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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mmer Studio Nov 27. 2018

세상의 모든 하이힐

'하이힐' 과 '아프리카'두 단어에서 시작된 이야기

세상의 모든 하이힐이 모인 것 같은 곳이다.

반들 반들한 대리석 바닥 위로 미끄러졌다가, 콱 박히었다가, 뛰어갔다가, 목적지가 서로 엉켰다. 발목도 보았다. 얇은 발목, 스타킹을 신어 빛이 나는 발목, 두꺼운 발목. 화상을 입은 발목을 보았을 때는 멀어질 때까지 한참을 보았다. 아주 어릴 때 입은 상처일까? 어느 영화에서 본 것처럼 아내가 집을 나간 사이 낯선 여인을 집에 들여, 들끓는 정욕처럼 끓어 넘친 물이 아이의 발목을 덮쳤을까? 화상 입은 발목을 가진 여인의 얼굴을 보았다. 아주 밝아 보였다. 상처는 그저 상처뿐일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하이힐이 모인 것 같다. 처음에는 운동화도 있고 샌들도 있고 그랬던 것 같은데. 지금은 세상 모든 하이힐이 내 앞에 모여들어 또각또각 소리를 내면서, 대리석 위를, 계단 위를, 에스컬레이터 위를. 온통 하이힐이다.


아무래도 엄마 생각을 해서 그런 것 같다. “엄마, 그건 파란색이지?”라고 물었을 때 엄마가 무슨 표정을 지었더라? 어떤 감정이라기보다는 그저, 일그러짐이었다. 그때는 지금보다 훨씬 어려서 그냥 엄마가 나를 싫어하는 줄 알았다. 다시는 파란색이 파란색이 맞냐는 이런 바보 같은 질문은 하지 말아야지, 다짐했다.


그래, ‘참담함’에 가까운 표정이었지. 10분 전 내 눈 앞을 지나간 파란색 하이힐을 보며 생각했다. 세상 모든 하이힐이 여기로 몰려들기 시작했던 건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엄마는 왜 파란색 하이힐을 신고 나가려다 ‘엄마, 그건 파란색이지?’ 질문을 듣고 얼굴을 일그러트렸을까? 차라리 엄마가 그때 눈물을 흘리거나, 그래, 울어버렸더라면 엄마가 나를 떠나서 슬픈가 보다, 했을 텐데. 일그러진 엄마의 표정이 나를 떠난 슬픔이라는 걸 알게 되기까지 너무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제는 나도 혼자서 꽤 멀리까지 나가도 될 나이가 되어서야, 꽤 멀리까지 나와도 다시 집으로 돌아갈 힘이 생기고 나서야, 이 공항에 올 수 있었다. 5년 전이었다.


그 파란색 하이힐을 신고 나갈 때 엄마가 내게 했던 마지막 말은 아프리카에 간다는 것이었다. ‘엄마의 꿈과 너의 행복이 거기에 있어.’ 나는 여기에 있고 엄마는 아프리카라는 세상에서 제일 먼 곳에 있게 되는데, 그게 꿈과 행복이 될 수 있을까? 어렸지만 직감적으로 알았다. 꿈과 행복이 아니라 불행이 거기에 있겠구나. 그리고 엄마는 떠났다.


5년 전,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엄마를 찾아 떠나겠다는 낭만적인 생각으로 온 것은 아니었다. 그냥, 이 땅을 떠나기 전 엄마가 마지막으로 머물렀을 공간에 나도 머물러보고 싶었다. 아침부터 해가 질 때까지 이 의자에 앉아 엄마를 생각했다. 처음에는 엄마가 나를 왜 떠났을까? 그 생각으로 하루를 꼬박 보냈다. 비가 오는 날이었다. 엄마가 나를 버렸다는 생각을 하다 기절했다. 응급실에서 눈을 떴을 때 처음 든 생각은, 비가 오니 혈압이 떨어졌나 보다,였다. 어깨에 새까만 멍이 들었다. 엄마는 아프리카에 갔다는데, 거기에 있는 사람들은 내 어깨처럼 온통 까만 피부를 갖고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또각또각 또각. 파란색 하이힐이 내 앞에 멈춰 섰다. 까만 발목, 매끈한 종아리, 파란 H라인 스커트, 단정한 재킷 차림에 까맣고 고부라진 머리카락을 야무지게 틀어 올린 여인. 얼굴은 글세, 잘 모르겠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또각또각 또각. 대리석 바닥 위를 걸어가는 세상 모든 하이힐의 또각거리는 소리가, 파란색 하이힐이 내 앞에 서자 일제히 멈췄다. 얼굴도 잊고 목소리도 잊었다. 그저, ‘엄마 일 것이다’ 여겨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그때 파란색이 맞냐는 멍청한 질문이 아니라, 엄마, 나를 버리지 마. 그렇게 말했으면 좋았잖아.”


뒷목 언저리가 뻐근하다. 오른쪽 관자에서 왼쪽 관자로 무언가 묵직한 것이 지나가는 느낌이 든다. ‘엄마도 그때 차라리 울어버렸더라면 좋았잖아. 그럼 나도 울면서 엄마를 잡았겠지. 제발 날 버리지 말아 달라고 하면서.’ 머릿속에 있던 나의 생각이 목소리로 흘러나왔을까? 그건 잘 모르겠고. 엄마, 그래서 아프리카에서 언제 돌아오는 거야? 그걸 물어보려던 차에 기절했다.


멈췄던 세상 모든 하이힐 소리가 다시 울린다. 또각또각 또각. 내 세상을 가득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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