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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날씨 Oct 24. 2021

안아줘, 들어줘, 말해줘

당신에게 요구하는 세 가지

내가 그에게 요구하는 것은 이것뿐이다 - 안아줘, 들어줘, 말해줘. 아니, 이 문장에 '뿐'이라는 조사는 어쩌면 맞지 않을 것이다. 이 세 가지는 간단해 보이지만 실은 전혀 간단하지도 결코 쉽지도 않은, 내가 생각하는 좋은 관계의 핵심이다.


나는 그의 몸이 필요하다. 화상이나 전화 상으로는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아침에 잠이 깨면 곧장 그의 침실로 간다. 그의 이불속 공기는 밤 동안 머물러있던 체온으로 데워져 있다. 등 뒤에서 그를 껴안고 뒤통수에 코를 박고 냄새를 맡는다(전날 밤 머리를 감았을 때만). 그러면 그는 손을 뒤로 돌려 잠이 잔뜩 묻은 손짓으로 엉덩이를 두드려준다. 그렇게 누워서 하루를 시작할 힘을 그러모은다.

그의 몸이 눈앞에 보이면 나는 안거나 만지거나 기대거나 쓰다듬거나 하다못해 가벼운 펀치라도 날리지 않고는 못 배긴다. 그의 몸은 내 쉼터다. 가끔씩 내가 사라진 것 같을 때, 마음이 너무 거대해져 나를 집어삼킨 것 같은 날, 나는 그에게 안아줘 하고 말한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말이 없고 하고 싶은 말도 없다. 더 꽉, 더 세게. 가슴이 짓눌리고 숨이 콱 막혀와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 주길 바란다. 그만 그만, 이제 됐어. 성대가 눌린 목소리로 내가 말할 때까지 그가 온 힘을 다해 나를 껴안음으로써 내가 그를 느끼고 나를 느끼고 존재를 느끼고 싶다. 비로소 몸에 피가 돌고 나는 몸을 움직여 다른 곳으로 갈 수 있다.

귀를 깨물면 그가 아파한다. 어디 몸이 안 좋은 거 아녜요? 귀는 온몸의 부위와 연결되어 있다던데. - 아뇨, 이렇게 물면 누구나 아파요. 그의 몸에 자극을 주고 반응하는 걸 보는 게 재밌다. 그의 엄지발톱에 낀 양말 찌꺼기를 빼내며 내가 말했다. 나, 진짜 당신을 사랑하나 봐요. 이런 것도 이제는 더러워 보이지 않잖아요. - 나는 원래도 당신의 그런 거 다 아무렇지 않았는데요? 그의 몸은 내 놀이터다. 그를 느끼고 싶을 때 몸은 즉각적이고 효과적인 통로다. 몸이 있어서 다행이다. 만지고 만져질 수 있어서.


하지만 순간적인 포옹만으로 위안을 얻으려면 대화가 전제되어야 한다, 고 믿는다. 나는 우리가 서로 끝없이 들어주고 말하기를 바란다. 이것을 제대로 해내기만 한다면, 우리가 헤쳐나가지 못할 것이 없다. 그가 나의 말을 제대로 들어주기를, 거기에 대해 제대로 말해주기를,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또한 제대로 말해주기를, 내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다.  


그의 달력에는 희한한 날이 적혀있다. 클라우드로 작동하는 가족 캘린더에 표시해놓았기 때문에 매년 나에게도 그날의 알림이 온다. 거기에는 내 이름이 쓰여있다. 그 뒤에 '미운 날'이 연달아 적혔다. 잊고 있다가도 일 년에 한 번 알림이 오면, 뭐였지? 아 맞다 내가 그랬지... 많이 서운했죠? 근데 달력에 적을 만큼 그렇게... 서운했어요? 아 그쵸 그쵸, 정말 서운할 만한 일이죠. 다시 한번 미안해요, 버릇처럼 말한다.

그가 ppt 화면을 띄워놓고 회사에서 발표할 연습을 하고 있었고, 잘 들어달라고 했다. 나는 흐름이 자연스러운지, 내용 전달이 명확한지, 구성이 체계적인지 체크해야 했지만, 몇 번의 연습이 반복되자 어느새 집중력을 잃었다. 나도 모르게 휴대폰을 봤던 것 같다. 침대에 반쯤 누워 건성으로 엉, 엉, 대답했다. 목이 아파 물을 마시고 다시 발표 연습을 잇던 그가 결국 얼굴이 빨개진 채 서운함을 토해냈다. 내가 그토록 강조하는 '들어줘'를 제대로 해내지 못한 날이었다.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상대의 얼굴을 바라보는 것만큼 절망적인 일이 있을까. 그게 아무리 사소한 일에서 비롯되었다 하더라도 나에게 무심한 얼굴은 심장을 콕 찌른다. '나를 들어줘'와 '당신을 말해줘'는 내가 끝에 끝까지 잡고 있는 관계의 구명보트 같은 것이다. 잘 알면서도 자꾸만 그걸 달력에까지 적어놓은 그가 귀엽고 웃겨서 매번 물어보게 된다. 그렇게.. 서운했어요? 아 그쵸 그쵸, 맞아요.

손잡고 걸으며 대화할까요? 하는 뜻을 담아 그에게 말한다. 우리 산책 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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