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력처럼 피할 수 없는 시간과 다시 시작하는 힘
2011년 여름, 영화감독 임권택이 홀로 서재에 앉아있다. 하늘의 태양과 그 곁을 스치는 구름을 응시하는 영화의 첫 장면을 지나, 우리는 임권택의 어두운 서재를 방문한다. 거기서 그는 조용히 앉아 차를 내리고 있다. 물을 따르고, 찻잎을 담고, 물을 버리고. 차를 내리는 나이 든 남자의 손가락은 거칠게 떨리고, 몸은 더디게 움직인다. 그리고는 무언가 맘에 들지 않는 듯 '다시'를 외치며 녹차를 내리는 과정을 반복한다. 임권택 감독은 손님이 오면 직접 차를 내려 녹차를 대접한다고 한다. 마치 자신을 찾아온 카메라를, 그리고 카메라를 경유하여 방문한 관객을 맞이하듯 그렇게 녹차를 내린다. 그 더딘 움직임으로. 다시.
영화 ‘녹차의 중력’은 영화평론가이자 영화감독인 정성일이 임권택 감독의 영화제작 과정을 좇는 다큐멘터리이다. 그의 인터뷰에 따르면 영화에 대한 배움을 위하여 감독의 촬영 현장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영화제작은 늦어지고 어쩔 수 없이 그는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두 편의 다큐멘터리가 제작되었으며, 기다림의 과정에서 찍은 다큐멘터리가 ‘녹차의 중력’이고, 영화의 촬영 현장을 담은 다큐멘터리가 ‘백두 번째 구름’ 이다. 극적인 구성을 바랐다면 영화 제작의 어려움과 영화의 완성이라는 성공 서사가 가능했을 것이다. 혹은 길게 한 편으로 붙여 영화제작의 시간을 관객이 경험하도록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둘로 나누는 선택을 했다. 마치 하나가 하나와 나뉘어 서로를 마주 보아야 한다는 듯이.
임권택 감독이 녹차를 내리던 서재의 그 자리에, 이번에는 그의 둘째 아들인 현상이 앉는다. 그리고 아들의 목소리로 아버지의 탄생부터 첫 영화 '두만강아 잘있거라'를 만들던 과거의 시절을 독백한다. 아버지(임권택)로 분하여 젊고 건강한 목소리로 말하는 그의 모습은 이전 쇼트에서 봤던 임권택의 힘겨운 움직임과 공명한다. 임권택이라는 육체의 더딘 움직임. 젊은 임권택으로 분한 목소리의 힘. 그것은 임권택 내부에 있으면서도 임권택의 육체에서 천천히 소멸해가고 있다. 젊은 아들의 육체에서 그 힘은 임권택의 언어를 빌려 재현되지만, 중력처럼 피할 수 없는 시간은 1936년에 태어난 감독의 차를 내리는 더딘 움직임과 같이 그것을 천천히 빼앗아 갔다.
101개의 영화를 만든 감독 임권택. 그의 102번째 영화는 쉽게 진행되지 못한다. 102번째 영화를 함께 기다려야 하는 다큐멘터리의 카메라는 임권택의 일상을 따라간다. 동아대학교로 강의를 하러 가는 임권택의 육체는 ktx 역에서나 기차 안에서나 거의 정지한 듯 멈춰 있다. 반면 그 뒤로 걸어가는 사람들은 움직임은 역동적이고, 창밖의 풍경은 바삐 변한다. 그 변화 속에 임권택의 육체만이 멈춰선 느낌이다. 특히나 ktx에 타자마자 잠이 들어버린 임권택과 그 뒤로 빠르게 변화하는 풍경을 멍하니 바라볼 때면 임권택이 겪었을 시간의 속도가 물화된 듯 느껴지기도 한다.
반면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영화를 말하는 그는 얼마나 힘이 넘치는가. 물론 그의 몸은 느리고 띄엄띄엄 힘겹게 말을 이어나가지만, 영화를 배경으로 한 그의 눈빛은 여전히 빛나며, 잘못된 장면을 만들었다는 부끄러움과 한국만의 영화를 만들었다는 당당함을 말하는 그는 여전히 격렬하다. 또는 늦은 나이에 세례를 받으러 성당을 찾은 장면에서 그는 절차에 대해 잘 모르겠다는 듯 옆자리의 젊은 여자를 따라 더듬더듬 움직인다. 익숙하지 않은 과정에 신기해하며 이따금 웃어 보이는 그의 표정을 볼 때면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넘쳐나는 어린아이의 귀여움이 느껴지기도 한다.
자신의 영화가 진행되기를 기다리던 임권택은 김동호 집행위원장의 영화 <주리>에 특별출연하기 위해 촬영 현장을 찾는다. 분주한 현장 속 임권택의 얼굴을 쫓던 카메라는 돌연 현장의 한 이방인에게 카메라를 돌린다. 이란에서 망명한 영화감독. 그는 지금 김동호 집행위원장의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다. 잠시도 멈추지 않고 자신의 다큐멘터리를 위해 분주하게 현장을 누비는 움직임. 영화는 한동안 그 움직임에서 눈길을 떼지 못한다. 이 순간 임권택 감독은 어두운 실내에 아무도 없는 모니터 앞을 바라보며 앉아 있다. 홀로 앉아있는 임권택과 빈 모니터를 바라보는 임권택의 시선이 교차하는 이 순간은 아마도 이 영화에서 가장 쓸쓸한 장면 중 하나일 것이다. 102번째 영화를 기다리는 임권택은 저 현장의 감독들처럼 영화를 찍을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은 그에게 육체적으로, 그보다도 산업적으로 영화를 찍을 수 없다고 한다. 이 할 수 있음과 할 수 없음의 괴리로 현장에 놓인 그의 육체는 무력하다.
시간이 더디게 흘러 그의 102번째 영화. '화장'의 제작이 진행된다. 좁은 사무실. 가득 찬 사람들. 정중앙에 임권택 감독. 앞으로의 일정과 촬영 방식에 관해 얘기하는 그의 모습에서는 이 영화의 그 어느 순간에도 명확하게 느껴지지 못했던 힘이 있다. '힘이 있다'라는 것은 육체의 젊음이나 물리적 에너지만으로 발현되는 것이 아님을 그의 몸이 증명하고 있다. 여기서 그의 영화는 끝난다. 다음에 이어질 영화는 당연히 그의 102번째 영화 제작기일 것이며, 그 제목은 '백두 번째 구름 '이다.
하나의 일을 평생의 업으로 삼아 반복하는 이는 시간이 흘러 나이를 먹고 세월을 겪는다. 여기서 임권택은 그 육체의 무상함과 그럼에도 지속하는 이의 힘을 스스로 증명한다. 거기에는 세상의 힘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이의 무력함과 그것을 받아들이고 마는 숭고함이 공존한다. 그 지속의 힘. “다시.” 녹차를 따르던 이가 새로운 영화를 시작하는 것으로 영화는 마무리된다. 그리고 저 하늘의 태양에 다시 구름이 드리운다. 하나는 임권택의 '화장'이고, 다른 하나는 정성일의 '백두 번째 구름'이다. 두 개의 영화는 그렇게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