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드레스덴(Dresden)
브르노를 떠나 프라하를 거쳐 북쪽의 드레스덴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에서 닷새를 지내고, 다시 프라하를 거쳐 체스키 크룸로프로 내려오는 경로입니다.
체코 여행 중에 며칠 동안 독일에 가는 이유는 드레스덴의 젬퍼 오페라에서의 '마술 피리'와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공연 때문입니다.
음악으로 향한 작은 외도랄까요?
하지만 때로는 이런 우회가 여행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기도 합니다.
오케스트라의 음색처럼, 길도 삶도 직선만으로는 아름답지 않으니까요.
음악은 늘 그렇듯, 먼 길도 마다하지 않게 합니다.
아우토반은 독일어 'Auto(자동차)'와 'Bahn(길)'이 합쳐진 단어로, '자동차 도로' 즉 '고속도로'를 뜻합니다. 특히 '속도 무제한'으로 유명한 독일의 고속도로를 뜻하는 대명사처럼 불리지요.
하지만 전체 구간 모두 속도 제한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 아우토반을 달렸습니다.
예전에 독일을 한 바퀴 돌아보는 여행을 했지만 기차와 버스를 이용했기 때문에 아우토반을 운전하는 것은 처음이지요.
과연 우리가 국경을 넘었을까? 하던 때, 독일 영사관의 안내 문자가 도착했습니다.
유럽 여행의 묘미는 이렇게 조용히, 아무런 표식도 없이 다른 나라에 들어오는 순간도 포함됩니다.
세계의 경계가 지우개로 문질러진 듯 자연스럽게 말이죠.
계기판에 검은 줄 다섯 개가 그려진 동그라미 표시가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제한 속도, 추월금지, 경적 사용 금지 등 모든 제한이 해제된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 구역에서는 최소 130km 이상의 속도를 권장합니다.
차들의 속도는 빨라지지요.
하지만 도로의 흐름을 타면 속도감을 그리 느끼지 못하기 마련입니다.
150km로 달려도 노면은 부드러웠고 빠르다는 감각이나, 위험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으니까요.
유럽의 고속도로에서 운전이 쉬운 건 규칙을 철저하게 지키기 때문입니다.
즉, 추월선은 그야말로 추월할 때만 잠시 들어가는 차선이라는 개념이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주행선에서의 추월은 위반입니다.
그러므로 추월은 반드시 추월선에서 해야 합니다.
유럽 대부분의 고속도로 속도 규정은 130km라 간혹 트럭들을 추월할 뿐 주행선을 따라가도 충분히 빠르니까요.
단순한 규율 하나가 고속도로를 놀랍도록 질서 있게 만듭니다.
4시간을 넘게 달린 후에 드레스덴 숙소 앞에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아직 체크인 시간까지 두 시간이 남았고 청소도 끝나지 않아 기다려야 했지요.
체코처럼 주변에 세컨드 샵이 많더군요.
낯선 풍경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집 앞에 낡은 신발, 오래된 옷, 아이의 장난감들이 놓여 있더군요.
그것은 더 이상 쓰지 않는 물건을 필요한 사람이 가져가도록 문 앞에 내놓는 관습이었습니다.
독일인들의 검소함과 실용이 자연스럽게 만든 생활 속의 나눔 방식이 도시 곳곳에 번져 있었지요.
그 장면을 보자 루마니아에서의 일이 떠올랐습니다.
그곳 역시 세컨드 샵이 많았는데 너무 낡고 허름해서 저런 걸 누가 살까 할 정도의 의류들이 많았어요.
그러므로 여행을 마칠 즈음, 그동안 입었던 바지 두 개를 세탁해서 작은 봉투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루마니아어로 '필요한 분 가져가세요'라고 써서 문 밖에 내놓았지요.
잠시 후 나가 보니 바지가 담긴 봉투는 이미 사라졌더군요.
기분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새 옷은 아니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던 작은 실천이 기억에 남았지요.
나눔은 생각보다 훨씬 단순하고 부드러운 일이었습니다.
드디어 숙소에 들어서니 은은하면서도 강렬한 꽃향기가 맞이했습니다.
식탁 위에는 핑크 백합과 순백의 리시안셔스가 가득 꽂혀 있었습니다.
웰컴 플라워가 드레스덴의 여행을 축하하는 듯했지요.
하지만 향기가 너무 강렬하여 발코니의 테이블로 옮겨야 했습니다.
러기지를 옮겼으니 차를 주차장으로 옮겨야 합니다.
주차장은 근처 슈퍼마켓 레베(Rewe)를 이용하라고 쓰여있었지요.
그곳을 사용할 수 있는 주차 카드가 식탁 위에 놓여 있었습니다.
