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로스의 《에브리맨》을 읽고
미국의 소설가, 필립 로스가 18년 5월 22일 타계했다. 어렴풋이 그의 이름과 명성을 알고 있기는 했지만 그의 소설을 읽어본 적은 없어 그의 부고를 듣고도 덤덤했었던 것 같다. 그저 그날이 독서모임이 있던 날이었고, 다음에 읽을 책을 정해야 했기에 모임에서 그의 이름을 던져보았다. 결국 나는 그의 소설을 뒤늦게,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공교롭게도 노화와 죽음에 대해 다루는 《에브리맨》으로 말이다.
《에브리맨》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소설의 도입부인 "그"의 장례식 장면을 끝맺는 문장들이었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특별한 일은 없었다. 그들이 모두 하고 싶은 말을 했을까? 아니, 그렇지 않았다. 또 물론 그렇기도 했다. 그날 이 주의 북부와 남부에서 이런 장례식, 일상적이고 평범한 장례식이 오백 건은 있었을 것이다. 두 아들 때문에 뜻밖의 방향으로 흘러간 삼십 초, 그리고 죽음이 발명되기 이전에 순수하게 존재하던 세상, 아버지가 창조한 에덴, 구식의 보석상이라는 탈을 쓴 폭 5미터 깊이, 깊이 12미터밖에 안 되는 크기의 낙원에서 이루어지던 영원한 삶을 하위가 아주 공을 들여 정확하게 되살려낸 것 외에는 다른 여느 장례식보다 더 흥미로울 것도 덜 흥미로울 것도 없었다. 그러나 가장 가슴 아린 것, 모든 것을 압도하는 죽음이라는 현실을 한 번 더 각인시킨 것은 바로 그것이 그렇게 흔해빠졌다는 점이었다.
소설의 도입부이기에 아직 독자는 "그"가 누군지 모른다. 장례식 장면 내내(사실은 소설 내내) 이름이 제시되지 않는 "그"에 대해 우리가 아는 건 광고업계에서 일했다는 사실, 그리고 장례식에 온 조문객들의 말과 그들의 태도를 통해 암시되는 파편적인 정보들뿐이다. 그의 형 하위가 "아주 공을 들여 정확하게 되살려낸" 행복했던 유년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그의 죽음을 어느 정도 구체적이고 사적인 개인의 것으로 만들기는 하지만, 장례식을 마무리하는 위의 저 문장들은 그의 죽음이 흔해빠진 것, 별 다를바 없는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되짚어준다. 나는 이 소설에 담긴 죽음관이 위의 저 문장들에 가장 함축적으로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죽음은 보편적인 것이다. 죽음 앞에서 우리 모두는 '에브리맨'이다.
그렇다면 왜 주인공인 "그"의 죽음을 굳이 소설의 가장 첫 부분에 배치했을까. 주인공의 죽음 이후를 보여준 뒤 다시 생전의 시점으로 돌아가는 이 소설의 플롯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고, 모른 척하지만 사실은 다 알고 있는 진실 하나를 일깨워준다고 생각한다. 죽음은 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정해진 결과'다. 나는 '인간의 죽음이 그토록 평범하고 흔해빠진, 그래서 "모든 것을 압도하는" 죽음일 때, 인간은 어떻게 죽음을, 그리고 삶을 받아들여야 할까'라는 질문을 이 소설이 던진다고 생각한다. 저 문장들 이후의 소설의 내용은 특별하고 사적이며 유일한 개인의 생이 별다를바 없고 흔해빠진 죽음으로 달려가는 과정, 즉 "그"의 노화의 과정을 보여준다.
나는 아직은 내가 '노화'라는 단어를 체감하지 않은 나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일을 해도 20대 초반에 비해 지금이 힘이 더 들기는 하지만 그걸 노화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노화'라는 단어에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스며 있어 좀처럼 나 자신에게 대입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노화는 피할 수 없다. 사실은 이미 겪었고, 겪고 있는 중이고, 겪어갈 수밖에 없는 과정이다. 하지만 이 사실은 모두가 알고 있지만 애써 외면한다. 죽음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알지 못하는 어린 시절을 이 소설에서는 "죽음이 발명되기 이전에 순수하게 존재하던 세상"이라고 표현했다. 주인공이 죽음을 알게 된 최초의 경험은 해안가에서 시체를 목격했던 순간이다. 그리고 병실을 같이 쓰던 아이의 부재를 깨달은 것 또한 주인공이 죽음을 간접적으로 체험한 순간이다. 이후 "그"가 삶의 중요한 순간에서 물질적 성공과 신체적 쾌락을 택한 데는 신체의 병듬, 삶의 유한성, 죽음의 숙명을 일찍부터 체감한 탓이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러한 과거의 선택들을 주인공은 노년이 되어 처절하게 후회한다.
보통 냉정하던 이 사람은 마치 기도하는 광신자처럼 사납게 자기 가슴을 쳤다. 이 실수만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실수, 모든 뿌리 깊고, 멍청하고, 피할 수 없는 실수들로 인한 가책에 시달리다-자신의 비참한 한계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면서도, 마치 삶의 모든 파악할 수 없는 우연을 스스로 만들기라도 한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때론 육체의 늙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젊은 여성에게 추파를 던지며 어리석은 기대를 하는 짓을 하기도 한다. 이 소설은 노화를 곧 지혜로움의 동의어로 놓지 않아서 더 현실적으로 다가오고 그래서 더 무섭다.
우울해하고 좌절하던 주인공은 공동묘지에서 묫자리를 파는 일을 하는 흑인 인부와 대화를 나누면서 다시금 생에 의지를 가지게 된다. 하지만 잔인하고 허무하게도, 생에 의지를 강렬히 느끼며 오른쪽 경동맥 수술을 받던 그 순간 그는 심장마비로 죽는다.
그는 "처음부터 두려워하던 바로 그대로" 죽는다. (소설의 처음부터 장례식을 보여줬기 때문에) 당연한 결말이지만 그럼에도 이 끝이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달라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삶'의 과정 안에서 그는 죽음을 극복하지 못한다.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해탈하거나 어떤 빛나는 성찰을 얻지도 못하고 끝내 죽음을 두려워하고 삶을 갈망하다 죽는다. 이 소설이 무서운 점은 이게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고 (제목에서부터 분명히) 말한다는 점이다. 인간은 어떻게 죽음을 받아들여야 할까에 대한 이 소설의 답은 "처음부터 두려워하던 바로 그대로"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노화와 죽음은 여전히 나에겐 실감하기 어려운 주제다. 하지만 노화의 초라함과 죽음의 허무함을 전하는 이 소설을 읽고 다시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시간의 생생함을 조금은 되새길 수 있었다. 한편으론 세월이 지나 나이를 더 먹고 이 소설을 읽는다면 어떨까 싶은 생각도 든다. 그땐 이 소설이 훨씬 더 무섭게 다가올까. 필립 로스는 자신이 죽기 전에 무슨 생각을 했을까. 대작가인 그도 여느 에브리맨과 다를바 없었을까.
이미지 출처: Photo by Aron Visuals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