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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모 Sep 03. 2020

잃어버린 것들은 앗아갈 수 없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마>를 읽고

2017년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 《나를 보내지마》를 읽었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5살 때 일본 나가사키에서 영국 런던으로 이주한 이후 쭉 영국에서 살았다고 한다. 특이한 점은 영국의 시민권을 스물아홉의 나이에 받았다는 점이다. 영국에서 긴 시간을 살면서도 완전히 영국인이지는 못한, 경계인으로서의 삶을 살았고 이러한 정체성의 영향이 작품에도 많이 반영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의 초기작 두 편은 일본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지만 그 이후의 작품들에서는 점점 그 배경이 환상적인 쪽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고 한다. 《나를 보내지마》에서도 1950년대부터 1970~1980년대 즈음의 영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등장인물들의 유년시절 이야기가 진행되는 주요 공간인 '헤일셤'은 현실에 없는 가상의 공간이다. 


《나를 보내지마》는 SF 장르의 주요 단골소재인 '복제인간'을 차용하면서도 전혀 SF적이라는 감상을 느낄 수 없었다는 점이 특이하게 다가왔다. 복제인간이라는 SF적인, 미래의 기술을 소재로 하면서도 오히려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과거라는 점 또한 아이러니하다. 





《나를 보내지마》를 읽으면서 내가 느낀 가장 지배적인 감상은 암울함이었다. 이 소설에서 복제인간인 헤일셤의 학생들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다. 이들은 성인이 되면 복제인간이 아닌 인간들을 위해 장기를 기증하는 기증자가 되거나, 그 기증자들을 돌보는 간병사가 되어야만 한다. 간병사가 되어도 일을 그만두면 기증자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들 앞에 굳건히 기다리는 운명은 'Completion', 즉 복제인간 본래의 기능을 다하고 완료되는 것뿐이다. 이는 소설의 주요 인물인 캐시, 토미, 루스 또한 마찬가지이다. 


SF의 컨벤션을 따른다면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복제인간들은 그 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 (〈블레이드 러너〉의 레플리컨트처럼) 탈주하거나 저항하는 길을 택할 것이다. 하지만 《나를 보내지마》 속 복제인간들은 그럴 의지가 거의 없다. 그들의 의지로 향하는 최초의 여행은 더 이상 바다를 항해하지 못하는 폐선을 보는 것으로 끝이 난다(이걸 '탈주'의 실패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러한 상황에서 그들이 희망으로 삼는 것은 (그들을 이용하는 인간들에게) 진정한 사랑을 인정받아 고작 3년이라는 '유예' 기간을 얻어내는 것뿐이다. 희망이 죽음(완료)의 '유예'일 뿐이라는 점이 이 작품을 가장 암울하게 느껴지도록 만든다. 그 희망조차 사실이 아니라 복제인간들이 만들어낸(꿈꾼) 환상이었다는 점 또한 더욱 그렇다. 


SF의 또다른 컨벤션인 복제인간이 스스로 인간임을 믿고 있다가 자신이 '복제된 인간'임을 자각하고 충격을 받는 장면 같은 것도 이 소설에서는 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헤일셤에서 보낸 유년시절부터 어렴풋이 그들 스스로의 운명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지각하고 있고, 그들이 복제인간이라는 사실이 미스터리나 충격적인 반전의 요소로 사용되지 않고 그저 헤일셤 교사의 입을 통해 허무하게 말해진다. 교사가 학생들에게 그들의 운명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는 순간은 전혀 충격적인 사실이 폭로되는 것처럼 다가오지 않고, (이미 알고 있는) 정해진 운명을 그저 다시금 되새기는 것처럼 느껴진다.



"너희가 앞으로 삶을 제대로 살아 내려면, 너희 자신이 누구인지 각자 앞에 어떤 삶이 놓여 있는지 알아야 한다." (p.119)



헤일셤은 복제인간 학생들을 '사육'하는 곳 중에서도 가장 인간성 있고 교양 있는 환경을 제공하는 곳이(라고 헤일셤을 만든 사람들은 말한)다. 헤일셤은 복제인간 또한 인간적인 대우와 교육을 받을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좋은 취지의 운동으로 인해 생긴 곳이지만, 역설적으로 그곳에서 행해지는 교육은 복제인간으로 태어난 학생들의 벗어날 수 없는 운명(기증)을 보기 좋게 포장하거나 가린다. 