숙소와는 좀 떨어진 곳이지만 널찍한 데다가 장을 볼 수도 있어서 나름 편리하게 사용했습니다.
다음날, 구시가지로 나가봅니다.
알버트플라츠를 지나자 커다란 가로수들이 어깨를 맞댄 하우프트 슈트라세로 이어졌습니다.
보행자 전용이라기엔 지나치게 넓은 대로가 가슴이 뻥 뚫리는 듯했습니다.
게다가 다양한 상점, 레스토랑, 카페, 갤러리들이 줄지어 있었지요.
그야말로 들름들름할 만한 예쁜 샵들이 많았습니다.
체코에서는 눈요기할만한 상점들이 거의 없었기에 이곳저곳 들어가 소품들을 구경했습니다.
예쁜 것들을 보는 것만으로 에너지가 솟아나니까요.
햇빛이 잎사귀 사이로 금가루처럼 흘러내렸습니다.
그 빛을 따라가자 어느 순간, 아우구스투스 2세의 황금 기마상이 불쑥 시야에 들어왔지요.
하지만 말머리부터 발굽까지 어찌나 금빛이 휘황찬란하던지 그만 외면하게 되더군요.
그는 작센의 선제후이자 폴란드의 국왕을 겸임했던 사람입니다.
드레스덴이 "엘베강의 피렌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예술, 문화, 건축 분야에서 황금기를 누리게 된 것도 그의 업적입니다.
그는 프랑스 루이 14세의 베르사유 궁전을 동경하여 드레스덴을 유럽의 주요 문화 중심지로 만들고자 결심했지요.
츠빙거 궁전, 일본 궁전과 같은 수많은 유명한 바로크 양식 건물이 그의 후원으로 건설되었습니다.
기마상 앞에 엘베강을 가로질러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연결하는 다리의 이름도 아우구스투스 다리입니다.
십 년 전, 그렇게도 건너보고 싶었지만 남편의 만류로 건너지 못했던 다리입니다.
돌바닥은 여전히 묵직한 질감으로 발끝을 받아냈고, 노란 트램은 쉴 새 없이 강을 가로지릅니다
강바람이 그때의 감정을 조용히 되살려주었지요.
다리 끝에 다다르자 멀리 츠빙거 궁전의 회색빛 돔과, 젬퍼 오페라의 유려한 선들이 서서히 윤곽을 드러냈습니다.
브륄의 테라스는 강가를 따라 은색 붓질처럼 펼쳐져 있고, 노란빛의 '군주의 행렬'이 빼꼼히 보입니다.
군주의 행렬은 1870년대에 빌헬름 발터(Wilhelm Walther)에 의해 스그라피토(sgraffito, 벽에 긁어서 그리는 기법) 벽화로 그려졌으나, 비바람에 쉽게 훼손되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내구성을 높이기 위해 1904년~1907년 사이에 약 23,000~25,000개의 마이센 도자기 타일로 교체되었고 세계에서 가장 큰 도자기 예술 작품으로 남았어요.
군주의 행렬에는 12세기부터 20세기 초반 (1127년에서 1904년까지)까지 말을 타고 있는 작센의 군주들 35명과 과학자, 예술가, 장인, 농부, 아이 등 약 100여 명의 인물들이 100m 넘게 이어집니다.
아마 세상 어디에도 이토록 긴 벽화는 없을 겁니다.
노란색, 흰색, 갈색, 검은색 등 최소화한 컬러가 개인적으로 무척 맘에 드는 공간입니다.
군주들의 이름을 보며 천천히 행렬을 따라 걸었습니다.
어디선가 빵냄새가 흘러나옵니다.
작은 프리첼 가게가 있더군요.
독일에 왔으니 먹어봐야 합니다.
100년 넘게 이어져온 빵집 특유의 고소한 온기를 따라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커피는 커피물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묽어서 아쉬웠지요.
벽화를 지나면 마치 돌을 퀼트 한 것처럼 얼룩덜룩한 건물이 보입니다.
그곳은 프라우엔 교회.
교회 앞에는 종교개혁의 주인공 마틴 루터의 동상이 서 있어요.
중세 말 유럽의 가톨릭 교회에서는 여러 가지 면에서 돈이 필요했습니다.
돈을 마련하기 위해 죄지은 사람의 벌을 면죄해 준다는 '면죄부'를 판매하기 시작했지요.
그때 신학대학교 교수였던 루터는 이를 반대하는 95개의 개조 의견서를 공개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신 앞에서 평등하다'
그는 라틴어로 쓰여 있던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해 많은 사람이 읽을 수 있게 했고, 1555년에 루터파 신교가 정식으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작센에서 세계로 퍼진 단순한 하나의 사건이 아닌, 몇 백 년에 걸친 끈질긴 투쟁 끝에 얻은 자유였던 것이지요.
