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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른봄 May 23. 2018

200년의 시간을 지나도 남아있는 것

<19세기말 비망록>, 조부경 글, DUNDUN 그림, 다음웹툰, 완결

*본 리뷰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19세기는 본격적으로 '근대'가 시작되었던 시기다. 인간 본위의 시대가 열렸고, 인간은 끝모를 발전을 이뤄내던 시기. 그러면서 한편으론 제국주의가 지구를 지배하고, 강자에 의한 착취와 약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상식'으로 통용되던 시기기도 하다. 조부경 작가의 웹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웹툰 <19세기말 비망록>은, 1800년대 후반 영국을 배경으로 한 가족의 비극과 두 아이가 온몸으로 살아내야 했던 비극을 그리고 있는 로맨스-스릴러 장르의 작품이다.

부르크사이드 대저택에 온 릴리안, 그를 맞아주는 윌리엄(?)

    세간에 '망자의 저택'이라고 알려진 집을 가지고 있던 가문에는 자식이 둘 있었다. 고매한 학자였던 아버지는 병을 앓고 있던 어머니를 극진히 아꼈지만, 완전히 미쳐버린 어머니는 결국 아버지를 총으로 쏴 죽였고, 지금은 아마 정신병원에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만 돌고 있었다. 두 자식 중에 오빠 윌리엄은 후작가문인 레온딘 가문에 양자로 입적하고, 딸 릴리안은 클리어워터 가문에 들어간다. 악몽으로 찾아오는 어린시절의 기억은 희미해졌고, 이제 성인이 된 어느날, 클리어워터 가문의 가주가 죽고 릴리안의 어머니는 그녀의 오빠가 자신을 찾고 있다면서 후작가문에 가서 살기를 권한다.


    그런데 오빠라는 윌리엄이 좀 이상하다. 정확히 말하면 이 집안 전체가 좀 이상하다. 유모라는 사람은 릴리안을 밑도끝도 없이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평생을 가지고 있었던 남매의 징표라는 인형 안에서는 처음 보는 가족사진이 튀어나오는데, 그 안에 있는 오빠는 지금 자신을 데리러 온 사람과는 전혀 다르게 생겼다거나 하는 이상한 일들이 벌어진다.

아무리 어릴 적이라고 해도 전혀 다른 오빠의 모습

    그 중에 제일 이상한 것은 릴리안이 묵는 옆방의 존재다. 굳게 잠겨 아무도 열 수 없도록 하라고 했다는 오빠 윌리엄의 지시도 이상하지만, 늦은 밤이면 들려오는 비명소리는 릴리안이 잠들수 없도록, 그리고 피할 수 없도록 뇌리를 파고든다. 이 웹툰은 이런 미스테리에 둘러싸인 대저택과 오빠 윌리엄과 동생 릴리안, 그리고 레온딘 가문의 후계자가 가진 비밀들이 얽혀 만들어낸 비극을 가까이에서 조망하는 이야기다. 시대가 만든 피해자들이 어떻게 자신을 파괴하고, 그 결과 남겨진 아이들은 어떻게 그 파멸을 답습하는가를 그린 작품답게 이야기는 시종일관 무거운 분위기로 흐른다.


    19세기 말은 앞서 말했다시피 인류가 희망을 맞이한 시대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끔찍한 범죄나 인권유린이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시대기도 하다. 의학의 발달 이면에는 전쟁과 학살, 그리고 인체실험이 있었고, 철학과 사상의 발달 이면에는 우생학이나 인종차별, 그리고 여성혐오가 있었다. 


    이 작품을 처음 보면 탐미주의적 성향이 먼저 눈에 띈다. 아름다운 그림, 철저한 고증과 그 안에 숨겨진 금지된 사랑과 그 결과 탄생한 아름다운 소녀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19세기에 합리주의의 반대편에서 힘을 얻은 탐미주의는 합리적 판단보다 미를 극단적으로 추구한다. 미의 창조를 인생의 보람으로 여기고, 본능 그대로의 쾌락과 향락을 추구하는 탐미주의적 모습이 이 작품의 초반부를 지배한다면, 이성과 논리적 타당성을 근거로 세상을 보고, 비이성적이고 우연적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 합리주의적 모습이 작품 후반부를 지배한다. 흥미롭게도 탐미주의와 합리주의 모두 19세기에 힘을 얻은 이론들이다.


    <19세기말 비망록>의 초반부는 '오빠' 윌리엄과 릴리안 사이의 미묘한 감정의 흐름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대저택의 비밀을 파헤치며 실체적 진실에 접근해 나간다. 독자들은 릴리안의 두근거림이 잘생긴 윌리엄 때문인지, 아니면 비명소리를 모른척하는 주변의 사람들 때문인지 구분할 수 없다. 근친상간이라는 금지된 사랑이 키워드인 것 처럼 등장하지만, 곧 사그라들고 만다. 윌리엄 행세를 했던 사람은 사실 엘리엇 레온딘으로, 양자로 들인 윌리엄의 동생이자 레온딘 후작가의 적자였다는 것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작품 후반부로 가면, 릴리안의 친오빠인 윌리엄에 얽힌 이야기, 그리고 릴리안과 윌리엄의 부모인 헬레나와 아놀드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가 말 그대로 뿜어져 나온다. 윌리엄은 19세기 당시에는 엄격하게 '금지'되던 동성애자로, 의붓동생인 엘리엇을 사랑했다. 이중의 죄를 지은 윌리엄은 견디다 못해 자신의 아버지가 죽었던, '망자의 저택'에서 목숨을 끊었다. 동생 엘리엇은 형을 자신이 죽였다는 죄책감에 형에게 들었던 친동생 릴리안에 대한 환상이 더해져 릴리안을 찾아 데려오게 된 것이었다.


