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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근긍 Sep 02. 2018

<살아남은 아이> 진실을 바라보는 것은 어렵다

그 간절함을 느끼길 원한다면

은찬(이다윗)은 물에 빠진 기현(성유빈)을 구하려다 목숨을 잃는다. 아이를 잃은 아버지 성철(최무성)은 상실을 견뎌내려 안간힘을 쓰고, 아이를 잃은 어머니 미숙(김여진)은 상실을 버티지 못해 아들의 흔적을 되뇐다. 영화 <살아남은 아이>의 시작이다.


 

자식을 잃은 부모와 살아남은 아이


아들을 떠나보낸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자식을 의사자로 선정하기 위해 서류를 준비하는 것뿐이다. 아들은 의사자로 선정되고 그 보상금으로 학교에 장학기금을 조성한다. 의로운 일을 한 아들과 장학기금을 조성한 부모에게 사람들은 박수를 보낸다. 자식을 잃은 부모는 자신들에게 쏟아지는 박수의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다. 공허하게 짝짝거리는 소리 역시 부모가 견뎌내야 하는 고통의 연장선이다. 거기에 ‘잘 끝나서 다행이야’라는 말이 위로처럼 더해지고, ‘보상금은 얼마나 받았어?’라는 질문까지 이어지면 영화를 보고 있는 우리조차 견디기 어려워진다.


그런 그들에게 아들이 목숨을 바쳐 살린 기현이 나타난다. 성철은 가족도 없이 혼자 생계를 꾸려나가는 기현이 마음이 쓰여 도배일을 가르친다. 처음에는 불편해하던 미숙 역시 죄를 지은 듯 자신을 피하는 기현을 보며 마음이 쓰인다. 도배일을 가르치고 음식도 챙겨주며 조금씩 가까워진 세 사람은 마치 유사가족처럼 가까이 지낸다. 세상을 떠난 은찬의 빈자리에 은찬이 구해 준 기현이 들어오게 된 것이다. 기현 역시 도배 자격증을 따고 과일을 선물하며 성철과 미숙에게 마음을 연다. 은찬의 죽음과 함께 망가졌던 세 사람의 일상이 서로에게 마음을 열며 조금씩 회복하는 듯 보인다.


영화의 첫 장면은 인테리어를 하기 위해 치수를 재고 천장을 들어내는 성철의 모습이다. 성철에게도 기현에게도 도배는 은찬의 죽음 이후 그들의 삶을 드러내는 적절한 비유로 보인다. 도배는 오래되어 상한 벽지를 떼고 새로운 벽지를 붙이는 일이다. 어른의 도움이 없이 위태로운 삶을 사는 기현. 아들의 상실과 함께 망가진 삶을 사는 성철과 미숙. 그들은 헤져서 망가진 벽에 새로운 벽지를 바르듯 그들의 상처에 평범한 일상을 덧댄다.



영화 <살아남은 아이>는 은찬의 죽음이라는 사건 이후를 사는 세 사람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하나의 사건 이후에 망가져 버린 흔적을 다룬다는 점에 영화 <한공주>가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한공주와 차이가 있다는 그들을 망가뜨린 사건 그 순간은 보여주지 않았다는 점일 것이다. 집단 성폭행과 그 사건 이후 소녀의 삶을 그린 영화 <한공주>가 성폭행의 순간을 보여준 것에 비해 <살아남은 아이>는 소년의 죽음의 순간을 보여주지 않는다. 이러한 소재의 영화에서 사건의 순간을 보여주는 것은 매우 효과적이면서도 매력적이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그 짧은 플래시백만으로 사고 순간의 고통, 자식을 잃은 이의 슬픔, 이미 지나쳐버린 사건의 안타까움을 안다. 하지만 영화 <살아남은 아이>는 이를 피하고 있다. 이는 재현의 윤리를 고려한 선택인 동시에 서사적 필요에 의한 선택일 것이다. 동시에 죄와 용서 그리고 진실의 문제를 다루는 영화의 신중한 선택이다. (이에 대해서는 글의 후반부에 다시 얘기하려 한다.)


카메라는 어떠한 과잉도 없이 조심스럽게 인물에 다가간다. 그 앞에 은찬이 떠나간 이후의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세 사람의 모습이 담긴다. 예상치 못한 상실이 남긴 빈자리를 견뎌내야 하는 슬픔.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 없이 거짓 위로를 하는 사람들. 영화는 겹겹이 쌓아 올린 세 인물의 일상을 통해 우리에게 죄와 구원 그리고 용서의 문제를 성찰하게 한다.