드레스덴은 옛 슬라브어로 '물가 숲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엘베 강변에 위치해 있음이죠.
드레스덴 박물관이 엘베 강을 껴안고 있는데 굳이 박물관에 들어가지 않아도 충분합니다.
엘베 강변에 자리한 건축과 나무와 벤치 하나하나가 모두 오래된 풍경화요, 고매한 예술 작품이니까요.
강 건너 일본식 궁전과 작센 궁이 그림처럼 아름답습니다.
드레스덴 미술 대학교는 250년의 역사를 가진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학교로 건물 자체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복원 미술과 무대미술이 특히 유명해서 프라우엔 교회의 대수술에 중심 역할을 했다고 해요.
지붕 꼭대기의 유리 지붕은 '옥토곤'이라는 갤러리로 졸업 전시회나 초대 작가 특별전이 열립니다.
지난 여행에서 그 학교의 창문에 붙어 있던 붓글씨 '雨'는 사라지고 없더군요.
언젠가 또 다른 누군가의 문장으로 바뀔지 모를 자리를 비워둔 채 말입니다.
아래는 그때 썼던 글입니다.
미술대학 유리창에 구름이 들어있네요.
흰 종이에 써진 雨가 한 편의 시입니다.
그 앞에 한참을 서 있었어요.
유리창에는 구름과 雨, 비가 들어있었지요
갑자기 눈물이 글썽거려졌습니다.
눈물은 슬플 때만 흘리는 건 아니니까요.
드레스덴은 '독일의 피렌체'라 물리고, 괴테는 브륄의 테라스를 일컬어 '유럽의 발코니'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수식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요.
앞을 보나 뒤를 보나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우아하고 품위 있게 서 있고 건물을 닮은 거무튀튀한 아름드리나무들,
저 멀리 아우구스투스 다리를 건너가는 연인들,
유모차를 끌고 가는 엄마,
조깅하는 아가씨,
강변 계단에 앉아 강물을 무심하게 바라보는 아저씨,
그저 평화롭고 아름다운 시간이 소중한 것이죠.
범상치 않은 원형 건물이 완벽한 대칭의 모양으로 서있습니다.
그곳이 바로 드레스덴 젬퍼 오페라 하우스입니다.
세계적으로 최고 수준의 실력을 자랑하는 오케스트라 '슈타츠카펠레 드레스덴'이 상주하고 있는 곳이지요.
1841년에 작센의 국립 오페라극장으로서 세워진 네오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로, 젬퍼는 건물의 설계를 맡았던 독일 건축가 '고트프리트 젬퍼'의 이름입니다.
화재로 소실된 후에 그의 아들 '만프레트 젬퍼'의 설계로 다시 지어졌어요.
리하르트 바그너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과 '탄호이저'를 비롯한 유명한 오페라들이 초연된 유서 깊은 곳입니다.
그게 다가 아닙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살로메와 장미의 기사' 등 걸작들이 이곳 무대에 올려졌습니다.
그곳 역시 제2차 세계대전 때 파괴되어 역시나 복구작업을 했지요.
복구 작업이 끝난 1985년 2월, 카를 마리아 폰 베버의 '마탄의 사수'가 맨 처음 무대에 올려졌습니다.
'마탄의 사수'는 베버가 결혼을 하고 드레스덴에서 살 때 작곡한 곡이거든요.
이제 츠빙거 궁전으로 들어갑니다.
츠빙거 궁전과 젬퍼 오페라 하우스 사이의 광장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기마상은 작센의 왕 '요한'입니다.
츠빙거라는 예쁜 이름의 뜻은 '축제의 장소'.
드레스덴이라는 도시의 이름도 그렇지만 엘베강, 브륄의 테라스, 프라우엔 교회, 츠빙거 궁전, 젬퍼 오페라 하우스 등 도무지 독일이 주는 웅장함이나 딱딱하고 거친 어감의 언어와 다르게 부드러운 느낌이 있습니다.
2층 발코니를 따라 한 바퀴 쭈욱 돌아보았습니다.
가장 인상적인 것은 왕관의 문과 아치 문을 통해 보이는 작센 왕의 기마상이었습니다.
세계대전 후 다시 화음을 찾기 위해 천천히 음표를 되짚어가며 자신의 선율을 회복한 도시.
10년 만에 다시 찾은 드레스덴은 마치 한동안 다른 곳에 마음을 두었다가 다시 음악으로 돌아온 연주자 같았습니다.
여행이란, 삶의 한 구석에 조용히 덧입혀지는 또 하나의 색채가 아닐까요?
외도하듯 찾아온 드레스덴에서 맞이할 회복된 음색은 어떤 색일지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