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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11시, 브르노가 웃는 시간

11. 브르노(Brno)

by 전나무


고급 주택가인 체르나 폴레에 자리한 브르노의 숙소는 ‘저택’이라는 단어가 전혀 과하지 않았다.

앞마당의 잔디 위를 가로지르며 움직이는 건 사람의 손이 아니라 작은 로봇.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금속의 표면, 일정한 속도로 잔디를 밀어내는 그 기계적 리듬은 묘하게 차분했다.


문을 열자마자 마주한 별도의 드레스룸이 이 집의 넉넉함을 예고했고, 오래된 러그의 질감이 좋은 침실과 스무 명도 모일 듯한 거실, 자쿠지가 있는 마당까지 집은 군더더기 없이 크고 자연스러웠다.

과하지 않았고, 기세를 부리려 하지도 않았다.

짐을 내려놓는 순간, 방 안의 공기가 우리가 지닌 먼 길의 흔적을 흡수하며 어느새 익숙함으로 변했다.

마치 오래 비워둔 내 방이 제 주인을 다시 맞이하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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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 두어 마리가 정원을 스치고, 석조 건물 사이로 초저녁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도시는 과장된 환대도, 차가운 거절도 아닌 그저 “천천히”라는 손짓 하나를 내밀었다.

여행은 결국 장소를 옮기는 일이 아니라, 잊고 지냈던 감각들을 되찾는 일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브르노는 남모라비아의 주도이자 체코에서 프라하 다음으로 큰 도시다.

그러나 대도시 특유의 번잡함 대신, 오래된 건물과 젊은 예술가들의 작업실, 산업시설의 잔재와 새로 문을 연 카페가 서로의 자리를 침범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어져 있었다.

그 균형 잡힌 온도, 과한 것도 모자란 것도 아닌 이 도시의 결이 첫인상부터 마음에 들었다.


광장으로 향하는 길에는 그늘이 많았다.

건물 하나하나가 자기의 표정을 간직하고, 손길이 닿은 조경과 야생의 초록이 어울린 동네는 조용한 품격을 풍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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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사에 도착하니 건물 외벽에 독특한 다섯 개의 첨탑이 보였다.

그런데 가운데 첨탑이 휘어져 있다.

거기엔 사연이 있었다.

브르노의 새 시청사를 짓기 위해 유명한 석공 장인, 안톤에게 정교한 고딕 양식의 입구 조각과 첨탑 작업을 의뢰했다.

그는 뛰어난 솜씨로 다섯 개의 첨탑을 완벽하게 세웠다.

하지만 약속했던 보수를 제대로 주지 않자 크게 분노했다.

그래서 그는 다섯 개의 첨탑 중 가운데 하나를 일부러 휘어지게 만들었고 자신의 불만과 풍자를 돌 속에 남겼다.

이에 브르노 시민들은 대가를 제대로 치르지 않으면 도시의 얼굴도 삐뚤어진다는 말을 전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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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벽을 지나 입구의 통로에 악어 한 마리가 매달려 있었다.

사람들은 용이라고 부르지만 누구도 용처럼 여기지 않는, 장난기 어린 세월의 조각.

도시가 스스로를 너무 진지하게 만들지 않으려는 숨구멍 같아 잠시 웃음이 났다.

첨탑에 오르면 도시의 경관이 모두 보인다 하지만 별다른 매혹을 느끼지 못한 우리는 그대로 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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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광장에 도착하자 검은 화강암 조형물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다.

햇빛이 표면을 타고 미끄러지듯 흐르고, 사람들은 탑의 여러 구멍에 손을 넣으며 뭔가를 기다렸다.

어떤 이는 깊숙이 손을 집어넣어 내부를 더듬고, 어떤 이는 긴장한 표정으로 주변을 살폈다.


“좀 있으면 11시야.”

“운 좋게 잘 왔네.”


우리는 의도치 않게 구슬이 떨어지는 시간에 맞춰 도착한 것이다.

브르노의 천문시계는 일반적인 시계와는 아무 관계가 없어 보인다.

시침도, 별자리도, 시간을 알려주는 장식도 없다.

