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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중 Nov 05. 2023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감상평

꿈에는 힘이 있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우리 외할머니가 그랬다. 그녀는 다섯 남매를 낳았고, 걱정이 매우 많았다. 자식 걱정에 70살 노인이 되어서도 문득문득 꿈을 꾸고, 그다음 날 자식에게 전화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그 뒤숭숭한 꿈 내용이 '부모가 걱정할까 자식이 숨겼던 문제들'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이다. 예지몽을 믿는다기보다 자식 걱정에 밤잠을 설쳤던, 외할머니의 사랑을 믿는다.


어제는 유달리 생생한 꿈을 꾸었다. 내가 죽는 꿈이었다. 갑상선 암인지 후두암인지, 목 어딘가에 병이 생겼고 그 병은 죽을병이라고 했다. 그 병명은 기억나지 않지만 목 근처에서 발병하는 암 무언가였고, 나는 그것을 듣자마자 나의 죽음이 머지않았다고 느꼈다. 예전부터 친했던 의사 아저씨에게 전화를 했고, 그 아저씨는 자기 일인 양 안타까워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며 죽음을 준비하라고 했다. 다른 건 어렴풋하지만 내가 한 달 즈음도 못 살 거라는 것과, '그런데 왜 지금은 멀쩡하죠?'라고 주치의에게 물었던 것과, 죽음을 맞닥뜨린 자의 절망이 기억난다. 이게 진짜일리 없다는 자기 부정과 절망이 소용돌이치다가, 이내 체념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꿈속에서, 나는 삶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네 살 된 아들의 안위가 가장 걱정되었다. 아빠 없는 아이로 자라날 아들을 걱정하다가 진땀을 흘리며 잠에서 깼다.


서론이 길었다. 이 영화도 앞선 꿈 이야기들처럼 모호하고 비논리적이다. 하지만 욕망과 걱정, 사랑과 삶이 녹아들어 있다. 이제 82세가 된 일본 애니메이션계의 거장, 미야자키 하야오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君たちはどう生きるか, 2023)'이다.


영화를 본 사람들은 '아방가르드하다'고도했고,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가 없다'고도했고, '알아들을 수는 없지만 아름다운 이야기'라고도 했다. 그것은 영화의 전개가 현실과 비현실, 꿈과 과거를 오가기 때문일 것이다. 스토리는 간단히 말해 '제2차 세계대전 중 군수품 생산으로 큰돈을 버는 아버지, 화재로 돌아가신 어머니, 전쟁을 피해 시골로 내려간 주인공'이 있고, '아버지는 어머니의 여동생과 재혼하고, 시골로 전학 간 주인공은 새엄마와 새 학교 모두에 적응하기 힘들어하다가 꿈같은 세계로 빠져든다'가 중요한 골자일 것이다.


전쟁 중에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아이가 판타지 세계로 빠진다는 이야기는 특별하지 않다. 소설 '나니아 연대기'와도 유사하고, 제작자가 직접적인 원작으로 거론한 존 코널리의 '잃어버린 것들의 책'과도 이야기 구조가 비슷하다. 그러나 고백하자면 나는 전혀 뻔하게 느끼지 않았고, 영화의 절정 부분에서는 눈물을 찔끔 흘릴 정도로 감동받기도 했다.


게다가 미야자키 하야오의 전작들을 좋아했던 팬이라면 그 작화와 연출 방식에 모두 감동받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야기가 나온다는 점에서 '붉은 돼지(1992)'와 '바람이 분다(2013)'이 생각나고, 주인공이 시골집에 이사 온 뒤로 이상한 왜가리와 만나는 부분은 '이웃집 토토로(1988)', 판타지 세계로 빠져드는 부분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 판타지 세계의 출입구가 되는 탑에 관한 묘사 등은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 그곳에서 만난 소녀와 벌이는 모험은 '천공의 성 라퓨타(1986)'를 닮았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피하겠지만 영화의 절정에서 어떤 부분은 '모노노케 히메(1997)'를 닮기도 했고, 사랑앵무 다수가 등장하는 장면에선 '바람계곡의 나우시카(1984)'가 생각나기도 했다.


이야기 전개 방식이 비논리적이고 모호하기 때문에, 스토리를 구체적으로 평하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인다. 다만 영화 속 주인공의 상황이나 사건으로 느껴지는 것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오랜 시간 동안 느꼈을 고민과 고독이다. 미야자키 감독의 실제 삶과 대입해 보면 이는 더욱 분명하다. 전쟁을 혐오하지만 전쟁특수를 누린 군수공장 공장장 아버지, 그 아버지 덕분에 부유했던 어린 시절. 학창 시절 내내 보았던 전투기와 탱크, 그것에 빠져 그림만 그렸던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 살인 병기임에도 불구하고 탱크과 전투기의 미학을 사랑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인정. 이 모든 것들이 뒤섞여 있는 모순덩어리가 자기 자신이라는 것 아닐까.


사실 그건 미야자키 감독만의 문제도 아니다. 내가 잘 먹고 잘 사는 데에는 누군가의 불편과 고통이 수반되는 것이 아닐까. 이 답답하고 찝찝한 물음은 생애 내내 지속된다. 단순히 '우리가 지구 환경을 파괴하고 있다는 인식' 또는 '생명을 죽여 육식을 하고 있다는 죄책감' 에서부터 조금 더 구체적이고 실제적이며 고차원적인 것들까지. 살아가는 것은 답답하고 모순적이다. 그래서 아름답기도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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