※ 다음의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진실을 바라보는 것은 어렵다.


성철과 미숙 그리고 기현이 유사가족을 이룬 영화의 중반부. 돌연 우리는 기현의 입으로 놀라운 고백을 듣는다. 은찬은 기현을 구하다 죽은 것이 아니라, 기현을 비롯한 친구들의 괴롭힘 때문에 사고로 죽었다는 것이다. 은찬의 죽음 이후 처음으로 안정을 찾은 듯한 그들의 삶은 기현의 고백으로 돌연 지독한 땅끝으로 다시 떨어진다.


성철과 미숙은 그날의 진실을 무엇인지 궁금하다. 그 자리에 있었던 아이들을 찾아가 진실을 알려달라 묻는다. 아들의 죽음을 위로하던 이웃들은 자신들의 아이를 가해자로 모는 성철과 미숙을 향해 거침없이 모진 말을 내뱉는다. 진실은 아들을 피해자로 만들고 거짓은 아들을 의사자로 만든다. 거짓이 진실보다 매력적이라는 역설은 진실을 진실로 바라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생각하게 한다. 처벌은 받지 않게 할 테니 제발 진실만은 알려달라는 성철의 절규에는 진실을 바라보는 것의 어려움이 서려 있다. 피해자에게도 가해자에게도 진실에는 용기와 노력이 필요하다.


누구도 증언하지 않고 어떠한 증거도 남아 있지 않은 상황에서 은찬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세상에 밝히는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은찬을 죽인 가해자인 동시에 진실을 은폐한 주도자인 기현만이 그들에게 진실을 알려주었을 뿐이다. 어떠한 희망도 진실도 기대하기 힘든 성철은 은찬이 사고를 당했던 강으로 기현을 데려와 목을 조르지만, 그대로 죽으려는 듯한 기현의 모습에 손에서 힘을 뺀다. 하지만 기현은 그대로 세상을 떠나기 위해 물속으로 뛰어든다. 은찬이 죽었던 곳에서 은찬이 죽었던 것처럼 기현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성철과 미숙이 그런 기현을 구하기 위해 달려들고 셋은 물에 잠긴 채 서로를 구한다.


이 장면이 인상적인 것은 은찬이 죽었던 곳에서 세 사람이 서로를 구한다는 점이기 때문일 것이다. 은찬은 누구의 구조도 받지 못하고 죽었다. 하지만 은찬의 부모는 기현을 구한다. 그들이 펼치는 간절한 허우적거림에는 죄를 지은 기현의 속죄가 있으며, 자식을 죽인 가해자를 향한 용서가 있다. 동시에 이 장면은 우리가 보지 못한 사고의 순간을 떠오르게 한다. 구하지 못한 은찬을 향한 애도가 담겨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앞서 얘기했든 플래시백은 효과적이면서도 매력적이다. 동시에 그것은 사고의 순간을 볼거리로 전락시킨다. 은찬의 죽음을 보여주지 않으면서도, 물에 빠져 서로를 구하기 위해 허우적거리는 세 사람의 모습을 통해 플래시백 없이도 은찬의 죽음을 그려보게 한다. 보여주지 않으면서도 숙고하게 하는 영화의 선택은 스펙타클 없이 은찬을 애도한다.



진실을 바라보는 것은 어렵다. 세 사람의 간절한 노력에도 세상은 끝내 그들의 진실을 믿어주지 않는다.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천박한 위로를 건네는 이들은 진실을 보지 못한다. 피해자에게 자신의 죄를 숨기는 가해자들 역시 진실을 보지 못한다. 어쩌면 진실은 사실을 아는 것보다 그것을 정확히 받아들이는 태도에 있는지 모른다. 플래시백을 통해 죽음을 보여주었다면 우리는 그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이에 대한 적절한 응답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기현을 제외한 모든 아이들이 사건을 외면한 가운데 겨우 진실을 견디고 있는 세 사람은 서로의 생명을 구하려는 절실한 마음을 가진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장면은 은찬을 향한 애도이기도 하다. 진실은 그날의 ‘팩트’보다도 그들의 ‘움직임’에서 더 간절하게 느껴진다. 그 간절함을 당신도 느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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