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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월날씨 Oct 24. 2021

나는 당신을 위로하지 못해

사랑의 방식이 다른 거겠지?

나는 당신을 잘 위로하지 못해. 그건 꽤 무력한 일이야. 당신의 고민 앞에서도 내 효능감을 생각하고 있다니, 상대를 해결하고 고쳐주고 싶은 욕망에 너무 집중하는 건가? 그렇지만 정말 무력하단 말이야.


게다가 나는 당신 상태에 영향을 왕창 받잖아. 당신의 스트레스를 어쩌면 내 것보다 더 심각하게 끌어안고 괴로워하잖아. 당신이 스트레스받는 걸 보면서 내가 스트레스를 받고, 그런 내 모습에 당신은 더 스트레스를 받고... 알아, 안 그러기로 했지. 당신을 따라 하려고 노력 중이야. 내가 아무리 우울의 땅굴을 파고 있어도 방에서 웹툰 보며 끽끽 웃다가 내가 “나한테 좀 와줘요” 하고 겨우 부르면 웃음기가 남아있는 환한 얼굴로 내 침대로 와서 “많이 힘들어요?” 하고 토닥여주는 당신처럼. 웹툰 보며 웃고 난 에너지를 나에게 쓰는 것이지. 가끔은 요청을 해야만 위로가 온다는 게 아쉽기도 하지만, 요청하기만 하면 당신은 최고로 성실한 자세로 임하니까 그거면 됐다 싶어져. 그래서 나도 당신의 고민과 적당한 거리를 두려고 애쓰는 중이야. 그게 나에게도 우리 관계에도 좋다는 걸 알아. 아직 잘 되지 않을 뿐.


당신은 날 위로하는 데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났어. 당신은 내가 위로를 잘 받아들이는 사람이라 그렇다고 하는데, 그것도 맞지만 어쨌든 당신은 늘 그럴듯한 해결책을 내주잖아. 내가 완벽한 해결책을 찾느라 아무것도 못하고 있으면 당신은 당장의 가벼운 해결책을 내밀고, 내가 제대로 못해낸 것에만 집중하고 있으면 아주 작은 거라도 잘한 것, 최소한 예전에 잘한 것이라도 끄집어내어 나를 북돋아주고, 평소에 정확한 평가만 해온 사람으로서 얻어 놓은 신뢰를 기반으로 진짜처럼 믿게 만드는 약간 과장되어 있는 칭찬 세례를 퍼부어주곤 해.


그럼 나는 바닥까지 침울해하다가도 “...진짜?” 하면서 슬며시 웃고 말아. “나 진짜 잘했어요?” 하고,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이라도 간절한 마음으로 당신을 바라보게 되는 게 매번 신기해. 평소의 냉소적인 나라면 어차피 뭐라고 답할지 뻔한 말을 굳이 입 아프게 왜 해? 하면서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 다 돌린 후에 결국 해결되지 않은 절망적인 마음으로 입을 꾹 다물어 버릴 텐데, 당신의 “그럼요. 진짜 잘했어요. 당신은 최고예요”라는 말을 기다리고 예상이 빗나가지 않은 대답을 단단하게 힘주어 말하는 당신의 목소리에 위안을 받는 순간의 기쁨이 얼마나 큰지.


그러고 보니 당신은 잘 모르겠다. 당신은 “나 잘했어요?”라고 묻지도 않고 내가 아무리 잘했다고 말해도 “그렇게 봐줘서 고마워요. 근데 당신이니까 그렇죠”라고 힘없이 대답하잖아. 어떤 침울하고 취약한 순간에도 논리와 이성으로 무장한 사람아. 으이구, 이리 좋은 순간을 모르고. 속상해. 그렇지만 우리는 서로 다른 사람이니까 효과적인 위로의 방식도 다른 거겠지.


서로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의 방식도 다르잖아. 예를 들어, 나는 당신이 샤워하는 동안 샤워부스 옆에 서서 말을 걸어줘. 그건 당신이 나에게 주지 않는 방식의 사랑이야. 나는 당신 옆에서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회사에서 재밌는 일이 있었는지, 점심은 뭐 먹었는지, 심심하지 않게 말동무해주는 게 좋은데. 그런데 반대의 상황에서 당신은 맥없이 서서 내가 샤워를 마치길 기다리며 말을 주고받는 것을 웬일인지 힘들어해.


사랑의 방식이란 이렇게나 다양한가 봐. 내가 주고 싶은 것과 당신이 받고 싶은 것, 내가 줄 수 있는 것과 당신에게 효과적인 것을 잘 맞춰나가 보자. 다음에 당신이 괴로워할 때는 당신 좋아하는 볼링을 치러 가자고 해봐야겠다. 그것도 안 되면, 뽀뽀나 퍼부어주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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