《나를 보내지마》에서 예술은 창조성을 발휘해 작품을 만든 사람의 내면이 반영되고 그의 영혼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결국 그 예술이 복제인간의 운명을 바꿀 수 있는 힘은 없다. 헤일셤의 교육이 캐시, 토미, 루스에게 다른 학교의 복제인간 학생들보다는 더 인간적인 대우를 받게 해주었을 수는 있지만 결국 '사육'을 보기 좋게 포장한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캐시와 루스가 마담의 집을 찾아가 선생님과 나누는 대화는 예술과 교양으로 감싼 헤일셤의 위선을 보여준다. 


헤일셤은 위선적인 공간이지만 동시에 캐시, 루스, 토미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소중한 공간이기도 하다. 헤일셤 교육의 위선을 못 견디고 학생들에게 그들의 운명을 알려주려 한 루시 선생님의 행동에 대해서 고민해보게 된다. 안락한 거짓보다 불편한 진실을 알려주는 것이 항상 옳은 것인가 하는 점. 루시 선생님은 결국 토미에게 한 말을 취소했고 헤일셤을 떠났다. 진실을 말해도 아무것도 변하는 것이 없을 때, 그들에게 진실을 말하는 것이 불편함만을 안겨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빠르게 다가오는 신세계를 보았지. 과거의 질병에 대한 더 과학적이고 효율적인, 그래, 더 많은 치료법을 말이야. 맞아. 거칠고 잔인한 세상이지. 나는 어린 소녀가 두 눈을 꼭 감은 채 과거의 세계,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는 걸 자기도 알고 있는 과거의 세계를 가슴에 안고 있는 걸 보았어. 그걸 가슴에 안고 그 애는 결코 자기를 보내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지. (p.372)


"나를 보내지마(Never let me go)"라는 제목은 소설 속에서 캐시가 듣는 노래의 가사에서 따온 것이다. 캐시는 그 노래의 가사를 아기를 안고 있는 여자의 심정으로 해석해 감상한다. 그 노래를 들으며 배게를 안고 춤을 추는 캐시를 본 마담은 그 모습을 지나간 세계를 그리워하며 보내지 않으려 하는 것으로 보며 감동받는다. 이 해석의 간극은 마담의 집에 걸려 있는 그림을 본 토미와 캐시의 반응에서도 나타난다. 토미는 그 그림을 헤일셤으로 보고, 캐시는 헤일셤이 아닌 것 같다고 말한다. 캐시는 대신 들판을 보며 헤일셤을 떠올린다. 


예술은 이를 감상한 사람들 각자 다른 해석과 감상을 낳는다. 하나의 예술작품을 본 사람들이 완전히 똑같은 하나의 해석과 감상을 공유할 수는 없다. 헤일셤의 선생님들은 예술을 복제인간 학생들에게 영혼이 있음을 증명하는 수단으로 취급한다. 캐시와 토미는 진정한 사랑을 인정받기 위해 토미의 그림을 가져가지만 마담에게 비웃음 당한다. 


예술은 그 자체로는 인간의 조건이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예술을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개인들의 감상의 간극이 개별 인간의 고유성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고유성은 아무도 침범할 수 없다. 노래를 듣는 캐시를 바라보는 마담의 해석이 결코 캐시의 "Never let me go"에 대한 감상을 해칠 수 없는 것처럼. 캐시의 테잎은 수천 개의 복제된 상품 중 하나이지만 테잎 속 노래를 감상하며 캐시가 느끼고 가사에 부여한 의미는 고유한 것이다. 테잎을 찾자고 한 건 토미이지만 결국 똑같은 테잎을 발견해낸 건 캐시 자신이다. 

 

《나를 보내지마》에서 희망이 있다면 잃어버린 것들을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찾아내고 불러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도 "앗아갈 수 없"다. 어쩌면 잃어버린 것들이 모이는 장소, '로스트 코너'는 노퍼크가 아니라 각자의 고유한 내면일지도 모르겠다.



어떤 센터로 보내지든 좀 더 평온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면 나는 머릿속에서 차분하게 헤일셤을 불러내리라. 그것은 아무도 내게서 앗아갈 수 없으리라.





이미지 출처: Photo by Simon Berger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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