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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날씨 Oct 24. 2021

왜 미안하다고 안 해? vs. 맨날 미안하다고만 하지

방어적인 사람 vs. 반성적인 사람

나는 사과를 빨리 자주 하고 그는 사과를 느리게 가끔 한다.


내가 주로 저지르는 잘못은 조심성 없이 감정을 드러내는 것이다. 짜증 말이다. 그것에 대해 지적받으면 바로 사과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잘못을 반복하고 빠른 사과 또한 반복한다. 부정적인 감정을 내보냈기 때문에 속이 풀린 나는 사과도 쉽다. 이미 짜증을 받아낸 그는 내 사과를 받으며 슬퍼 보인다. “당신은 맨날 미안하다고만 하지.” 이 말에는 관용과 인내와 체념이 고루 들어있다. 나는 이제 미안하다는 말도 못 하겠다며 투덜대지만 그의 체념이 깊어질까 봐 두렵다.

미안하다는 말을 남발하며 정작 못된 습관을 고치지 않는 게 내 문제다. 그리고 매번 심한 자괴감에 빠진다. 내가 또 엉망으로 굴었어, 나는 왜 이 모양일까, 구제불능이야. 상대에게 미안해 어쩔 줄을 모른다. 그러나 과하게 반성하는 것보다 잘못을 고치려는 데 에너지를 쓰는 것이 관계를 잘 가꾸는 길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는 나처럼 반복해서 저지르는 잘못은 없다. 하지만 그가 반복하는 것은 잘못을 지적당했을 때의 태도다. 그는 입을 다물고 알겠다고만 한다. 미안하다고는 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방어적으로 군다고만 생각했다. “당신은 잘못했을 때 왜 미안하다고 안 해?” 그는 머리가 하얘진다고 했다. 거기엔 내 탓도 있었다. 나는 그의 잘못을 지적할 때도 짜증을 냈다. 그는 내가 짜증을 내면 몸이 굳고 머리가 굳어 딱딱하게 서서 견디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짜증에 얼고 기분이 상해버리니 뭘 잘못했는지 생각할 수도, 미안하다는 말을 할 수도 없어졌다. 


그가 차갑게 식어가는 차를 앞에 두고 굳은 얼굴로 미동도 않고 앉아서 내가 그의 잘못과 그게 나에게 어떤 생각과 감정을 불러일으켰는지를 말하는 것을 들으며 알겠다는 말 외에는 하지 않고 있을 때, 나는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내가 좋아하는 애플파이에는 손도 대지 못하고 있다. 그는 너무 빠르게 알겠다고 했다. 나는 아직 할 말이 남아 있는데, 알겠다고 하는데도 왜 계속 말하는지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성급한 알겠다는 말은 내가 잘할게만큼 텅 비어있다고 느꼈다. 대체 뭘 알고 뭘 잘하겠다는 건지 발화자조차 정확히 모르고 있다는 데 머리카락을 열 올쯤 걸겠다. 


내가 잘할게는 연애 초기 그의 입버릇 같은 것이었다. 그의 기준에서 나는 평균보다 좀 더 까다롭고 민감하고 섬세했다. 그는 나에게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성실한 태도였으나 그가 잘해야 하는 것이 점차 많아지면서, 그것들 모두를 그가 잘하기가 어려워지면서, 점점 텅 빈 말이 되어갔다. 성실함은 여전히 깔고 있지만 그에 더하여 당장의 갈등을 피하고자 하는 방어와 나를 기쁘게 만들고 싶은 사랑과 쌓여가는 항목들에 지쳐가는 체념이 합해졌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잘하려는 게 뭔지 정말 알고 있는지, 정말로 잘할 자신은 있는 건지 나의 의심도 쌓여갔다. 그리고 사실은 그가 다 잘해야만 하는 일도 아니었다. 당시의 그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스스로도 나에게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그와 나 사이에 조율과 합의가 생겨나면서 내가 잘할게는 서서히 사라졌지만, 당장 갈등을 피하려 하고 자신의 잘못을 세세히 인정하지 않으려는 그의 태도는 분명 방어적이었다.


그렇지만 나도 잘하겠다는 뜻의 말을 종종 한다. 언제나 지적당하는 짜증을 내고 나면 앞으로 조심하겠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한다. 변명을 해보자면 그 말은 진심이다. 진짜로 노력하고 있다. 언젠가 그가 나의 노력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는 걸 보고 노력의 순간마다 말로 증거를 남기고 있다. 접때도 짜증이 훅 솟구쳤는데 꾹 참고 당신에게 기분 좋게 말한 거예요. 그는 조금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그것도 짜증이 나는 일이었던 거예요? - 그럼요. 나는 그럴 때도 짜증이 팍 난다고요. - 그래요, 잘 참았어요. 아주 잘했어요.


내게 중요한 것은 내가 나의 관계를 분석하고 해석해낸다는 점이다. 관계 안에서 궁지에 몰렸을 때 그와 내가 보이는 태도가 각각 어떤 것이고 어디에서 왔는지를 알고 나면 그에 대응하는 것은 전혀 어렵지 않다. 


잘못은 별로 안 하지만 방어적인 사람과 잘못을 자주 하나 반성적인 사람이 만나 서로 노력하고 있다. 이제 나는 카페에 마주 앉아 그에게 부드러운 말로 “미안하다고 말해야죠”라 하고 차가 식기 전에 파이와 함께 맛있게 먹는다. 그는 나에게 “당신이 노력하는 걸 알아요”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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