화강암 조각으로 보일 뿐인데 왜 ‘오를로이(천문시계)’라 불리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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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5년, 스웨덴군이 브르노를 포위한 전쟁에서 비롯된 전설 때문이다.

“정오까지 항복하지 않으면 도시를 불태우겠다.”

그 말에 브르노의 수비대는 도시의 생존을 걸고 한 시간 앞당겨, 오전 11시에 종을 울려버렸다.

적군은 아직 공격 준비가 안 된 상태였고 브르노는 그 틈을 타 살아남았다.

천문시계는 바로 그 기지를 기념하는 구조물이다.


‘시간을 읽는’ 시계가 아니라, ‘시간을 속여 살아남았던 순간’을 기억하게 하는 시계.

그래서 이 시계는 매일 11시에 단 한 번, 작은 유리구슬 하나를 떨어뜨린다.

네 개의 구멍 중 어디로 떨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전쟁 중 어디로 공격이 몰려올지 알 수 없었던 것처럼.


드디어 11시.

철커덕 툭— 하고 어디선가 작은 소리가 났고, 사람들의 웃음이 터졌다.

한 소년이 손에 쥔 구슬을 자랑하듯 들어 보였다.

아쉬워하는 표정들, 기대하던 목소리들.

그 밝고 가벼운 풍경 자체가 브르노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도시의 상처마저 농담처럼 다루는 힘, 지나간 시간을 유머로 기억하는 여유가 그곳의 여행자들을 웃게 만들었다.


천문 시계의 구슬이 떨어지는 시간 - 리숑 촬영


언덕 위 성 베드로·바울 대성당에서도 그 유연한 시간 감각은 이어졌다.

정오보다 조금 일찍 울리는 오래된 종소리는 도시가 언젠가 겪었던 순간을 조용히 되새기는 듯했다.

성당 앞에 섰을 때, 기울어가는 빛이 건물의 벽면을 금빛으로 물들였다.

높은 곳에서 내려오는 오르간 연습 소리가 천천히 공간을 적셨고, 그 순간 도시 전체가 느린 호흡을 공유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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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 안은 그날 저녁 있을 콘서트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움직임으로 분주했다.

더블베이스와 첼로, 팀파니 등 덩치가 큰 악기케이스들이 속속 들어오고 있었다.

악기들을 보니 심장이 두근거렸다.

슬그머니 욕심이 발동한 것이다.

문에 붙여진 프로그램을 슬쩍 보고 티켓 판매처의 큐알 코드도 찍어 보았다.

프로그램은 브루크너의 모테트와 드보르작의 테데움이고 티켓은 2만원 정도였다.

결정을 내리 못한 채 숙소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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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거실과 텅 빈 방들이 하루의 이야기를 조용히 받아들이며 어둠으로 가라앉았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마당의 자쿠지 옆에 앉아 빗소리를 들었다.

여행지의 집이 이렇게 자연스럽게 편안해지는 건, 아마 내 안 어딘가에 여전히 여행자의 온기가 흐르고 있어서일 것이다.

다음 여행지는 드레스덴,

그곳에서는 사흘 연거푸 음악회에 갈 예정이다.

드레스덴 젬퍼오페라에서의 마술피리, 그리고 라이프치히 게반트 하우스에서의 이틀,

그러니 더 이상 욕심내지 말자고 마음먹었다.

잠시 흔들렸던 마음을 접으니 홀가분하다.


브르노는 오래된 이야기들이 잠들어 있는 한 권의 두꺼운 책 같다.

관광지가 아닌 삶의 이야기로 존재한다.

똑바르지 않은 첨탑은 고집을,

천문시계는 장난을,

악어는 전설을, 시장은 사람들의 일상을 들려준다.

그래서 브르노를 걷는 것은 풍경을 보는 일이 아니라, 세월 속에 숨어 있던 작은 이야기들을 한 올씩 손끝으로 더듬어 나가는 일에 가깝다.


사람들은 여행지를 떠올릴 때 보통 풍경을 기억한다.

하지만 브르노는 조금 달랐다.

이 도시는 시간을 재지 않았고, 시간을 기록하지도 않았다.

브르노는 시간을 ‘기억하는’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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