.
산을 내려오면서 본 두브로브니크의 야경은 촛불로 만든 꽃밭처럼 아름다웠다. 기사에게 필레 게이트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 음악회 티켓을 사고 교회 안으로 들어가니 대여섯 명이 드문드문 앉아있다. 프로그램을 보니 피아노과 더블베이스와 테너의 조합이다. 흔한 구성은 아니다. 성당 안은 무척 더웠다. 100년은 족히 되었을 법한 피아노의 소리가 궁금했다. 따로 무대가 있는 것도 아니요, 제단 쪽에 밖으로 통하는 문도 없으므로 연주자들은 출입문 쪽에서 신랑 신부 입장하듯 들어왔다.
천장과 벽을 두루 돌아 내려오는 테너의 울림이 서늘하다. 아름다웠다. 육중한 덧문까지 닫았으나 플라차 대로의 소음이 성당 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마칭 밴드가 지나가는지 사람들의 환호와 드럼 소리가 제법 크게 들려서 음악의 집중도를 떨어지게 했다. 교회를 나와 플라차 대로를 걸어가는데 노랫소리가 들렸다. 아침에 설치하던 가설무대에서 공연이 벌어지고 있었다. 두브로브니크 축제기간이다. 문을 열면 발코니, 발코니에 서면 낡은 주황색 지붕 뒤로 색, 빛, 소리, 바람이 이글이글 끓고 있는 도시, 지는 해를 업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별들이 태어나는 순간과 마주치기도 했던 두브로브니크의 두 번째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다음 날 저녁, 국내선을 타고 자그레브로 갈 예정이다. 러기지는 리디아의 주차장에 맡기고 아침 일찍 성벽 투어를 하기로 했다. 오후엔 보트를 타고 섬을 돌아본 후 공항까지는 리디아가 소개한 밴을 타기로 했다. 전날 미리 성벽 티켓을 구입했기에 플로체 문을 1등으로 입장할 수 있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걸작으로 꼽히는 두브로브니크 요새는 길이 2㎞, 높이 25m에 달하는 거대한 돌 벽으로 구시가지 전체를 빈틈없이 감싸고 있다. 벽은 바다 쪽이 1.5~3m인 것에 비해 내륙 쪽은 6m로 훨씬 두껍다고 한다.
물새가 수평선을 끌고 왔다. 수평선 너머에 새 살이 돋는다. 성벽을 걷는 일은 지나간 시간을 걷는 것, 잘 익은 감을 문질러댄 듯 지붕 가득 붉다. 반짝임으로 푸름이 상쇄된 바다, 절벽에 바다를 파는 부자 카페가 보였다. 돌의 노래, 바다의 노래, 해의 노래, 푸름의 노래가 그 속에서 자라고 있다. 그 무수한 푸름의 향연, 세상 모두의 푸름을 끌어다 놓은 곳, 푸름이 번지는 곳, 이름보다 예쁜 바다, 아드리아가 거기 있었다. 2시간쯤 걸린다는 성벽을 한 시간 만에 돌고 내려와 루자 광장 카페에서 브런치에 커피를 마셨다.
글라스 보트는 배의 바닥 일부가 유리로 되어있어서 바다 속을 볼 수 있다. 배의 정원은 12명이지만 우리를 포함해서 7명이 승선했다. 보트를 모는 남자가 열심히 섬 주변을 설명했다. 개인 비치가 있는 호텔과 누드로 바다를 즐긴다는 로쿠룸 섬 까지 보트를 타는 한 시간이 꿈처럼 지나갔다.
계획한 일정이 모두 끝났다. 공항으로 출발하기까지 4시간쯤 남아 있었다. 그 시간을 각자의 몫으로 보내면 어떨까 제안하니 모두들 흔쾌히 좋다고 했다. 3시간 후 루자 광장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M이 제일 먼저 일어섰고, 5분 후쯤 내가 자리를 떠났다.
되새김질하듯 골목을 걸었다. 햇살이라는 천연 조명을 받으며 거칠고 울퉁불퉁한 돌담에 턱~ 하고 걸린 유화 몇 점으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아틀리에가 되는 곳, 나무에 매달린 파란 청포도와 하모니처럼 펄럭이는 흰 빨래들, 지팡이를 짚은 노인들의 들리지 않는 뽀얀 미소, 삐뚤어진 가르마 같이 낡은 골목길의 아름다움, 바다가 밀어낼 때마다 칭얼대듯 자그락대는 몽돌의 노랫소리, 흰 옷에 놓아진 수처럼 세월을 곱게 뜨개질하는 할머니, 늙어도 늙지 않는 돌의 아름다움을 다시 새기며 홀로 들어간 성당에서 초를 밝혔다. 앵무새랑 노는 아이들 사진을 찍고 아이스크림 동동 들어있지 않은 아이스커피를 마시니 어느새 시간은 촐랑촐랑 흘러 친구들과 만나야 할 때가 가까웠다.
