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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Jun 26. 2024

크로아티아 산골 마을,
빛과 노닐다.

6. 그로즈난(Groznjan)







퇴직한 지 3년째, 여전히 책상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많다.

아침 9시면 커피 한잔과 함께 책상 앞에 앉는다.

인터넷을 뒤적이는 시간이 많지만 간간히 책도 읽고 음악도 듣고 영화도 본다.

여행과 예술, 역사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이다.

혼자만의 여백이 좋다.


이스트리아 반도에 있는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의 작은 마을들은 대부분 베네치아 왕국에 속해 있었다.

그러므로 건물이나 문장 등 마을 분위기를 볼 때 그곳이 이탈리아인지, 크로아티아인지 슬로베니아인지 구분이 어렵다.

음식도 그렇다.

어디서든 이탈리아의 전통 음식인 피자, 파스타를 쉽게 접할 수 있다.

물론 그 지방 고유의 음식을 판매하는 레스토랑도 있지만 말이다.


그로즈난과 모토분은 20~30분 남짓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산골마을이라 하루에 두 곳을 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작다.

물론 길게 머물러도 나무랄 데 없이 훌륭하다.

해발 300m 남짓한 높이지만 구불구불한 길을 올라가야 만날 수 있다.

포도나무와 올리브 나무가 지천인 언덕을 올라 교회 옆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마을로 들어서는 작은 아치 문이 보이고 그 옆에는 마을 안내를 돕는 지도가 있다.

사진을 찍어서 참고해야겠다는 생각에 가방을 열었다.

그런데 스마트폰이 없다.


'누가 나한테 전화 좀 걸어줄래? 폰을 찾을 수가 없어.'

'이상하네, 내가 걸어봤더니 전화기가 꺼져있다고 하는데?'

'꺼져있다고?'


방금 전 주차 머신으로 주차티켓을 뽑을 때 폰 사진을 보고 렌터카의 넘버를 입력했었다.(차를 받은 지 사흘 째지만 차 넘버를 기억하지 못했다. 그게 내 나이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그 후 분실되었다는 것인데 주차장과 입구의 거리는 100m도 안된다.

이 여행은 명실공히 내가 리더이며 가이드며 책임자 역할을 맡고 있다.

스마트폰에는 이번 여행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

만일 분실했다면 이만저만 큰일이 아니다.


주차되어 있는 자동차로 걸어가는 동안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건 물론 나를 기다리는 여행 멤버들도 마찬가지였을 거다.

침착하자며 발걸음을 평소보다 더디게 디뎠다.

두근거렸지만 그 순간 나를 믿고 싶었을 거다. 

별 의심 없이 차 문을 열었다.


운전석에 스마트폰이 얌전히 놓여 있었다.

주차 스티커를 유리창 대시 보드에 올려놓는 동안 폰을 좌석에 놓은 것이다.


'휴~~'


그렇게 한바탕 해프닝은 해피엔딩으로 끝이 났지만 아마도 내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왜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멘트가 나온 건지는 여전히 수수께끼이다.






성벽 담장 위에 옛날 물병들이 도란도란 서 있었다.

초록의 산을 배경으로 또 다른 나무 이파리들과 투명함이 조금씩 다른 유리병들의 어울림이 예쁘다.

그밖에 소소한 골동품들이 늘어놓아져 있는데 아마도 오래전 그 마을 사람들이 사용했던 것이리라 짐작했다.

벼룩시장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소소한 규모였지만 그 마을의 첫인상이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옆에 작은 흉상이 있다.

그가 누군지 짐작된다.

작은 아치 문을 통해 마을로 들어갔다.





알렉산다르 루카비나(Aleksandar Rukavina)




사실 이번 이스트리아에서 제일 궁금했던 그로즈난.

고작 164명 밖에 안 되는 주민들 대부분이 예술가들이란다.

그렇다고 거창한 화가, 음악가, 소설가 등이 아니라 주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뭔가를 그리거나 만든 창작품들로 생계를 꾸려간다는 의미이다.

작은 소품들을 판매하는 곳이 심심찮게 보이지만 여행자들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인상파 화가들은 빛을 좇아 그림을 그렸다.

모네는 특히 같은 자리에서 같은 피사체를 그린 연작이 많다.

시간에 따라 바뀌는 빛이나, 또는 날씨, 계절별로 그림을 그린 것이다.

사진도 마찬가지다.

대상을 포착하는 감각, 그리고 프레임을 어떻게 나눌 것인지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빛의 세기와 흐름이 중요하다.

사진을 배운 적은 없으나 즐겨 찍다 보니 저절로 알게 된 사실이다.

다른 이유도 많지만 5월은 여행하기에 좋은 때다.

해가 길고 비 내리는 날이 적으며 햇살이 비교적 온화하기 때문이다.

그날, 그로즈난에서의 오전은 흥분될 정도로 빛이 좋았다.








좁고 어두운 골목 사이에 있는 오래된 작은 집들, 꽃으로 장식한 자전거, 빈 벽에 툭 걸쳐진 그림자, 햇살 가득 머금은 빨간 제라늄, 파란 나무 창틀, 엽서 크기의 작은 그림들, 선물을 고르는 여행자들, 멋진 레터링 간판이 있는 작은 갤러리들 모두가 카메라 뷰 파인더 안으로 들어왔다.


석회성 건염으로 여러 달 동안 오른쪽 어깨 치료를 받았지만 아직 완쾌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진을 찍는 동안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몰두와 집중은 사람을 행복하게 만든다.

일종의 마취 효과처럼 말이다.

맘에 드는 자연과 사물에게 포커스를 맞추고 있노라면, 카메라의 무게와 어깨 통증은 잊히기 마련이다.

