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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뇌오리 May 31. 2023

#004

대리 유서


"""

  해야할 것들로 꽉 차버려

  짧은 감상에도 빠지지 못하는 날이었습니다.

  감정이 말랐습니다.

  삶이 건조해져 갑니다.


  살아온 만큼 쓰겠습니다.

  아무리 써내려가도 채워지지 않는, 그 곳에서 우울하려 합니다.

  우울에 번져버린 이 유서로 제 삶을 채우려 합니다.

  쓴 만큼 다시 살아내겠습니다.

"""



  확진이 나기도 전에 임종을 기다려야겠다 마음먹는 하루였다. 몸은 망가져있고 정신은 오락가락하고 있는 당신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병간은 이틀만에 진절머리가 나버렸고 더이상 할 용기가 나지 않는다. 지난 어느날과 같이, 나는 너무나도 어쩔 수 없이 또 도망치는 중이다.


  당신으로부터 처음 도망친 것도 그리 오랜 일은 아니다. 그간 오히려 도망치지 않고 당신을 위해 살았다 말할 수 있다. 걱정을 덜어주기 위해 열심히 살았을 뿐인데, 내가 열심히 산 만큼 당신에게는 마음의 짐이 생겨버렸고, 그 짐을 알게 될수록 나는 당신을 버려야만 했다. 우리는 그렇게 상처만을 줬다. 어느 한 순간 상처주려 한 적 없었으나 그렇게 되었고 그건 우리 관계도 그렇게 마찬가지다. 병간할 용기를 잃는 순간 나는 이제까지와는 다른 이유로 당신을 버려야만 했고, 그 덕에 한걸음 더 불효자에 가까워졌다.


  나는 당신의 평생이 버림 받는 순간으로 가득 차있다 생각한다. 어떻게 나의 버림만으로 당신의 평생이 가득 찰 수 있겠는가. 자업자득이든 뭐든, 당신은 버림으로부터 스스로를 구제하기 위해 누군가에게 또 누군가에게 헌신했음을 안다. 하지만 그 헌신이 이용당하거나 혹은 그 많은 헌신들을 몇가지 실책때문에 고작으로 만들어버리기 일쑤인 당신이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제 삶을 스스로 버리는 지경이니 무슨 삶이 이런가 싶다. 왜 우리에게 헌신하지 않았냐 묻진 않을거다. 이미 억울한 삶에 무얼 더 보태겠다고 그런걸 묻겠나.


  선망인지 치매인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당신이 30분마다 한시간마다 기억을 잊으면서도 한다는 게 5년도 전에 졸업한 형에게 언제 졸업하냐고 하는 것과 4년 넘게 서울에서 지낸 나에게 어디냐고 언제 서울갔냐고 새직장은 다닐만 하냐고 하는 것, 밭에 짐승 밥줘야한다는 걱정뿐이다. 당신이 어떤 삶을 살았는 지, 얼마나 헌신 했는지 이제는 알 것만 같다. 그게 조금 삐뚤어졌고, 그래서 우리에게 닿지 않았을 뿐이라 생각한다.


  걱정이 아닌 것은 금지당한 담배를 찾는 것 뿐이니, 왜소한 체격에 걸맞는 초라한 말로다. 그런 당신을 위해, 당신이 써야할 유서를 대신이라도 써야하지 않을까. 당신이 마지막으로 남길 유언은 무엇일지 미리 생각해둬야 하지 않을까. 마지막 순간에 당신이 미처 다 하지 못할 말들에 대해서, 나는 이미 알고 있노라 괜찮노라 말해줘야 하지 않을까. 당신의 말이 짧을지언정 당신의 마음마저 짧지 않음을 알기에, 나의 목소리를 통해서라도 당신의 말을 나에게 전해야만 한다. 당신을 위해 쓰지만 당신은 알지 못할 글을 쓰는 것 밖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

  부고는 언제나 죽음보다 늦습니다.

  죽음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미 거의 완성되었습니다.  


  부고는 언제나 죽음보다 늦습니다.

  유서는 죽음보다 먼저이니, 오늘도 죽어갈 나를 위해 씁니다.


  유서는 썼지만 죽고싶진 않습니다.

  오늘도 죽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치는 나를 사랑합니다.

  오늘도 치열하게 살아남아 내일도 다시 장엄하지 않은 유서를 보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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