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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나무 Jul 07. 2024

세상에 하나뿐인 팔레트

15. 아씨아노(Asciano)






녹색, 금색, 황토색, 연두색, 갈색, 하늘색, 회색, 흰색, 노란색, 와인색, 쑥색

 표현이 적절한지 모르겠다.

세상 그 어느 화가의 팔레트에도 없는 색이 펼쳐져있는 곳, 토스카나.

이럴 때 '풍경이 다했다'라고 하던가?


풍경은 하늘과 땅 사이에 무언가 펼쳐진 것.

그 둘 사이에 있는 무언가가 높고 낮게 섞이고 스미며 만든 밝음과 그늘에 눈을 빼앗길 뿐,

멀고 가까움을 떠나 손으로 만질 수 없다.


그 풍경 앞에서 시간을 마음대로 있다는 것이 고마웠다. 

뭔가를 이룬 것만 같다.

 









아씨아노(Asciano)근처의 크레타 세네시(Crete Senesi)는 시에나(Siena ) 남쪽 지역으로 그야말로 풍경이 완벽의 정점에 도달한 곳이다.

완만한 기복이 있는 그곳은 플리오세(Pliocene)시대의 바다 퇴적물이 덮여서 만들어진 지형이라고 한다.

플리오세는 533만 년 전부터 258만 년 전까지의 지질 시대를 말한다.

그러므로 그 지역 흙에는 아직도 암염의 흔적이 남아있다.

또한 그 지역에는 마치 하얀 돌을 긁어놓은 것과  같은 암벽, 비앙카네 디 레오니나(Biancane di Leonina)는 침식의 결과물로 화학적 반응에 의해 키가 작고 덤불 같은 식물로 구성되어 있는 아주 특별한 생태계를  갖고 있다.













근처에는 와인 빛깔의 꽃이 유난히 많았는데 그것은 코로나리움(coronarium)이라는 다년생 허브로 동물 사료로 쓰이는 건초, 그리고 꿀을 채취하는데도 쓰인다.

또한 그 꽃은 나쁜 토양을 비옥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어서 침식된 토양을 복구하는데 유용한 식물이라고 한다.

아마도 아직까지 소금의 흔적이 남은 그곳은 식물들이 살아남기 힘들므로 코로나리움을 대량 작물하는 게 아닐까 싶다.

이유가 어떻든 꽃이 지천으로 피어있는 모습이 아름답다.








토스카나 언덕의 달콤하고 부드러운 명암의 대비,

밀밭 사이로 펼쳐진 구불구불 비포장 길,

꼬마 병사들처럼 키 작은 포도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콩알만 한 포도알,

하얀 꽃이 자잘하게 피어있는 그야말로 올리브 그린의 올리브 나무,

사이프러스가 길을 인도하는 외딴 농장,

잔잔하게 흐르는 시냇물,

숲의 고요,

언덕에서 불어오는 가벼운 바람,

휘어지다 못해 꺾어질 듯 가냘픈 가지를 흔들어대는 메 귀리,

산 위에도 길가에도 울타리 밑에도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노란 애니시다,

심심함에 한 획을 그어주는 빨간 꽃 양귀비,

그 모든 풍경은 너무 신비로워서 마치 비밀의 장소에 들어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이럴 때 기가 막히다는 말이 필요하다.


'기가 막히다'라는 말은 두 가지의 뜻으로 사용한다.


1. 어떤 일이 놀랍거나 언짢아서 어이없다.

2.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좋거나 정도가 높다.


물론 2번에 해당한다.


크레타 세네시에서 약 2km를 가면 스톤 헨지를 연상시키는 돌 하나를 만나게 된다.

수만 년 전부터 그곳에 있었다고 해도 믿을법한 그 돌은 프랑스 조각가 장 폴 필립(Jean-Paul Philippe)이 1993년에 만든 예술 작품이다.


'과도기적 장소(Site Transitoire)'라는 제목의 그 작품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문지방과 벽이 없는 거주지'를 의미한다.  

옆에 놓인 낮은 돌 세 개는 실제로 인간을 특징짓는 세 가지 주요 위치 (서기, 앉기, 눕기)를 통해 크레타 세네시의 전망을 즐길 수 있도록 하는 문, 의자, 돌 침대를 의미한다.

하지인 6월 21일 저녁에는 지는 해가 돌에 뚫린 윗 틈과 완벽하게 일치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가늘게 뚫린 좁은 틈으로 보이는 해의 모습이 가히 상상이 안된다.









라우레타나 길(Via Lauretana)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이탈리아 전체에서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길 중 하나이다.

예로부터 예술가, 상인, 순례자들이 수세기 동안 자주 이용했던 아름다운 길로 물품을 운반하고, 사상을 전달하며 경로 곳곳에 있는 다양한 예배당에 들렀다고 한다.

당나귀나 마차를 타고, 또는 지팡이를 짚고 걸어서 그 길을 지나다녔을 옛사람들도 이 풍경의 아름다움에 감탄을 했을까?


땅, 바다, 하늘, 산, 어디에도 길은 있다.

우리의 삶도 하나의 길이다.

내 길도 저 풍경처럼 아름다운 팔레트이길 소망한다.









인근에 있는 코무네 아씨아노(Asciano)로 향했다.