군더더기 없이 심플하고 세련된 감각이 묻어나는 디스플레이들이 마음에 쏙 들었다.

게다가 조용하고 한적한 분위기가 더더욱 좋다.

서두를 필요가 없는데도 마음이 급한 데는 이유가 있다.

구름 때문이다.

신나게 뷰 파인더를 들여다보고 있는데 순식간에 그림자가 사라지면 기운이 빠지곤 하니까 말이다.

















이 마을이 예술 중심지로 탈바꿈한 것은 자그레브 출신의 조각가인 알렉산다르 루카비나(Aleksandar Rukavina)와 그의 동료 예술가들의 노력 덕분에 이루어졌다고 한다.

마을 입구에 있던 흉상이 바로 그 사람이다.


그로즈난은 베네치아 인들이 세운 요새로 1630년에 끔찍한 전염병이 돌자 완전히 황폐해졌고 18세기 베네치아 제국의 붕괴와 함께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후 오스트리아의 일부가 되어 와인, 올리브 오일 등을 생산하면서 다시 일어서보려 애를 썼지만 살기는 어려웠고 마을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1965년, 32세였던 조각가 알렉산다르 루카비나(Aleksandar Rukavina 1934-1985)를 비롯한 소규모 예술가 그룹은 예술적인 마을로 탈바꿈시켜 보자는 생각을 실천에 옮겼다.


당시 이 마을이 예술가를 불러들이는 조건은 이랬다고 한다.

- 건물의 계약은 99년으로 한다.

- 건물의 1층은 무조건 갤러리를 운영해야 한다.

마을에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게 1차 목적이고 어차피 빈 집이 많으니 집세는 당연히 무척 저렴하거나 공짜였을 터다.

그렇게 입소문을 들은 가난한 예술가들이 마을로 찾아들고 공연도 하면서 마을은 점점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그들은 버려진 건물에서 다양한 예술 작업을 이어갔고 버려진 집들은 점차 갤러리, 아틀리에, 작업실, 거주지로 탈바꿈되었다.                  


예술가 마을을 만들기 시작한 조각가 알렉산다르 루카비나는 1985년에 52세로 세상을 떠나고 유고 전쟁(1991-2001)이 시작되었다.

또다시 많은 예술가들이 그 마을을 떠났다.

하지만 일부 예술가들은 꾸준히 남아 있지만 지금도 비수기에는 겨우 30여 명이 거주한다고 한다. 


음악 또한 그로즈난의 예술 커뮤니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69년 크로아티아의 음악 국제 문화 센터가 설립된 후 전 세계에서 20,000명 이상의 젊은 음악가들이 방문하여 매년 여름 약 50회의 음악 공연을 펼치고 있다고 한다.

눈에 띄는 건축물이 있었는데 그것은 1597년에 지어진 타운 로지아로 예술품 전시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타운 로지아



큰 나무들이 어우러진 넓은 테라스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유럽에서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면 미국식을 따르는 우리나라와는 달리 비교적 작은 잔에 커피를 준다.

아메리카노라고 하기엔 물을 섞은 비율이 훨씬 적기 때문에 우리가 평소 즐겨마시는 커피보다 훨씬 진하다.

한 잔으로는 아쉬워 두 잔을 마실 때도 있다.

이번 여행에서는 주로 카푸치노를 마시곤 했다.

맛은 보통 이상이지만 차이가 있다면 커피의 온도이다.

우유와 그 위에 올려진 우유 거품이 얼마나 따끈하냐 아니냐의 차이다.


카푸치노(Cappuccino)는 이탈리아어고 이탈리아 사람들은 대부분 아침에 에스프레소나 카푸치노를 즐겨 마신다.

여행 중에는 커피를 여러 잔 마시기 마련이지만 이탈리아는 그때마다 실망시키지 않았다.









카푸치노는 에스프레소를 베이스로 한 커피로 오스트리아에서 개발했다.

에스프레소에 우유를 붓는 과정까지는 다른 메뉴와 비슷하지만, 그 위에 우유 거품을 두껍게 올리는 것이 카푸치노의 차별점이다. 카페오레, 카페라테와 비교하면 에스프레소와 직접 섞이는 우유의 양은 상대적으로 적은 만큼 커피 본연의 맛을 더 진하게 느낄 수 있고, 부드러운 우유 거품도 한껏 즐길 수 있다.     

이탈리아 국립 에스프레소 연구소에서는 공인된 정통 카푸치노로 다음과 같은 레시피를 제안한다.     

- 준비물: 이탈리아식 에스프레소 1샷, 우유 100ml. 우유는 3.2%의 최소 단백질 함량과 3.5%의 최소 지방을 가져야 한다.     

- 100ml의 차가운 우유(3-5°C)를 약 125ml의 부피와 약 55°C의 온도에 도달할 때까지 스팀완드로 가열한 다음, 150-160ml 용량의 컵에 담긴 공인된 이탈리아식 에스프레소 위에 붓는다.

5온스 카푸치노 잔 기준 1:2:3, 즉 25ml의 에스프레소 + 50ml의 우유층 + 75ml 폼으로 완성하면 잔 속에서 각각의 높이가 비슷해지고 잘 만든 카푸치노라고 한다. (출처 : 나무위키)    







그로즈난에서 모토분까지의 거리는 18km,

그러나 구불구불 산길을 내려가 또 꼬불꼬불 산길을 오르려면 40분쯤 걸리리라 예상했다.

화이트 트러플 생산 세계 1위의 모토분에서의 점심 식사,

과연 기대 만큼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을까?




그로즈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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