    이들의 부모인 헬레나와 아놀드는 생물학을 연구하던 학자로, 19세기 당시에 여성이기 때문에 받아야 했던 차별로 인해 학계에 진출할 수 없었던 헬레나에게 아놀드는 '함께 연구하자'는 말과 함께 청혼한다. 그러나 결혼후 발표한 첫 공동저작 논문에는 아놀드의 이름만 적혀 있었고, 아놀드는 '학계가 보수적이다'라는 변명만 늘어놓는다. 그리고 그 결과로 얻어낸 독일의 교수 자리는 아놀드가 독차지하고, 아이를 낳고 육아에 시달리던 헬레나는 염세적이 되어간다. 그 과정에서 아놀드가 떠난 사이에 헬레나는 아이를 임신한다. 그리고, 그 아이가 바로 릴리안이었다. 릴리안은 오빠 윌리엄과 달리 밝은 금발을 가지고 태어났다.

자신이 모든 고통의 원인이라며 자책하는 릴리안

    릴리안이 정말로 이 모든 비극의 원인일까? 그럴리 없다. 모든 비극의 원인은 따지자면 함께 연구하자고 해놓고 공동연구의 결과물을 독차지한 아놀드고, 그 너머에 있는 '보수적이다'라는 말 뒤에 숨은 학계의 분위기고, 그런 사람들-정확하게는 남성들-이 주도권을 쥐고 여성의 진입을 허락하지 않은 사회에 있다. 그런 차별과 억압에 아무것도 할 수 없던 헬레나는 '히스테리'를 부렸다고 작중에서 그려진다. 작품에 나오듯이 히스테리의 어원은 '자궁'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것처럼, 당시에는 이 히스테리의 치료법이라면서 자궁 적출을 실제로 진지하게 실행에 옮긴 사례도 있었다. 이런 차별의 틈바구니에서 미쳐버리지 않을 수 있었을까. 헬레나는 정신을 제대로 잡을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모르핀을 맞아가며 버티다가, 자신이 이렇게 된 원인을 자식, 그것도 막내딸 릴리안에게 돌린다. 그리고, 결국 처음에 말한대로 세간에는 '미친 여자가 남편을 쏴 죽인' 사건을 저지르게 된다. 


    이 웹툰은 앞서 말한대로 탐미주의적 광기에 사로잡힌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게도 역사가 있고, 그 역사를 짚어보면 우리가 놓치고 지나간 것일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이 웹툰의 제목인 <19세기말 비망록>이 돋보이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역사를 기록으로 남긴다. 비망록은 잊지 않기 위해 적은 글을 뜻한다. 이 작품에서 작가들이 지적하는 문제는 21세기인 현재에도 유효하다. 19세기에 비해 나아졌다곤 해도, 여전히 동성애를 죄악시하는 사회분위기는 여전하다. 뿐만 아니라 고학력 여성은 '결혼시장'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평가를 받고, 여성의 경력은 출산 이후 단절되는 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200년이 다 되도록, 우리는 과연 얼마나 변화를 이끌어냈을까? 천연두를 박멸하고, 제국주의 시대는 물론 냉전의 시대도 끝났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자신의 존재가 죄악이 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저 사랑했을 뿐이고, 그저 태어났을 뿐임에도 차별받고, 억압받는 사람들이 있다. 과연 우리는 그들에게 세상이 변했다고 할 수 있는가.


    이런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작품은 로맨스 작품다운 결말을 보여준다. 엘리엇의 변하지 않는 사랑을 받아들인 릴리안은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처럼 보인다. 용서받을 수 없는, 존재해서는 안되는 아이였던 릴리안은 행복을 찾는다. 때문에 결혼이 행복의 시작점-또는 사랑의 결말-인지 의문이 남는다. 물론, 아놀드와 달리 엘리엇은 끝없는 헌신을 약속하고, 그것을 실제로 지켜내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엘리엇의 헌신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두 사람의 관계는 주체와 객체가 역전된 또다른 착취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시대적 배경이 가지는 한계가 있겠으나, 굳이 '결혼'이라는 제도를 통해 두 사람이 결핍을 해소하고 안정을 찾아야 했을까? 물론, 로맨스 소설을 기반으로 쓰여진 작품이기 때문에 이해가 어려운 부분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은 남는다.


    <19세기말 비망록>은 관능적이고 탐미주의적인 초반부와 주제부에서 드러나는 문제의식은 물론 아름다운 작화, 그리고 마치 오래된 사진을 보는듯한 컷 연출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로맨스 장르의 클리셰를 반복하고 있다는 점은 아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파괴된 가정의 구성원들이 각자의 결핍과 공허함을 메꿔나가는 과정을 잘 그려내고 있다. 역사속에 존재했을지도 모를 사람들의 기록되지 않은 삶을 그려냄으로써 21세기의 현실을 꼬집는 문제의식 또한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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