색소폰과 피아노가 멋졌던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고 숙소로 향했다. 우리가 렌트했던 차와 똑같은 자동차가 우리를 태우러 왔다. 러기지가 무거웠는지 기사가 말했다. ‘한 1년 묵다 가는 거요?’
첫날과 달리 자그레브 공항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기사는 없었다. 두 대의 택시에 나눠 타고 숙소 근처에서 내렸다. 도심이지만 이미 인적은 뜸하고 상가 대부분은 불이 꺼져있는 상태였다. 주소지의 건물은 찾았으나 1층 상가는 문을 닫았고 현관문은 굳게 잠겨있다. 비행기가 딜레이 되는 바람에 도착하기로 한 시각보다 벌써 1시간이나 늦은 시점이다, 연락을 취해야 하는데 역시 전화가 안 된다. 남자 둘이 우리 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이 남자들에게 부탁을 해볼까?’ 망설이는 동안 그들은 벌써 저만큼 멀어져갔다. 그런데 갑자기 그들이 되돌아와 물었다. ‘도와드릴까요?’ 이심전심이든 텔레파시가 통한 것이든 훤칠한 그 남자들이 갑자기 더 멋져 보였다. 흔쾌히 전화를 해준 도움으로 호스트와 연락이 되었다. 아톰처럼 뽀글뽀글한 헤어스타일에 동그랗게 배가 튀어나온 주인 남자는 아티스트 같은 외모였다. 몇 시에 체크 아웃할 건지, 도와줄 게 없냐고 묻고는 쿨하게 떠났다.
첫날의 자그레브 숙소가 영국 풍이 었다면, 마지막 날의 자그레브는 스웨덴 풍? 마릴린 먼로와 오드리 헵번의 흑백 사진과 함께 모노톤으로 꾸며진 침실 1, 방금 결혼한 신혼부부들처럼 달콤한 핑크로 꾸며진 침실 2. 이케아 쇼룸을 보듯, 잡지 화보에서 뿅 하고 튀어나온 듯, 방과 거실, 주방과 욕실의 컨셉은 각기 개성이 있으면서도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여행 전체 일정을 호텔이 아닌 아파트로 정한 이유는 식비도 절약하며 여행 내내 오롯이 함께 할 수 있는 것 등 장점이 많아서였다. 우리가 지냈던 숙소들 모두 훌륭한 위치와 친절한 호스트들, 편리한 주방 등 만족했기에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다음날이면, 프랑크푸르트를 경유해서 인천으로 향하는 비행기를 탈 것이다. 여행을 마무리하는 밤이다. 항공 예약 코드가 적힌 파일과 스마트 폰을 챙겨서 식탁 앞에 앉았다. 비행기 좌석을 체크해야 한다. 비어있는 앞 열 좌석이 없었다. 차선책으로 친구들 모두 복도 쪽 좌석으로 선택하여 바꿨다. 모든 걸 마무리하고 나니 새벽 3시, 몸은 피곤했지만 숙제를 마무리한 듯 마음이 가벼웠다.
아침을 먹은 후 최종적으로 짐을 챙기고 밖으로 나갔다. 자그레브와 마지막 인사를 나눌 시간이다. 그런데, 바람이 서늘하다. 사람들의 옷차림이 가을 분위기다. 가죽 재킷을 입은 사람도 보인다. 쾌적하다. 그래서 돌아감이 더 아쉬웠다.
자그레브 대성당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성당 옆으로는 오래된 요새와 성벽이 남아있고 광장에는 황금 마리아상이 우뚝 솟아있다. 바람이 불어오는 그 배경에 친구들이 서 있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 초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기도했다.
여행을 떠나기 위해 필요한 건 세상과의 타협이 아니다. 자신과의 타협이다. 내가 가고자 하지 않으면 갈 수 없는 게 여행이다. 여행을 하다 보면 잊었던 나를 종종 찾게 된다. 다 보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남겨두어야 한다. 아쉬워하고 그리워해야 다시 찾아갈 수 있다. 낯섦이 익숙함으로 변할 때쯤 대부분 그곳을 떠나게 된다. 그것이 여행이다. 기억을 되돌릴 수는 있다. 그러나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다. 지금은 과거가 될 거다. 언젠가 그 과거를 들여다볼 수 있는 현재의 밑그림 같은 풍경이 행복하다. 온몸을 파고들던 햇빛과 푸른 물빛의 아드리아, 그 기억의 기억을 그리워할 것이다.
사진, 글 : 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