전날 온천에서 물놀이를 너무 재미나게 한 탓에 두 자매는 오전에 휴식을 취하기로 하여 SY만 우리를 따라나섰다.


원래 계획은 올리베토 마기오레 수도원(Monte Oliveto Maggiore)에 가려고 했다.

그리고 인근의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먹을 요량이었다.

하지만 수도원은 그룹 가이드 투어만 진행하고 개인적인 입장은 허가되지 않는다 하여 포기했다.


아씨아노의 성문으로 들어가 특이한 열매가 열려있는 커다란 나무 아래 카페의 테이블 앞에 앉았다.

동네 주민들이 삼삼오오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로컬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투박하고 못생긴 돌 틈에 메뉴를 알아볼 수 있는 QR코드 카드가 꽂혀있다.

못생긴 돌이라는 게 맘에 든다.

애플파이와 카푸치노는 그날도 훌륭했다.


아씨아노 역시 성당, 박물관 등이 있는 작은 마을로 소박함이 물씬 풍기는 곳이다.

그런 마을에 더 맘이 가는 이유는 많이 알려지지 않아서 여행자들로 북적이지 않고 호젓함을 즐길 수 있어서다.


빨랫줄에 거침없이 걸려있는 빨래들,

창밖으로 이불을 털고 있는 할머니,

동네 벤치에서 잠시  쉬어가는 여행객,

오래된 처마에 초현실파 화가의 그림처럼 끼어있는 푸른 이끼와 우연히 바라본 하늘의 비행운까지...


'평화'라는 말이 어울리는 곳이다.


















점심은 모처럼 다섯 명이 함께 먹을까 싶어 숙소가 있는 몬테끼엘로로 향했다.

그러니까 우리 숙소도 몬테끼엘로에 해당하지만 자매들의 숙소는 성벽이 있는 윗동네이고 우리 숙소는 아랫마을이다.

성문 앞에서 아랫마을을 내려다보니 우리 숙소가 또렷하게 보였다.



사이프러스 나무 너머로 사진의 중앙에 보이는 집이 숙소






레스토랑인 다리아(Daria)는 마치 로마에 있는 럭셔리한 레스토랑에 있는 착각이 들 정도로 품격이 느껴졌다.

플레이팅 기술도 중요하지만 깊은 맛이 있었고 서비스로 나온 디저트까지 달콤하고 고소하여 마음도 녹아내리는 듯하다.

역시 미슐랭 스타를 괜히 받는 게 아니다.


전에 자매들과 점심을 먹으며 이런 얘기를 했었다.


여행 중 일행들에게 밥을 사고 싶어도 '오늘은 내가 살게'라는 말을 미리 하지 않는 게 좋다.

왜냐하면 내가 내는 그날의 식사가 흡족하게 맛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의 경우, 식사가 끝나고 일행의 만족도가 최고로 높을 때 오늘 '이 식사는 내가 계산할게' 한다.

그러면 서로 기분이 좋다.


그 말을 기억했는지 SY가 말했다.

'오늘 점심은 내가 계산할게.'

'와우 브라바~, 그라찌에 밀레~'













몬티키엘로는 생각보다 훨씬 운치 있고 조용한 마을이었다

마치 영화 세트를 옮겨 놓은 것처럼 보이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아담한 거리를 따라가면 벽돌로 포장된 광장이 나온다.

그 옆으로 꽃이 가득한 발코니와 덧문이 내려진 창이 있는 석조 주택들이 모여 있다.

스카이라인에는 마을의 전성기 시절부터 있어 왔던 7개의 탑이 있는데 주 출입문은 포르타 산타가타이다.

사진만 봐도 그 정적인 이미지가 느껴진다.

가을빛을 닮은 벌꿀색 돌벽과 담장, 돌길이 정말 맘에 든다.















매년 7,8월에는 이 작은 마을에 일명 가난한 극장(테아트로 포베로, Teatro Povero)이라는 이름의 무대가 열린다.

지역 주민들이 마을과 관련된 사회적, 정치적 문제에 대한 대본을 쓰고, 직접 안무와 연출까지 맡아 공연을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시나리오부터 감독, 배우까지 모두 주민이 맡아서 만드는 연극이다.

고작 200여 명 남짓한 주민들이 한 마음이 되어 연극을 만들어 무대에 올린다는 것 한 가지만으로도 그 마을 사람들의 결속력과 친분을 짐작할 수 있다.

한 여름밤에 성당 앞 계단에서 펼치는 연극이라니 상상만 해도 로맨틱하다.





가난한 극장



그날 밤, 나는 다시 몬테끼엘로 성문 앞으로 걸어 올라갔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발 도르차의 노을이 궁금해서였다.

스마트폰으로나마 푸른 밤하늘을 찍었다.


이윽고 해가 지고 우리는 카페로 들어가 칵테일을 즐기며 늦은 밤까지 이야기꽃을 피웠다.

내일이면 이곳을 떠나 다음 숙소로 옮겨야 한다.

물론 근처이긴 하지만 까사 보나리를 떠나는 아쉬움이 컸다.

카페 종업원이 청소를 마칠 때까지 마지막 손님으로 카페 la porta를 지켰다.


내일의 스케치도 아름다울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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